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여'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1.03.15 독설가에 관하여 2
  2. 2011.03.14 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4
  3. 2011.03.09 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2
  4. 2011.03.07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6
  5. 2011.02.14 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2
  6. 2010.12.27 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6
  7. 2010.11.29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3 - 4

독설가에 관하여

사람들은 '나의 편'인 독설가에게 쉽게 열광하지만 그만치 '남의 편'인 독설가를 쉽게 증오한다. 정확한 수치로 통계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어떤 독설가의 말에 묻어있는 맹독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와 반대편 이들이 그 독설로 인해 입는 상처와 분노, 증오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한다. 그래서 독설가는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도 사실 사회에서 좀처럼 자리잡기 어렵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설가가 스스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굉장히 편향된 시선과 더 반대편을 향한 더 극단적인 말을 함으로써 우군의 열광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정치판을 보라. 시정잡배만도 못한 독설을 날리는 이들이 얼마나 그들의 우군에게 확고한 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또 재미있게도 그것이 독설가가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딜레마가 된다. 사람은 자극에 금새 적응한다는 걸 잊지 말자. 독설가가 자신의 말에서 독을 줄이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우군이었던 이들에게 '심심하다'거나 '말랑말랑 해졌다' 혹은 '사람이 변했네'와 같은 시선들을 받게 될 것이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서는 더 치명적인 맹독을 품은 말들을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대단히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독설에 열광하는 것은 극히 찰나의 순간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독설로 인해 열광했던 사람들, 그 열광의 크기가 컸던 사람일수록 그 독설을 누가 했는지조차 기억 못할정도로 빠르게 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바로, 그 독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독설로 인해 상처입은, 그 독설가의 '적'들이란 얘기다. 독을 버리는 순간 그는 우군에게서 잊혀질 것이고, 적들에게만 기억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세상엔 언제라도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독설가가 존재한다. 세상이 얼마나 독한 세상인가.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어떤 집단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독설가로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당신은 언제나 남들보다 조금 더 경계하고, 조금 더 스스로의 컨셉을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사람들의 열광에 들떠 스스로의 말에 독을 바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그건 최악의 어리석은 짓이다. 항상, 항상 스스로에게 주지시켜라. 사람들은 당신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 대신에 누군가에게 험한 말을 해줄 누군가에게 열광할 뿐이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우둔하지 않다. 특히 집단 안의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무리를 이루었을때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쉽게 비열해지고, 죄책감을 쉽게 타인에게 전가한다. 당신의 독설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라. 그래야 언제고 나 홀로 벌판에서 바람 맞고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경우는 피할 수 있을 것인즉. 그리고 조금씩, 주위에서 뭐라건간에 스스로의 말에 담긴 독들을 조심스레 거둬들여봐라. 생각보다 독한 말이 아니고서라도 당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물론 쉽고 빠르진 않겠지만. 또 한번 품은 독을, 그렇게 쉽게 걷어내기도 어렵겠지만.

허나. 다 필요없고, 난 원래 생겨먹은게 이런 놈이니까 죽을때까지 독설을 퍼부어주마 한다면... 괜찮다. 죽을때까지 독하게 살아라. 어쨌든, 그것도 나름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스스로의 삶을 희생시키는 길이 될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문에 관하여  (2) 2011.10.04
이해에 관하여  (10) 2011.08.16
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4) 2011.03.14
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2) 2011.03.09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6) 2011.03.07

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감정을 느끼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강제할 권리를, 또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왜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빽빽거려봐야 원하는 사랑을 얻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고, 바퀴벌레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바퀴벌레도 우리 친구지예 하며 백날 떠들어봐야 바퀴벌레에 대한 극적인 호의를 얻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것은 자유 이상의 영역이다. 사회나 조직에서 그 구성원의 감정에 대한 어떤 강제적인 통제를 시도했던 경우, 인류의 역사에서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생각보다 끔찍한 재앙을 불러왔다. 때문에 누구도 누군가의 감정을 스스로의 어떤 목적에 의해 강제하거나, 자신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많은 경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대단히 중요한 가치로 존중받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어떤, 대단히 보편적 정서에서 벗어나는 감정의 표현들조차 자유의 영역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는 거리에서 대통령 개새끼라고 외칠 자유가 있으며(그것이 어떤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동물애호가를 앞에 두고 보신탕 예찬론을 펼 자유가 있다. 물론, 스스로의 감정이 외부로 표현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무수한 관계와 '사회'의 어떤 도덕률, 관습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감정의 표현이 그 자체만으로 어떤 법적인 제재같은 것을 받는 경우는 사실 반대의 경우에 비해 드문 편이다(물론, 여전히 이 사회는 그런 표현의 자유에 대해 특정 부분에 있어서는 꽤나 인색하다).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때,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좋은 세상 아닌가.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에겐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귀중한, 침묵의 자유가 있음을.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때때로 천마디의 말보다 더 좋은,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당신은 이웃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참사 앞에서,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건 모르겠지만 그 나라에 우상이 이번 기회에 파괴되길 바란다거나, 과거에 잘못을 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는 거라거나, 다 모르겠고 쌤통이네 따위의 이야기를 물론 할.수.도.있.다. 그 자체만으로 당신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욕을 먹을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최소한 당신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고, 당신의 말 한마디는 단순한 '개드립'이란 말 한마디로 규정지어져 어느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게 될 것이고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조롱과 개무시를 당하게 될 것이다. 다만 당신이 키보드 한번 두드릴 시간 정도의 침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피할 수 있다. 어째서 그 짧은 침묵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욕을 먹기를 자청하는가?

놀랍도록 발전한 기술들은 우리가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 표현들이 더 빠르고 널리 공유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 나라 정치인 한명의 개드립이 삽시간에 지구 반대편 국가에서 조롱거리가 되는건 더이상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더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우리는 무엇을 말할 자유도, 말하지 않을 자유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죽음앞에 애도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누가 당신을 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압도적인 슬픔에 몸부림치고 있을 어떤 '사람들' 을 위해 당신은 최소한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 쉬운, 빠른, 그리고 효과적이 애도다. 부디, 한마디 한마디에 더 신중을 기할 수 있길 바란다. 최소한, 스스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또 '사람들'과 함께 공존해나가고 싶은 의지가 분명히 있다면 말이다.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해에 관하여  (10) 2011.08.16
독설가에 관하여  (2) 2011.03.15
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2) 2011.03.09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6) 2011.03.07
두려움에 관하여  (4) 2011.02.22

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동기부여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에게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거짓말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에 대해 그 거짓말이 간파되었을 경우에 일어날 상황, 거짓말이 간파될 위험성까지를 포함해서 계산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하고 있는 세세소소한 거짓말들 - 예를 들어 약속시간에 늦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교통체증이라던가 - 이 들통나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은 많은 경우에 어렵고 불편하다. 친구와 밤새도록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중간에 흥을 깨기도 싫어 네 전화를 무시했다고 말한 후 화가 난 여자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보다 일찍 잠이 들어 진동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것이 훨씬 쉽고 편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익숙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로 인해 당신이 얻었던 이익이 작으면 작을수록, 당신은 곧 당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거짓말은 들통난다. 만약 당신이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거짓말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과 거짓이 들통났을때 당신이 입게 될 손해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지시켜라. 때로는 조금 부풀려 생각을 하는것도 좋다. 거짓말의 '성공'이 그것이 밝혀지지 않게 하는데 있다면, 성공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강력한 동기부여다. 비단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스스로에게 충분히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말해야 할 거짓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 결정된 거짓에 디테일함을 구성해 보는거다. 야근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상가집 누구의 상가집에 몇시까지 누구와 만나 가기로 했으며 상가집에서 만나게될 사람들은 누구누구가 있고 고인의 사인은 무엇인지까지. 거짓의 디테일을 구성할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디테일에 포함시키면 안된다는 것이다. 거짓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당신이 경험해본, 당신이 알고 있는, 익숙하게 술술 읊어댈 수 있는 범주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고인의 사인에 대해 교통사고라고 얘기하려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프로세스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사고에 관련된 보험, 교통사고 처리 전문 병원, 교통사고로 인해 죽은 사람의 사인... 등등의 지식들은 당신의 거짓말을 더 생동감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평소에 익숙치 않았던, 거짓말을 위해 '공부'한 것들을 거짓의 디테일을 꾸밀적에 사용한다면 정작 거짓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기억이 안나서 더듬거리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스스로의 기억력을 과신하지 말라. 만약 이 과정에서 그 디테일을 구성하기 위해서 당신이 공부하거나, 미리 알아놔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된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거짓을 찾으라. 이를테면 부모님 생신과 같은 것은 일년에 두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곤 디테일을 구성하기에 아주 편한 거짓이다. 최소한 당신은, 부모님이 뭐라시던데? 라는 질문에는 당신이 너무나 지겹도록 들어온, 랩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법한 일상의 부모님 잔소리를 좔좔 읊어댈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거짓을 말해야 할 지 정해지고, 그 거짓말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게끔 디테일한 수준까지 구성된 후라면 그 거짓말을 하기 전의 준비 단계를 거쳐야 한다. 스스로 준비해 놓은 거짓말의 완벽함에 우쭐해하며 들뜨는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다. 당신은 사기꾼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단 한번의 큼지막한 거짓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자잘한 수백가지의 거짓말들로 스스로의 행동을 꾸며낸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공이 들어간 거짓말일 수록 탄로날 확률이 적다. 오늘 저녁 상가집 거짓말을 하려고 한다면 아침엔 검정 넥타이를 매고 가는게 기본인거다. 평소에 바퀴벌레 기어가는 소리에 잠을 설쳤네 하는 사람이 유난히 그날만 진동소리를 듣지 못하고 잠들었다고 말한다면 개가 웃을 일인 거다. 전설의 거짓말장이인 카이저 소제를 보라. 당신은 절룩거리며 걸어야 한다. 오늘 친구와 술약속이 있고 내일 오전에 출근하기 힘들 것으로 보여 내일 오전의 핑계거릴 찾아야 한다면 최소한 오늘 저녁 사람들이 야근을 위해 저녁을 먹으러 갈 적에 요새 속이 아프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하는 핑계로 저녁 한끼정도 걸러주는 것도 좋은 일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루를 더 준비해서, 이틀 전쯤 요즘 집에 보일러가 이상하다, 주말에 손좀 봐야겠다 하는 떡밥을 던져놓았다면 누구도 당신이 몸살에 걸려 뻗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명심하라, 거짓말의 승패는 그 준비단계에 얼마나 그 거짓말을 위한 자잘한 복선들을 깔아두었는가에서 이미 갈리는 법이다.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한번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세 가지 이상의 거짓말에 대해 고민해라. 끊임없이 머리속으로 거짓말을 했을 경우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예상 질문에 대한 QA를 준비하라. 지속적으로 거짓말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복선을 깔고, 그 모든것들을 반드시 기억해라.

만약 준비과정까지의 그 기나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거짓말에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정말로 완벽한 거짓말을 원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정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태어날때부터, 일단 잠들면 옆에 155미리 곡사포탄이 떨어져도 잠이 깨지 않는 사람이다. 당신의 아버지 생신은 비록 두달 전이셨지만 바로 오늘이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 스스로까지 속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차선책은 거짓말에 대한 정당화, 자기 합리화다. 많은 경우 대단히 완벽해보였던 거짓말이 들통나는 이유는, 거짓말의 실행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경우에 대한 공포나 긴장감, 그리고 거짓말로 인해 짊어지게 되는 죄책감으로 인해 떨리는 목소리나 눈동자 때문이다. 스스로의 거짓말에 대해 거짓말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설득시켜라. 이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백색이다. 나는 오늘 비록 거짓말을 하고 칼퇴근을 하겠지만, 집에서 충분히 쉬고 난 이후, 내일 처리해낼 수 있는 업무량은 평소의 두배가 될것이다. 이것은 내가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아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사랑하기도 아까운 시간을 다툼으로 흘려버릴까 우려했기에 하는 거짓말이다! 강력한 자기합리화는 주저함이나 망설임같은 완벽한 거짓말의 마지막 장애물들을 말끔히 제거해줄 것이다.

성공적으로 거짓말을 하였다고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은 모니터링이다. 절대, 한순간 그 거짓말이 성공을 거뒀다고 방심하지 마라. 어떤 풋내기들은 거짓말의 성공에 도취해 자랑처럼 그 거짓에 대해 딴에 믿을만 하다고 생각되는 지인들에게 떠들어댔다가 다된 밥에 재를 뿌리고 만다. 하나의 귀라도 줄이는데 애써라. 당신의 거짓말을 듣게 된 귀가 하나라도 적을 수록, 당신의 거짓말이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지켜질 가능성은 그만치 증가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 거짓말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대해 항상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또, 상대가 그 거짓말에 완벽히 속았는지,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인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대화를 나눌적이면 그 완벽했던 거짓말에 균열을 만들어낼 만한 소재가 등장하지는 않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그런 소재가 나올적이면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잊지 마라, 설령 당신이 자신까지 속였다 하더라도, 당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당신이 죽고 나서도 변함이 없다. 때문에 사실 어떤 거짓말에 대해 '완벽한 성공'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은 느리지만 얄밉게도 언제고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건 당신의 그 거짓말이 '실패하지 않도록' 관리해나가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아마도 추가로 하게 될 거짓말을 준비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 모든것이 거짓의 기술이다. 끝도 없고, 완벽한 성공도 없지만, 최소한 실패를 면할 수는 있는 거짓의 기술. 어떤가. 글을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쌓인다고? 오, 이런. 진실은 대단히 잘나거나, 대단히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거나, 대단히 돈이 많거나, 대단히 아는게 많거나 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간때문이 아닌 거짓에 쉽게 피로해하는 당신과 같은, 가장 보통의 존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거다. 왠만하면 그냥 정직하게 살라. 진실은 짧은 순간 무척 불편하고 무겁지만, 거짓은 기나긴 피로를 끊임없이 누적해가는 것이다. 조금은 아쉽게도 말이다.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설가에 관하여  (2) 2011.03.15
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4) 2011.03.14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6) 2011.03.07
두려움에 관하여  (4) 2011.02.22
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2) 2011.02.14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키가 무척 크다. 이게 좀 도를 지나치게 큰 통에 느끼게 되는 물리적 불편함 이외에도 사실 제법 많은 고민거리가 되었더랬다. 아버지께선 굉장히 장난끼가 많으신 분이셨는데, 덕분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에 그런 농담들을 하시곤 하셨다. 공부를 못해도 키는 커다란놈이 - 운동을 못해도 키는 커다란놈이 - 와 같은. 간단히 말해 남들보다 무언가 못하거나 뒤쳐지는 것에 대해 원치 않게 자라버린 키로 인해 스트레스를 두배로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그렇게나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이유도 사실 그로 인한 영향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면 키와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 없는, 농구와 같은 운동이 그렇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키는 큰데 별거 없다 - 는 시선을 받는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 농구공은 손에 잡지도 않고 자랐더랬다. 물론 고2이후, 한참 슬램덩크며 뭣이며 열풍이 불때 재수 좋게 못해도 잘한다 잘한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제법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여하튼 여전히 회사에서 운동같은거라도 한번 할 참이면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가 될 수가 없다. 결국, 단순히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꽤나 커다란 트라우마를 껴안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키가 크다는게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랄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먹고 살기 편한 종족(?)은 무얼까 라고 묻는다면 제법 많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할거라 믿는다. '예쁜 여자'라고.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남들보다 우월한 외모라는건 생각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이다. 남자도 그러할진데 여성은 더더욱 그렇다. 그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근데 그게 또,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더라. 실제로 나 역시 언젠가까지는 야 내세엔 예쁜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 수천명은 울리며, 군림하며 살아야지 낄낄낄 이란 시답잖은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게 어느 순간에 어우 야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한참 연애상담을 하고 있었던 시절에, 몇몇의 '예쁜 여자'들로부터 그들의 색다른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너무 들이대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한명에게 들었던 멘트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지들은 한번 찍고 두번 찍고 찍어봐야 열번 찍지만 그게 열명이 되면 백번이 되고 백명이 되면 천번이 되는거 아니냐며. 이게 듣고 보니 정말 뭐라 말할 길이 없는거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 완전 배부른소리네 난 열번이라도 찍혀봤음 소원이 없겠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되짚어 보라. 당신이 정말 싫어하는 이성 열명이 끈덕지게 당신에게 달라붙으며 찍고 찍고 또 찍는 상황을. 물론 스스로의 외모를 무기삼아 남들 잘 이용해먹고 배부르게 잘 사는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게 무슨 곤욕이랴. 그건 뭐 잘잘못을 따질 수가 없는 것 아니던가. 단지 예쁘게 태어났다는 이유. 정말 단순한, 그 하나의 이유.

이것이 여전히 배부른 소리다 - 라고 들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조금이라도, 그것도 나름 고충일수는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사람의 모든것에는 유/무형의 세금이 따라붙는다. 남들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뭔가 태어날때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인한 세금이 반드시 따라붙는다는 얘기다.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우게 되는. 그것은 예외없는 삶의 진리다. 그리고 그것을 상기하는 것은, 조금, 아주 조금 타인을 '덜' 부러워할 수 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의 삶에서 빛나는 부분은 쉽게 발견하고, 쉽게 부러워하고, 그로 인해 쉽게 열등감에 사로잡히지만 정작 그 개개인의 고유한 삶들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감과 고달픔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불만과 스스로 가진것들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러움을 거세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부러움도 때로는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법이다. 허나, 적어도,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의 근사함에만 시선을 뺏겨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를 외면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 덜 타인을 부러워하며 사는것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4) 2011.03.14
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2) 2011.03.09
두려움에 관하여  (4) 2011.02.22
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2) 2011.02.14
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6) 2010.12.27

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외부로부터의 어떤 공격 앞에서는 쉽게 비이성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이 모여 만든 집단의 특성이다. 때로 그것은 개개인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집단이라는 것은 분노의 가열과 비애감의 부풀림, 어느 방향으로도 홀로 있는 개인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집단 내 어떤 특정인의 분노에 쉽게 동참하고, 어떤 개인이 품고 있는 비애감에 대해 공감함으로써 그것을 더 극적인 비애감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집단 내 개인을 향한 어떤 것이 아닌 집단을 향한 공격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런 공동체 의식, 집단에 대한 소속감, 그런것들이 긍정적으로 발현이 될 때에야 그 자체가 집단이 가지는 장점이고 강점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집단에 소속된 개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훨씬 더 클 수 밖에는 없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집단의 비이성은 집단의 폐쇄성이 강화될수록 자주 드러나게 되는 경향이 있고, 그렇게 집단의 폐쇄성에 의해 돌출되기 시작한 집단의 비이성으로 인해 어떤 견고해보였던 집단이 와해되거나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집단의 폐쇄성에 대한 진단은 복잡한 진단 절차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도 간단히 들여다볼 수 있는데, 가장 좋은 것은 집단 내부의 소수 의견이 그 집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특정인의 주도나 특정 사람들의 이익 수호라는 어떤 뚜렷한 목적에 의해서 처음부터 제도와 체계를 갖추고 형성된 집단이 아니라면, 즉 자연스럽게 형성된 어떤 집단이라면(특히나 친목단체와 같은) 대부분 초기 단계에서는 어떤 소수의 의견도 나름의 존중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집단 내부에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아싸(아웃사이더)의 선이 그어지는 순간부터 소수의 의견은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갭이 커져감에 따라 소수 의견에 대한 배척과 더 나아가 공격성을 띄는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쯔음이 되면 그러한 집단의 비이성적인 행동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정없이 비어져나오게 되게 마련이다. 이는 결국 집단 내 어떤 다양한 의견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느냐가 그 집단의 수명을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 아닐까, 외부로부터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그것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 그것은 평소 그 집단이 어떻게 다른 의견들을 다뤄 왔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집단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가해질때, 그리고 그 공격에 반응하는 주류의 정서가 '분노'일때 집단 내부의 개인들은 쉽게 그 분노에 이끌려간다. 혹은 외면하거나 방관한다. 집단 내에서 특정한 위치나 권력을 차지하는 이들일 수록 어떤 다른 의견을 내거나 주류의 정서와는 다른 반응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그런 맹목적 동조나 외면, 방관들은 그 어느 것도 집단의 진화나 집단 내 개개인의 성장에 마이너스가 된다. 어떤 집단이건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라면, 그 집단에 가지고 있는 애정만큼이나 뚜렷한 자신의 의사를 내비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스스로의 집단이 외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 주류가 아닌 목소리들을 어떻게 취급하는 지에 대해 개개인이 항시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의 제안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지금 당장 눈앞에 떨어진 어떤 이슈와 사건에 대해서 즉흥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거시적으로 집단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현명한 개인이 집단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현명한 개인들이 모여 여럿이 될 경우 그것이 집단의 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주 부질없는 기대만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였다고 생각했음에도 그 집단의 폐쇄성의 가속화를 막을 수 없다면, 그리고 그런 집단의 비이성적인 모습이 그대를 향한 공격성까지 띄게 된다면.

아쉽지만 가급적이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그 집단을 이탈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한번 소속되었던 집단을 벗어나는 데 주저하게 되는 것은 그 집단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그 집단 내부에 남아있는 스스로의 네트워크, 인맥, 기타 여러가지의 사유가 있지만, 또 그렇게 집단에서 이탈함으로써 그 자체로 인해 부당한 괴롭힘이나 공격을 당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뜨뜨미지근하게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집단에 소속되어 눈과 귀가 가려진채 스스로의 사고의 폭을 한없이 좁혀가게 되는 것에 비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때 해당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이 백배는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집단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점에 대해 지나친 결벽성을 띄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어찌되었건간에 사람은 무리를 지어 살게 되고,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간에 어떤 집단에건 소속되기 마련이고, 사람의 모임인 어떤 집단이란 것은 어떤 측면에선 비슷한 문제점들을 끌어안고도 굴러가고 있게 마련이니까. 선택은 그대의 몫이다. 집단의 그 어떤 비이성을 개선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외면하거나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그대의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에 대한 판단 말이다. 물론 나는 반대한다는 것 뿐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스로 더 나은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6) 2011.03.07
두려움에 관하여  (4) 2011.02.22
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6) 2010.12.27
기억에 대한 불가항력에 관하여  (4) 2010.12.22
좋은 나라에 관하여  (4) 2010.12.20

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보니, 연말이다 보니, 이래저래 사람들끼리 누구에게 선물 뭐 해주려 하냐 식의 정보교환이 빈번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몇몇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선물로 뭐 사주려고 하냐고 물어보니 돈이 제일이라고 현금 주고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상품권같은거나 사주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냥 이야기를 들었을적엔 뭐 그런가 하고 넘어갔는데, 크리스마스 TV 프로그램 중 하나를 보고 있자니 그런 내용이 나오더라. 크리스마스에 애인한테 받고 싶은 선물은? 중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상품권이었다는. 아, 그런것이 슬슬 대세를 이뤄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저 입맛을 쩝쩝 다셔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다른 사람들끼리 어떤 선물을 주고 받느냐에 사실 별로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고, 상품권 선물이 나쁘다 좋다 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것이 최고의 선물 아니던가. 게다가 진심을 담은,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면 그것이 돈이 되었건 상품권이 되었건 뭐 문제 될 이유도 없을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나쁘다 옳다 그런 가치판단을 떠나서, 그저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적어도 애인에게 주는 선물로 상품권같은 것은 나이를 얼마를 더 먹건간에 피하고 싶은 일이랄까.

이를테면 선물의 로망이라는 것은 그렇다. 그냥 주고 받는, 그 교환의 순간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는 거다.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며, 이걸 해줘야 좋아할까 저걸 사주면 더 좋아할까, 같은 물건을 놓고서 이 디자인이 더 좋을까 저 색깔이 더 어울릴까, 가만,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녔으니 이런 것은 아닌것같고 저것이 더 나을것 같고,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고민의 과정들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골라내는 것이 선물이라는 거다. 기념일 전날이나 당일날 황급하게 달려가서 준비하는 것보다 몇날 몇일 전부터 준비해놓고는 D-day 를 기다리며 또 잔뜩 마음 졸여하는 것이다. 이미 준비했는데 하루 지나 다른걸 보니 저게 더 나은게 아닐까, 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저쩌지 하며 괜히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는 맛이 있는 거다. D-day 가 되면 행여 건네기 전에 먼저 눈치라도 챌까봐 두근 반 새근 반 하며 가방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선물을 꺼내어 상대에게 건네고, 취업관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구직자의 심정처럼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또 선물의 로망이 아니던가.

그런 길고도 살떨리는, 하지만 설레고 두근거리는 그 모든 과정들을 패스한채 '자 여기 상품권, 너 사고 싶은거 사라 - ' 하고 건네는 것으로 압축해버린다는 것은, 물론 딱히 원하지 않는 선물을 받았을때의 실망감에 대한 리스크도 없고, 괜히 마음 졸이고 걱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어쩌면 굉장히 효율적이고 굉장히 현명한, 차가운 도시의 남녀들에 어울리는 시크함일지도 모르겠으나 뭐랄까, 역시 로망 지상주의자인 나로써는 딱히 내키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그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그렇게 설레며 보냈었더랬나. 그렇게 애태우던 밤들은 또 얼마나 반짝이는, 이제 와 떠올려보면 얼마나 얼굴을 발갛게 붉히게 만드는 기억들로 남아있는가. 어쩌면 나날이 무덤덤해지는 세상 속에서, 그 설레임들은 얼마나 삶을 상큼하게 만들어주던 그런 것이었나.

일전에 쓴 글에서, 스스로의 삶에서 '편한' 이란 가치를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는 순간에 후순위로 미뤄놓는다면 생각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를 했었더랬다. 어쩌면 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족도에 대한 불안감도 없고, 위험요소도 없고, 고민도 없는, 편한 선물. 그것이 바로 상품권이란 형태가 아닐까. 다시 강조하지만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편한 길을 위해서, 우리가 여전히 느낄 수 있는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아아, 참으로 멋대가리 없어지는 물질 만능의 세상이여.

2010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어느 고루한 이가 묻는다. 선물의 로망을 기억하십니까 라고. 그 설레던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십니까 라고.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려움에 관하여  (4) 2011.02.22
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2) 2011.02.14
기억에 대한 불가항력에 관하여  (4) 2010.12.22
좋은 나라에 관하여  (4) 2010.12.20
눈에 관하여  (2) 2010.12.17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3 -

많이 노는 사람이기보다 잘 노는 사람이고 싶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허락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노는 방식이야 그때그때 다르겠지만, 어느 순간에 내가 어떻게 노는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인줄은 알고 놀고 싶다는 얘기다. 스스로 마땅히 누려야만 하는 휴식과 여유를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 마냥 희생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스스로에게 여유와 휴식을 제공하려면 마땅히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들 속에서 그만치 더 공을 들여 대하고 힘써 행함으로 어느 시점에 내가 이래저래하여 좀 숨좀 고르겠소 한다면 누구라도 그대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노라고 끄덕일 수 있을만은 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과 돈의 무게를 잘 달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깟 돈 몇푼 더 벌자고 스스로의 삶을 지나치게 피폐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쓰잘데 없는 여유를 부리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놀지는 못해 놀아도 돈 것 같지 않은 마음에 마냥 게으름만 부리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취미가 나이 들어도 즐길 수 있을 만한 것인지는 한번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이 들어 여유는 생기고 하는 일은 적어지는데 즐길 것마저 줄어든다면 그게 나이를 그냥 고대로 먹어가는 지름길이다. 다행히 나야 쓸데없이 이것저것 끄적대기를 좋아하니 밥벌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죽을때까지 이것저것 끄적여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나이 들어 골방에 틀어박혀 글만 끄적일 것도 아니니 좋은 취미를 두어개 늘여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운동과 같은 것은 언제 가지더라도 좋은 취미니 하나쯤은 꾸준히 하도록 습관을 들여놓는 것이 좋을것이고 악기를 다루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취미를 고를때 항상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상황이나 환경의 제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버려져야 할 취미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에지간한 취미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지만 꼭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야 만족을 느낄 수 있고 하는 취미라면 아마도 그 취미로 인한 즐거움보다 지날수록 버겁고 괴로움이 커지지 않을까 두렵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의 능력이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일이겠지만.

좋은것을 보고 즐기는 일에 쉽게 질리고 무뎌진다면 스스로 그것을 과연 충분히 즐기고 그 참맛을 보았는가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워낙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고 오감을 어지럽히는 오만가지 새로운 것들이 날마다 튀어나오는 세상인지라 누구라도 쉽게 무뎌지고 자극에 둔감해짐은 당연한 일일 것이나 스스로를 지나친 자극에 노출시키고,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마모됨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오랫동안 즐거운 일을 찾고 누리는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해서인지 아직껏 눈만 내려도 바다만 보아도 좋아라 즐거워라 하는데 이런 것들은 늘그막에까지 쭈욱 끌고갈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 어릴 적에야 만날 새롭고 좋은 것, 짜릿하고 황홀한것들을 찾기 위해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 하더라도 나이 들어까지 그리 살아서야 사오십만 넘겨도 세상에 재미난것이 하나 없을까 두려운 일이다. 정말로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를 즐김에도 끈기를 가지고 깊이 있게 즐겨보는 자세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어떤 것들이 가지고 있는 참맛은, 진국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훑어낸다고 해서 맛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니 스스로가 살아가며 보게되는, 참 나이를 헛먹었다 싶은 이들을 보며 저리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하며 살 일이다. 어떤 사람이라는 하나의 우주라는게, 참으로 스스로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좁쌀만치 작아지기도 헤아릴 수 없이 넓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지금은 저들을 욕하지만 내가 나이 먹어서 그들처럼 행동하게 되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주어진 상황, 환경, 경험으로 인해 사람은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경직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뻔한 이중잣대를 태연히 들이밀고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러니 항상 누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건간에 일단은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들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린 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마냥 나랑은 거리가 먼 것이로다 철없는 것들이로다 하며 깎아내리지 않고, 나보다 나이 먹은 이들의 이야기에 뻔한 잔소리다 고리타분한 소리다 하며 귀를 막아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살아가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항상 더 주의를 기울이되,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건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내 몸이 아프고 괴로운데 타인에게 마냥 그 사람의 온갖 장점들만을 다 내비치며 사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이란것은 그런것이다. 스스로가 좋고 편하고 멀쩡해야 남들에게도 좋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지 내 스스로가 괴롭고 아픈데 남들에게는 좋고 편하게만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어거지를 부려볼 수는 있더라도 그것을 꾸준히 지속해나갈 수는 없는것이다. 무슨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보양식을 찾아 헤매고 그러라는 말이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집착이고 꼴불견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적절한 운동, 그리고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낼적에 빨리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요, 건강에 해로운 것을 멀리하는 게 두번째이다. 스스로 지금까지는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 이 부분이니, 앞으로는 당연히 더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항상 틀린말은 아닌것이다. 돈은 없었다가도 생기고 있었다가도 사라지고 하는 것이지만 건강은 한번 잃어버리면 도로 찾기는 열배는 힘이 든 것이다. 강철이라도 씹어먹을 나이에 골골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이 보게 되는데, 스스로의 삶을 모조리 즐기고 누리려면 지금부터 건강관리부터 하라고 권해주고 싶어지는게 당연한 노릇이다.

사는 것도 여행이고 죽는 것도 여행이니,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쓸데없는 집착들로 괴로워하다 죽는다면 그만치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나 둘씩 버려나가야 하는 것들중 하나가 그런 집착들이다. 돌아보면 지금껏 사람 욕심으로 적잖게 마음을 괴롭게하였고, 지금도 가끔 그런 욕심에 끙끙대고는 하지만 적어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는 그런 욕심들을, 집착들을 모조리 놓아보내고 싶다. 그저 헛헛이 웃으며,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참으로 고마웠다고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저 내가 손발같이 아꼈던 내 사람에게, 또 몇몇 지인들에게 그래도 그대 있어 다행이었다는 이야기 한마디 듣는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이다. 재산을 남기기보다는 좋은 이야기와 좋은 생각들을 남길 수 있다면 그만큼 복된 일이 없을 것이고, 뒤에 남겨진 이들이 나를 떠올릴적에 괜한 가슴 저림보다 오래된 농담을 들은것처럼 가만히 웃어볼 수 있는 정도의 삶이었다면 참으로 좋겠다.

이것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도 멀고도 먼, 그러나 꼭 도달하고 싶은 이상. 가장 인간적인 삶, 너무나 인간적인 삶에 대한.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나라에 관하여  (4) 2010.12.20
눈에 관하여  (2) 2010.12.17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2 -  (0) 2010.11.25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1 -  (4) 2010.11.24
로망에 관하여  (9) 2010.11.23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