'창작시'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1.10.20 가을녁 사랑
  2. 2011.04.06 야근 4
  3. 2011.03.29 봄바람 2
  4. 2011.03.07 후회
  5. 2011.01.06 오래된 농담 6
  6. 2010.10.14 바램 6
  7. 2010.10.12 낙엽 태우는 계절 4
  8. 2010.10.09 옛 사랑 2
  9. 2010.10.07 들을 수 있는 동안 4
  10. 2010.10.06 다짐 6

가을녁 사랑


가을녁 사랑일랑 하지를 마오
고작 한철 벌겋게 얼굴 붉히다
이내 바람결에 쓸려 떨어져
끝내 누런 먼지로 밟혀나갈
부질없는 정일랑 주지를 마오
아즉, 겨울도 되기 전이외다
그대 견뎌야할 고독은 차고도 깊소
둘러보오, 그대보다 어린 나무들도
홀로 북풍을 이겨낼 준비를 하오
다시 봄의 싹을 얻기 위해선
한껏 아름답게 물드는것보다
단단한 뿌리내림이 중요한 법이외다
이른 봄바람에도 휘청거릴
뿌리 약한 연일랑 맺지를 마오
얼기설기 엉성한 얽어짐들이
서로를 긁어내고 생채기 입히다
끝내 끊어져버릴 연이라면
애초에 너른 들에 홀로 서시오

2011.10.20 - 가을녁 사랑

외로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렇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맺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볼때면, 스스로 외로움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란 것은 반대로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나쁜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외로움은 분별력을 흐리고, 조급하게 만들고, 그럼으로 인해 쉽게 오판을 불러오게 된다.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외로움은 긍정적으로 바라볼때는 끈질기게 사람을 향하게 하는 힘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관계를 형성하려고 할 때는 항상 그 관계를 지금 원하는 이유가 '외로움' 때문인지는 반드시 한발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는 거다. 언제나,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거다.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이유로, 사실 가을이란 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에 썩 좋은 계절이 아니다. 사람들은 외로워지고, 감상적으로 변하며, 다가올 추운 날들에 대한 걱정으로 조급해지기 십상이다. 물론 우리는 적당히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만한 월동준비를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지금 시기에 구매한 대단히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난로를 내년 봄이 되면 창고에 쳐넣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너무다 당연히도 사랑은 필요할때 창고에 쳐넣어둘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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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모두가 자리를 떠난 사무실
이제는 나도 가야지 하다 창밖을 보니
어깨동무라도 할 듯 가까이에 솟은
날선 콘크리트 건물 20여층에서
여전히 잠들지 못한 불빛이 보인다

저 불빛 아래는, 또 누군가의 아비
혹은 누군가의 사내, 누군가의 아들이
온갖 삶의 무게를 짊어진채
이리도 깊은 밤을 지켜가고 있는걸까
괜스레 짠한 마음만 남긴채 사무실을 나선다

언젠가 더 늦은 밤에는
퍼뜩 홀로임이 사무치는 밤에는
봉화를 올려야겠다, 환한 형광등 불빛으로
아니, 사무실 전원 버튼을 까딱거리며
위로의 모르스 부호를 날려야겠다

헝클어진 넥타이에,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의 부장님에게 답신이 올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별빛에 가까운 옥상에 올라
양 팔 휘두르며 수신호를 보낼지도 모른다
고생하십니다, 소주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깊은 밤을 울리는 위로의 타전
한마디 말없이 스쳐지나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위로의 타전
오늘도, 도시의 밤을 지키는 이들에게.

2011.04.06 -야근-

밤을 하얗게 태우는 날들의 재시작이다. 퇴근 무렵엔 눈이 다 빡빡하다. 답답한 마음으로 퇴근을 하는데, 도심을 가득 메운 고층빌딩의 군데군데 불이 밝혀진 사무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어떤 사실중, 가장 보편적인 상황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는것은 '혼자가 아니야'라는 생각이다. 그래,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바지런히 일하며 밤을 밝히는 이들이 있구나. 참 별 것 아닌 사실에 위로를 받으며, 문득 그 모두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어졌던 밤이었다. 화이팅. 당신들이 지새운 밤들만큼이나, 당신의 삶이 충만해지길. 화이팅.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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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묻건데, 일찍이
봄을 품지 못한 봄바람보다
냉랭한 것이 또 있던가
다시 묻건데
온기 한점 없는 입맞춤보다
볼품 없는 기억이 또 있던가

2011.03.29 - 봄바람

봄이 왔다 하는데 날이 차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하다. 겨우내 지겹도록 허연 눈덩이들을 바라보았을 어느 지방에선 몇일 전까지도 눈소식이 들려오곤 했었더랬다. 봄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꽃샘추위라 해도 마찬가지다. 봄바람은 봄기운을 담고 있어야 한다. 가지 끝을 슬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겨우내 움츠렸던 꽃망울들이 바스락대며 기지개를 켜고 싶어지리만치.

세상의 모든,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들이 그렇다. 시시때때로 껍데기만 가지고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허나 그것들은 결국엔 빠르게 잊혀지거나, 가장 볼품없는 기억의 단편으로 남거나 하게 되는 것이다. 가슴 더듬으려고 통과의례처럼 쭉쭉 빨아대는 입맞춤이 무슨 기억을 남기겠는가. 기껏해야 눅눅한 습기밖에 더 남기겠는가. 입맞춤에 진심을 담아내지 못하는 주제에, 아무리 용을 써봐야 그게 얼마나 뿌리깊은 기억,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밤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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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이리 긴 이별일줄 알았다면
그대 노랫말 따라 갈 것을
그 밤을 다독이며 나즈막히 울리던
그대 부른 노래 한소절 따라 갈 것을
이제는 끊어진 노래, 늘어난 테이프
수북히 먼지 쌓인 레코드판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와도
무심코 지나친 후 아차 하는 노래
이렇게 오래도록 흘릴 눈물 알았다면
그밤의 그 노래 따라 갈 것을

2010.03.07 - 후회 -

가끔은 흘러간 옛 노래가, 득달같이 가슴으로 달려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또 그렇게 울컥대며 흘러넘치는 무수한 소리들을 잠재우기 위해, 얼마나 차디찬 술잔들이 필요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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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

이제와, 누군가 내게
무엇으로 살고 싶냐고, 아니
무엇으로 남고 싶냐고 묻는다면
오래된 농담으로 남고 싶다고

아는 놈만 알아먹는 최신 개그 프로
어거지로 쥐어짜는 유행 시트콤 아닌
늘근 친구들 술상 위, 안주거리 떨어질적
이놈아 네놈이 그랬더랬지 하며 올라와
날이 새도록 씹어대는 찰진 안주마냥
이제는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로다가

혹은, 성미 느긋한 친구들이며
잰 걸음으로 뒤를 따라 걷는 이들이
화투장 척척 후려치고, 술잔을 따르며
거 사람 참, 농담처럼 살았더랬지
눈물보단 몇마디 낄낄거림으로
웃으며 안녕 고할 수 있는

낡았으되 결코 남루하지 않은
묵었으되 결코 지리하지 않은
오래 지나, 두고 두고 떠올릴 적 마다
그리움보다 앞선 가벼운 미소로 남는
오래된 농담으로 남고 싶다고

2010.11.24 - 오래된 농담 -

부끄러운 말이지만, 소시적엔 참 사고도 많이 쳤더랬다. 그래도 그 시절의 사고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대단히 피해를 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다만 스스로를 낮게 여기고 괜한 자괴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던 시절의 일이어서 그런지 스스로 다치고 울고 깨지고 했던 사고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허나 분명히 친구들에게는 민폐도 많이 주었더랬다. 폭음을 하고 친구들에게 엉겨 붙어서 개민폐를 끼치고는, 다음날 깨었을적엔 속으로는 이미 스스로를 그렇게나 구박하고 있으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괜한 허세를 부리곤 했었다. 어쨌든 즐겁긴 했잖아? 킬킬킬 하면서 말이다.

그게 그런데 또 우스운 것이, 그렇게나 많이 쳐놨던 과거의 사고들이 이제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서면 어김없이 찰진 안주감이다. 놀림감을 오십년치는 쌓아두고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과장이 아닌게다. 이제는 사회에 다들 치여 사느라 예전처럼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가끔 모여 안부를 나누다가도 술자리가 깊어지곤 하면 어김없이 그 시절의 그 이야기들이 흘러간 슬랩스틱 코미디에 대한 얘기마냥 안주감으로 오르게 마련이다. 그럴 적이면 아 또 그얘기야 하며 적당히 민망해하기도, 아니면 여전히 뻔뻔스럽게 어쨌든 즐거웠잖아? 라고 말하며 킬킬대기도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런 저런 이야기들로 밤이 늦은 시간까지 웃고 떠들게 된다.

이제는 나이를 먹고 그나마 좀 점잖게 살고 있자니 야 네놈이 사고를 안치니까 왠지 심심하다 뭐 한건 해봐라 하는 농도 난 예전에 많이 했으니 이제 네놈들 차례다 하며 받아치는 정도다. 분명한것은, 어찌되었건간에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았고, 어설프고 모자르고 마구잡이였고 참 대책 없었지만, 그 혼돈의 시간들조차 이제는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는, 때로는 종종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시간의 마법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죽을 날이 되어 무엇을 남기게 될까 하고 생각을 하곤 하였더랬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내 생각은 같다. 난 그렇게 썩 무겁고 진지하게 세상을 살고,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한것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저 생의 모든것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누군가들이 나를 떠올릴적에, 막연한 슬픔이나 괴로움, 혹은 뭔가 묵직한 채무감이나 진지한 깨달음, 그리움에 서늘한 가슴, 그런것 보다는 그저 가벼운 미소가 먼저 떠올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말 그대로, 허, 거 사람 참, 재미있게 살았더랬지, 그놈 참 즐겁게 살았더랬지. 그런 기억으로 남겨지고 싶다. 마치 오래된 농담처럼. 수년, 수십년이 지나고 나서 문득 떠올리더라도 그저 웃음이 먼저 튀어나오는 오래된 농담처럼.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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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램


몰염치한 투정이 아니었다
떠나지 말아달라는
홀로 두지 말아달라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차마 생각도 할 수 없던
그 말을 하려던것이 아니었다

그날의 그대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마지막 바램은
웃으며, 뒷걸음질쳐주면 아니되겠냐고
그리도 사랑했던, 옅은 미소를 머금고
느릿하게 뒷걸음질치며 손을 흔들어
내게 오는지 나를 떠나는지 모를
마지막 착각이나마 남겨줄 수 없겠냐는
그리도 못난 말을 하고 싶었을뿐

2010.10.14 - 바램 -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지만 이별을 겪을때면, 또 이별을 보고 듣고 느낄때면 언제나 그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정말로 노래 가사처럼 담담히, 웃으며, 그렇게 안녕을 고할 수는 없을까 하는. 그렇게 등을 돌린 사람의 뒷모습이 너무 아파서, 트라우마라도 생긴건지 누군가의 닮은 뒷모습만 봐도 움찔거리게 되는 경험을 한다는건 쉽게 견디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시종일관 사람들에게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함을, 눈을 보고 당당히 이별을 말할 자신이 없거들랑 그 이별을 재고하라는 권유를 하곤 했지만 가끔은 그것이 반드시 정답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프지 않은 이별같은게 없다고는 하지만, 유독 후유증이 많이 남는 이별 정도는 있게 마련 아니던가. 조금 비겁해짐으로써 조금 덜 다치게 된다면, 어쩌면 그것도 종국에 가서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 될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물론 여전히, 그래도...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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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태우는 계절

어쩌면
그 계절의 끝자락에 머물던것은
낙엽 태우는 냄새가 아니었음을
다만, 뜬 눈으로 지새우던 불면의 밤들
그 까만 밤들보다 더 까맣게 타들어가던
이내 가슴에서 치밀어오른 탄내였음을

또, 생각해보면
그리하여 그대는, 까만 눈물을 흘렸을까
숯덩이가 된 가슴 가여워하며 흘렸던 눈물에
다 타버린 가슴, 검댕이나마 씻겨나가
그래 겨우 숨이라도 쉬고 사는 걸까

2010.10.12 - 낙엽 태우는 계절 -

그렇게나 온갖 슬픔으로 찌들었던 날들에는, 급하게 피워 무는 담배 한가치에도 태우는것이 담배인지 내 가슴인지 모를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슬픔이 가득했던 어느 가을의 끝자락에 맡았던 낙엽 타는 내음이 그렇게나 강렬하게 기억에 자리잡은 이유는 바로 그러한 탓일 것이다.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염치 없이 웃고 행복해하며 잘도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내가 다시 웃고 웃을 수 있게 될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려주었던가. 그러기에 나의 행복은 나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삶에서, 누구 하나에게 어떤 의미라도 남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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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랑


누군가, 내게
그것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면

짧은 망각의 축복을 누리고자
텅빈 속에, 술을 부어넣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쯤에나란 몸부림으로 삶을 허비하지도
흉몽으로 괴로웠던 아침들도 없었을 것이다
긁어내도 자꾸 자라는 암세포 덩어리마냥
매일같이 깊어지는 기억의 각인에
전력을 다해 저항하다 탈진해버리는
지리한 전쟁 또한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일찌감치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려 마음먹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빛이 바래는 기억의 알갱이 하나 하나까지
소중히 그러모아 가슴에 품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그것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면

2010.10.09 - 옛 사랑 -

누구나 잊고 싶은 괴로운 기억 하나쯤은 있다. 하지만 망각이란 신의 선물은, 말 그대로 선물같이 어느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라 손벌리고 보챈다고 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랑에 좋고 행복하기만 한 추억만을 가진 사람은 또 드물 것이다. 어쩐지 쓸쓸한 어느 가을날에, 퍼뜩 떠오른 옛 사랑의 생각에 괜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혹은 미움과 원망으로 뒤범벅이 되어 행복하지 않은게 오히려 이상한 날씨를 즐기지도 못하고 멍하니 흘려버린 하루를 보내보지 않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어찌되었건 꽤나 나이를 먹어버린 후에야 깨닫게 된것은, 어떠한 기억이건간에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 정말로 어느날 변덕쟁이 신이 선물처럼 내던진 망각의 화살을 맞고 까맣게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괴로운 기억이건 슬픈 기억이건간에, 언제나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반드시 슬픈 체념만은 아니다. 반드시 기억하고 싶은것들도 시간의 흐름에 거부하지 못하고 잊게 되는 날들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유형의 기억이건간에 그것들을 그저 기억의 한 조각으로 아끼고 돌보는 방법을 깨우쳐야 한다. 잘라내고 베어내려고, 부수고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많은 경우에 굉장히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에너지 낭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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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수 있는 동안


어느날엔가부터
이맘때면 밤을 가득 채웠어야 했을
귀뚜라미의 노래소리가
시나브로 짧아져감을 느낄적에

나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외치고 들어야 한다고
당신의 귓가에, 나의 목소리로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듣고
마음껏 행복해할 수 있는 동안에
보라, 저 마른 밤의 습기들을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몸뚱이를 서로 부대껴
북풍에 스러질 가녀린 풀잎들을 위해
한 방울 이슬 혹은 한점의 의미로 남고자하는
바지런한 몸부림을

2010.10.10 - 들을 수 있는 동안 -

봄 가을이 짧아져감을 올해만큼이나 실감한 해가 또 있었을까. 미치도록 더운 여름이 이어지다가 귀뚜라미 소리가 살짝 들리나 싶더니 어느새 뜨끈한 방바닥이 그리워지는 날씨로 변해가고 밤은 한없이 고요하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 둘 씩, 굉장히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었던 것들을 하나 둘 씩 잃어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동안 그것을 들어서 좋다고, 볼 수 있어 좋다고, 만질 수 있어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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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


홀로 울지 않을 것이다
늦은 밤 외로울땐, 맘보춤을 출 것이다
새벽 이슬 한방울을 취하려고
밤을 지새우는 어리석음을 버릴 것이다
더는, 내 것이 아닌 상처를 부여잡고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염분의 양을 늘이려
한없이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삶은 고행, 단 한번도 쉽기만 한 적이 없었음을
주문처럼 되뇌이며 떠날 것이다
시골 아낙들의 시끄러운 수다소리와
시원한 바람과 괴로운 똥내음과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며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에, 짐짝처럼 실려
토악질이 치밀어 오를 쯤 도착한곳이 바로 삶의 종착역
그리고 그 종착역에서 나를 반기는것이
살찐 길고양이의 노오란 엉덩이 뿐이라 하더라도
눈물도 없이 슬픔의 춤을 추고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웃음소리로 웃은 연후에 나는,
유쾌하게 절망하리라

2010.10.09 - 다짐 -

절망조차 유쾌하게. 흐느낌조차 흥겹게. 번뇌조차 산뜻하게. 괴로운 길을 명랑하게 걸어가기 위한 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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