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북 가는 심야 고속버스
깊은 침묵과 쌔근대는 숨소리만 품고
눈발 휘날리는 영동 고속도로를 달린다
궂은 날씨에 행여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 없다, 세시간에 더하고 빼기 삼십분
지금껏 아무리 궂은 날씨에도
좀처럼 늦어지지 않던 버스다

갑자기, 꼿꼿이 등을 새우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양반의 희끗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그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얼굴에 구불구불 남은 세월의 흔적
그 흔적들보다 더 급히 굽은 산길을
날랜 손놀림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에
문득 떠올린다, 내 기억속 그의 모습

내 아비도,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내가 나기도 전, 불빛 하나 없이 굽은 산길을
털털거리는 제빵공장 차를 몰고는
밤이 새도록 달리고 달렸다 하였다
어둠만큼이나 묵직하게 짓눌러오는 눈꺼풀을
창을 열어 들이치는 칼바람으로 깨우며

가자 가자, 삶으로 가자
내 새끼, 내 마누라 함께 살러 가자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흘러간 옛 노래 흥얼거리며
길가에 깔리는 허연 고독의 덩어리들을
달궈진 바퀴로 뭉개가며 달렸을 것이다

이제는 눈이 침침해 운전대도 못잡겠다
들을 적마다 가슴이 찌리한 말들을 하셔도
나는, 그만치 사랑하였나보다
뒷자리서 바라본 당신의 그 든든한 뒷모습을
운전대를 잡은 손등에 구불대던 힘줄들을
그리하여 겨우 지금에 와서야
그 무수했던 밤들에, 당신의 고독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는 것이다

시큰해지는 눈시울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송이는 별조각마냥 굵어져 있다
다시 앞을 보니, 불 꺼진 차 안에도
기사양반의 흰머리들만이 저 홀로 밝다
세상의 아비들은 그렇게 별빛이 되는가
나 또한 어느 날엔가 누구의 마음 위로
별빛처럼 쏟아져내리는 이름 되려나

2010. 12. 06. - 아버지 -

아버지께선 여전히, 내가 운전대를 잡는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아직도 가끔 운전 연수나 시켜달라고 얘기를 꺼낼 참이면, 꼭두새벽부터 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지셔서 보이지 않으시곤 한다. 버스 운전을 그렇게나 오래 하셨고, 운전에 그리도 능숙하신 당신께서도 차로 인해 그리 많이 고생을 하셨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은 행여라도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애초에 운전대를 잡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신 게다. 그 맘을 충분히 알기에 아직까지 굳이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싶은 마음도 없다. 언젠가 나도 가정을 가지고, 아이라도 하나 생기면 그때 쯤에나 생각해 볼까.

한번은 가족끼리 안면도에 여행을 갔었는데, 동이 틀 무렵에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툭툭 건드리시며 깨우셨다. 운전 연습 하러 가자고. 왠 바람이 부셨나 해서 따라 나섰더니 대뜸 운전대를 잡으라 하시고 옆 자리에 앉으신다. 얼떨결에 운전대를 잡고 한바퀴 돌아 오니, 그래도 면허 따고는 처음 하는 것일 텐데 날 닮아 괜찮게 하더라고 어머니 앞에서 자랑을 하시며 웃으신다. 왠지 모를 멋적음에 그저 웃고만 있었더랬다. 그리고는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무섭고 엄했던 아버지셨지만, 당신께서 운전대를 잡고 여기저기 가족들을 데리고 다닐 적이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듬직하고 능숙했었더라는걸. 괜스런 미움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지만, 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자랐고, 그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랬었다. 불빛 한점 없는 산길을 달리던 사북행 고속버스 안에서도, 운전석 뒤로 잠깐씩 보이는 운전기사양반의 희끗한 뒷머리를 보면서도,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최고의 베스트 드라이버였던, 아버지, 당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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