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보니, 연말이다 보니, 이래저래 사람들끼리 누구에게 선물 뭐 해주려 하냐 식의 정보교환이 빈번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몇몇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선물로 뭐 사주려고 하냐고 물어보니 돈이 제일이라고 현금 주고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상품권같은거나 사주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냥 이야기를 들었을적엔 뭐 그런가 하고 넘어갔는데, 크리스마스 TV 프로그램 중 하나를 보고 있자니 그런 내용이 나오더라. 크리스마스에 애인한테 받고 싶은 선물은? 중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상품권이었다는. 아, 그런것이 슬슬 대세를 이뤄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저 입맛을 쩝쩝 다셔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다른 사람들끼리 어떤 선물을 주고 받느냐에 사실 별로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고, 상품권 선물이 나쁘다 좋다 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것이 최고의 선물 아니던가. 게다가 진심을 담은,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면 그것이 돈이 되었건 상품권이 되었건 뭐 문제 될 이유도 없을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나쁘다 옳다 그런 가치판단을 떠나서, 그저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적어도 애인에게 주는 선물로 상품권같은 것은 나이를 얼마를 더 먹건간에 피하고 싶은 일이랄까.

이를테면 선물의 로망이라는 것은 그렇다. 그냥 주고 받는, 그 교환의 순간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는 거다.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며, 이걸 해줘야 좋아할까 저걸 사주면 더 좋아할까, 같은 물건을 놓고서 이 디자인이 더 좋을까 저 색깔이 더 어울릴까, 가만,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녔으니 이런 것은 아닌것같고 저것이 더 나을것 같고,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고민의 과정들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골라내는 것이 선물이라는 거다. 기념일 전날이나 당일날 황급하게 달려가서 준비하는 것보다 몇날 몇일 전부터 준비해놓고는 D-day 를 기다리며 또 잔뜩 마음 졸여하는 것이다. 이미 준비했는데 하루 지나 다른걸 보니 저게 더 나은게 아닐까, 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저쩌지 하며 괜히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는 맛이 있는 거다. D-day 가 되면 행여 건네기 전에 먼저 눈치라도 챌까봐 두근 반 새근 반 하며 가방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선물을 꺼내어 상대에게 건네고, 취업관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구직자의 심정처럼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또 선물의 로망이 아니던가.

그런 길고도 살떨리는, 하지만 설레고 두근거리는 그 모든 과정들을 패스한채 '자 여기 상품권, 너 사고 싶은거 사라 - ' 하고 건네는 것으로 압축해버린다는 것은, 물론 딱히 원하지 않는 선물을 받았을때의 실망감에 대한 리스크도 없고, 괜히 마음 졸이고 걱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어쩌면 굉장히 효율적이고 굉장히 현명한, 차가운 도시의 남녀들에 어울리는 시크함일지도 모르겠으나 뭐랄까, 역시 로망 지상주의자인 나로써는 딱히 내키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그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그렇게 설레며 보냈었더랬나. 그렇게 애태우던 밤들은 또 얼마나 반짝이는, 이제 와 떠올려보면 얼마나 얼굴을 발갛게 붉히게 만드는 기억들로 남아있는가. 어쩌면 나날이 무덤덤해지는 세상 속에서, 그 설레임들은 얼마나 삶을 상큼하게 만들어주던 그런 것이었나.

일전에 쓴 글에서, 스스로의 삶에서 '편한' 이란 가치를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는 순간에 후순위로 미뤄놓는다면 생각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를 했었더랬다. 어쩌면 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족도에 대한 불안감도 없고, 위험요소도 없고, 고민도 없는, 편한 선물. 그것이 바로 상품권이란 형태가 아닐까. 다시 강조하지만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편한 길을 위해서, 우리가 여전히 느낄 수 있는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아아, 참으로 멋대가리 없어지는 물질 만능의 세상이여.

2010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어느 고루한 이가 묻는다. 선물의 로망을 기억하십니까 라고. 그 설레던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십니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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