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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2.11 가족의 탄생 - 1 - 2

가족의 탄생 - 2 -

첫 글을 쓰고 꽤 지나버린지라 호흡이 뚝 끊어졌지만, 어찌되었거나 마무리는 해야 하는 글 같아서 오랫만에 조금 짬이 생긴 휴일 오후,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고등학교 시절을 마무리하며 지금 생각하면 꽤 충격이었던 그 사건을 겪고서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이전 글에서 말했듯 그때는 정말 그게 내게 있어 어떤 의미였는지 뭐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더랬다. 원인이야 뭐 다름이 아닌 대학에 입학하고나서부터 접하기 시작한 모든 새로운 것들 덕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매일매일이 경이로웠던 시절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생활 패턴을 가져가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집단에 몸을 담고... 하다못해 봄볕 따스한 노천극장에서 아무데나 널브러져 자는것만으로도 늘 신기하고, 즐거웠던 시절. 따져보면 그 좋은 시절에 우중충한 상처를 부여잡고 찌질대고 있었더라면 지금에 와서 얼마나 더 아쉬워 하고 있었겠는가 싶으리만치 말이다. 


그러니 뭐 상처야 그렇다치고 사람들과 만나가는 패턴은 그 시절에도 똑같을 수 밖에 없었다. OT를 가기 전에 갔던 자리에서부터 노래패 공연 연습을 보고 뻑이 가서 대뜸 아무 생각없이 하겠다고 지르고, 덕분에 무수한 사람들의 와중으로 또 내발로 뛰어들어가게 되었더랬다. 노래패를 떠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수한 동기들중에서 꽤 골때린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면서 지금까지 내 가장 친한 벗이라 부르는 녀석들과 딱 3월 한달만에 연일 술을 마시고 밤을 지새우며 친해졌었더랬다(물론 먼저, 그리고 나중 이런 순서차이는 있지만). 새롭게 배우게된 역사와 철학,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해 이런저런 소소한, 말 그대로 청춘이었기에 벌어짐직한 충돌은 있었지만 그건 또 언제 그랬냐는듯 잊혀질만한 것들이었고, 그런 과정속에서 또 나름의 집단, 무리를 이뤄갔다. 


그리고 또 에...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는 가장 오래 연인이란 이름으로 함께했던 사람과 1학년 말미쯤부터 연애를 시작하였더랬고... 어찌되었거나 종합적으로 군대 시절 이전,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군대시절까지 포함해서는 뭔가 사람, 무리, 공동체, 그런 것들에 대해 아쉬움도 커다란 고민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는 거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시절에도 무언가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한 적은 당연히 있었으나 이제와서는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런 미미한 것들이었던. 어쩌면 굉장히 평화로웠던 순간순간들. 물론, 당연히, 이것도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범위를 넓혀 군시절까지라고 했는데 그게 정말 정확했다. 그래도 남자들 중에서는 정말 군대 얘길 어디가서 많이 안하는편에 속하는데, 그도 그럴것이 내 군생활은 정말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볼때 꽤 운이 좋았고, 편했더랬다. 작은 부대에서도 작은 분대에 속해서 꽤나 명랑하고 즐거운 위/아래 사람들과 명랑하고 평화로운 군생활을 보냈던거다. (물론 다시 가라고 하면 안간다) 전역하고 나서 누군가가 군생활이 어땠냐고 물었을때 딱 첫마디가 "재미있었지 뭘" 이었을 정도로. 당연히 군대에서 볼 수 있는 희안한, 성격 괴팍한, 허 참 소리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던것은 아니지만 딱히 그 사람들에게 굉장히 괴롭힘을 당해서 사람에 대한 증오를 품거나 하는 일이 있을리 만무한 그런 군대생활 - 말 그대로 쏘쏘 - 한 정도. 그정도였다고 하면 딱 그정도인 것이랄까. 


문제는 전역 후, 졸업을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 전역 후 3학년을 나름의 사회적응도, 딴에는 열심히 공부도 하면서 보내고 딱 4학년이 되자마자 일어난 일들이, 그야말로 나쁜 일들은 패거리로 한꺼번에 온다는걸 실감하게 해주겠다는 듯이 일어나는 매일같은 사건사고들이 그 시점부터의 엄청난 고민들과 그만치의 생각의 성장을 이뤄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보니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감사라도 해야하는건가 - 라고는 하지만, 당시를 떠올려보면 여전히 슬면 쓴웃음이 머금어질 정도로 하루하루 막막하고 우울했던 시절의 기억들이다. 


*


뭐 집안문제를 시시콜콜 떠들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심플하게 정리하자면, 4학년 무렵에 내게 있어 꽤나 존경의 대상이었던 가족 구성원중 한 분의 실수로 인해, 가세가 꽤 극적으로 기울었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재산의 규모를 보며 '야, 그래도 우리집 꽤 양호하게 살던 집이었구나' 라고 느낄만치 한순간에 훅 말이다. 물론 그리 되었으니 가족이라고 어디 멀쩡하겠는가. 당시에는 정말 그게 절대로 치유될 것이라 기대조차 할 수 없을만치의 거대한 상처, 그리고 균열이 남겨졌더랬다. 때마침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가족의 기둥에 가까웠던 어머니께서는 그 긴 세월의 무리가 마침내 탈을 내서 일을 놓으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건가... 하고 스스로도 넋이 반쯤은 나갈 지경이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넋을 놓고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워낙 또 계획이 없으면 뭘 하지 못하는 인간인지라 결혼이며 뭣이며 차곡차곡 세워놓고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겠다 싶었던 계획들은 바로 그날로 쓰레기통에 쳐넣고 새로운 계획을 짜야만 했었더랬다. 


그리고 어찌저찌 급조한 계획들로 꾸역꾸역 사회생활의 시작 무렵에 겪게 되었던 별의별 희안한 일들과, 눈만 뜨면 훤히 보이는 가족의 균열로 인해 하루하루를 속에 뜨거운 불덩이라도 품고 사는 듯한 기분으로 몇날 몇일을 살아내다 한번씩 홀로 뻥뻥 터져 망가지곤 했던 시절에, 어찌되었거나 또 한번의 커다란 상처가 다가왔더랬다. 역시 지금에 와서야, 그 상황에서 노부모의 마음이 어땠으랴, 그저 지금껏 잘 견뎌내시고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꽤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요것도 요약하면, 어찌되었거나 그당시까지 살아왔던 세월의 1/3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사람과 나름의 의리를 지키고 싶었고,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도 어찌 저찌 꾸역꾸역 계획을 짜내어 조심스레 부모님께 말씀드렸다가 굉장히 당황스러운 반응을 얻었더랬다. 집에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앞으로 부모님을 뫼시지 못하겠다 한것도 아니었다. 헌데 상상이나 했으랴. 27~8년을 살아가며 단 한번도 집안의 기대주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아들인 네가 집안을 일으켜야지 장가갈 궁리만 하는게냐 - 라는. 물론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상황도 상황이었고 당시 그 사람이 마뜩치 않으셨을 이유도 있었더랬다. 하지만 이게 내게 있어서는 참으로 억울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부모에게 남겨진 그 상처들을 뻔히 보고 있는 와중에 거기서 나까지 날뛸만큼 개념이 부족했던것도 아니었더랬고. 


그래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마치 방아쇠와 같은 작용을 하였더랬고, 그리고 그 어려웠던 시간들에 축적된 문제들이 더해져 나는 이별을 선택하였더랬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이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족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순간이었다. 더이상 잃을 것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분노할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누구와 함께 무엇을 나눌 수도 없었다. 의무는 다하되, 그정도로 해두자. 이별 후 차가운 겨울 바다에서 파도에 흠뻑 젖어가면서도 멍하니 바닷가에 주저앉아서 중얼거린 말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지만, 그건 꽤 비참한 패주였다. 도망쳤더랬다. 스스로의 상처도 추스르기 힘들어, 가족의 상처와 균열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없었더랬다. 모든것이 혼란스러웠더랬다. 가족은 엉망이 되었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1~2년간 삶이 워낙 엉망진창이었던지라 어딜 봐도 그 무수했던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다시금 과거에 이뤄놓은 어떤 무리들에 다가선다는것 자체가 염증이 느껴졌더랬다. 사랑에는 실패했고(그 시절의 생각으로는), 뭔가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뿌리에서부터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더랬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아니 어쩌면 그런 상황이었기에 더 간절해졌던 것은


갈증. 사람에 대한 갈증. '새로운' 사람과 무리에 대한 갈증. 피가 섞이지 않아도, 무언가 기다긴 세월을 함께 축적해온게 아니었더래도 마치 당연히 그 자리가 내 자리였던 것처럼 스스로 안주할 수 있는 무리, 애정, 사람에 대한 끝없는 갈증. 생각해보면 그게 오히려 더, 모든것을 악화시켰더랬다. 물론 그 갈증으로 인해 얻었던 무수한 것들 역시,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긴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 갈증은 꽤나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정말로 말이다. 


*


조금 숨을 고르고 이어보자면. 


뭐 썩 대단한 일처럼 써놓았지만 사실 저런거, 별로 특별한 거 아니다. 뭐 집 한번 안망해 본 사람 있나? 너무나 당연스러운 연애를 하다가 헤어져보지 않은 사람 어디 있나? 저런건 그냥 보통 사람들이면 그저 보통으로 겪는 일이다. 이걸 깨닫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다니, 스스로의 아둔함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저 보통의 그런 일들에 대단히 쇼크를 먹고 난 이후의 몇해는 쉽사리 글로 옮길 수 없다. 그 시절의 어떤 기억들은 놀라우리만치 아직도 쓰라리고 어떤 기억들은 얼굴이 벌개질정도로 부끄럽다. 어떤 기억들은 떠올리는 순간 한쪽 입꼬리가 치켜올라가며 쓴웃음이 픽 하고 새어나오고, 어떤 기억들은 더듬어볼 수록 행복하고, 어떤 기억들은 지금도 정말로 즐겁게 웃고 떠들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가 존재한다. 그 시절에 깨달은것들이 평화로웠던 20대 초중반에 깨달은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거대한 크기이기에, 그 잔인할정도로 쏟아냈던 감정의 홍수가 그만치 컸기에 문득 문득 가슴을 입을 비집고 올라와서 내 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면 한번쯤은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었겠지만, 여전히 그것을 어딘가에 글로 남겨두고픈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에지간한 사람들은 알지 않는가. 어떤 것들은, 스스로의 기억에만 묻어두는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걸. 


그래서 그 시절의 경험들은 슬몃 접어두고, 그 시절에 내가 집중했던 생각들에 대해서만 짧고 굵게 남겨본다. 어찌되었거나 마무리는 해야하니(웃음). 그 시절에 내 모든 사고의, 행동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안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간에 주고받을 수 있는 이해와, 그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가장 안정적인 네트워크' 실제로 지금 생각해보면 또 막 굉장히 지랄맞게 바쁜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떻게 그렇게나 한거지? 란 의문이 생길정도로 낯선 이들을 많이 만났던 시절이었다. 빠르게 색다른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가, 이게 아닌데 싶으면 굉장히 칼같이 네트워크고 나발랭이고 끊고 나왔던 시절이었다. 쉴 새 없이 사람을 찾았고, 애정을 갈구했고, '이해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관계를 이었다가 조각조각내고, 누군가의 가슴을 찢거나 스스로 찢기거나 하는 극단 속을 오갔더랬다. 


그리고 그렇게 몇해를 보냈을까, 20대 말부터 30대 초반을 그렇게 뭐 노망도 아니고 질풍노도도 아닌 괴상한 폭풍속에서 보내다가 어 이제 좀 잔잔해졌나... 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정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지극히 안정적인 애정의 공급이 있었고, 정말로 적절한 거리에서 적절한 포지션에 자리잡은 관계들이 있었고, 치유될 것 같지 않았던 가족의 상흔은 어느정도 아물어가고 있었으며, 나를 괴롭히던 관계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느새 정리되어 버렸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들 중 어떤 하루에 생각에 골몰했다. 사람과, 관계와,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해서. 대충 다음과 같은 생각의 흐름이었다. 사람은 많이 모여 살면 안돼. 그 다양한 욕망의 충돌을 어떻게 감당하냐. 혼자서 섬처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외로움은 앞으로 걸어가려는 발목을 붙잡지. 안정적인 애정의 공급, 그리고 적절한 간격, 어느정도 꾸준한 시간을 두고 축적된 어떤 공통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이해, 어떤 단위로써 어느 한 방향을 보고 Go~를 외칠때 발맞추어 걸어갈 수 있는, 나름의 호흡, 서로의 삶을 존중하되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서로 채워줄 수 있는 가장 작은 규모의 이상적인 공동체라는건...


뭐야. 가족이었나. 


정말로, 순간 배를 잡고 움켜지고 웃어버리고 싶은 어떤 날의 기억이다. 그렇게나 어린 시절부터 내게 있어서는 무거웠던 '가족'이라는 것이, 한때는 그렇게나 도망치고 싶었고, 벗어나고도 싶었던 그 가족이라는 것이, 무려 30하고도 몇해를 더 살고 나서 그간의 그 모든 경험들과 생각들을 정리해 나갈때 마지막으로 마치 해답과 같이 떠오른 것이라니. 물론, 단순히 모든 가족이 그런 이상적 공동체라는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여전히 지옥과 같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것. 그래도 혼자서가 아닌 누군가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할때, 어떻게 구성하느냐, 어떻게 만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행복과 가까운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것.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큰 공동체라는것.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말이다. 이 얘길 하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너도 언젠가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꺼야 -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그건 또 재미가 없겠지. 각자의 정답을 찾아가길. 각자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이루길,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길.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러해서. 


*


4월 7일이면, 나는 내 손으로, 새로운 '가족'이란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 안에 얼마나 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손으로 한 사람의 손을 잡고 '나의 가족이 되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나 먼 길을 돌아서. 


남들 다 하는 결혼에 별나게도 의미를 부여한다 - 라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뭐 요즘은 인터넷과 담을 쌓고 살아서 글 하나 올리는데 한달씩 걸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면, 축하해달라고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좋은 거잖나. 남한테 좋은 말 많이 해야, 자신도 좋은 말 많이 듣고 그러는게지. 어헣허헣. 가만있어보자... 텍스트만 좌악 도배를 하기엔 좀 거시기하니께...(뒤적뒤적)



자! 설마 여기까지 다 읽어주신 분들(...) 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마무리할랍니다.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축하해주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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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탄생 - 1 -


오래 전 가족의 탄생이란 영화를 보았더랬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내게 저 가족의 탄생이란 제목이 어째서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가슴 깊숙히 날아와 꽂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로, 저 말이 어느 날엔가 불쑥불쑥 떠오를 때면 항상 잠시잠깐이라도 그 말 주변으로 떠오르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끈덕지게 생각의 꼬리를 붙잡고 늘어졌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몇 해나 지났을까, 문득 나는 이제 이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렇게 오랫만에 일찍 눈을 뜬 휴가 중 마지막 주말의 아침에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본다. 바라건데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이야기들을 잘 밀어낼 수 있기를.

그래, 이건 단지 가족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냥 35년의 인생을 살아오며 한 남자가 생각했던, 고민했던, 가족과 가족 이상,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킹, 그리고 이상향에 대한 이야기.

*

가족이란 것이, 가정이란 것이 어린 시절의 내게 있어서는 그렇게 편한 공간만은 아니었다.

물론 스스로의 가족에 대해, 가정에 대해 불만 하나 없이 안온함만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은 어찌되었건 그러했던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 여전히 아쉬움과 미련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이미 그 시절로부터는 꽤나 멀어져왔고, 나는 지금의 내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에서 보여준 나름대로의 책임감과 괴롭게도 포기해야만 했던 어떤 선택들에 대해 충분히 존경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어찌되었거나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해도 꽤나 많은 이런저런 성품상의 장점을 지니고 계셨음에도 정작 가족의 생계나 가족이란 공동체의 어떤 생활 부분에는 안정감이 확실히 부족하셨고, 자식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엄격하시기만 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도맡다시피 하시며 헌신과 희생으로 가족을 지탱해나가셨던 어머니.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 해서 나름대로 집안의 기대주, 우량주였던 누나. 사실 또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 유별나거나 대단히 부족하거나 했던 가정환경은 아니었음에도(그 시절을 기준으로) 어린 시절의 내게 있어 그 모든것들이 그렇게 썩 편하게, 쉽게, 가정은, 가족은 내가 쉬는 곳 - 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힘들었던 것만은 사실이란 얘기랄까. 

엄하디 엄한 아버지 덕분에 집에 있는 시간이 편하지 못했고, 어머니를 바라볼 적이면 언제나 빨리 자라서,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드려야겠다는 압박에 시달렸으며 어찌되었건 상대적으로 잘난 형제에게 위축되어 있었으니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는거야 당연한 노릇이다. 그래서, 그리하여 그 결과로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를 지나며 나는 가족과 편안하게 대화하는 법을 조금씩 잊어갔다. 거품 물고 실신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에지간히 아프거나 한 건 어머니를 걱정시키면 안돼 - 라는 생각으로 좀처럼 말도 꺼내지 않았고, 청소년기에 부딪칠 수 있는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기에 아버지는 너무 버거운 존재였다. 다행스럽게 누나와의 사이는 꽤나 좋은 편이었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 겪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이성의 형제에게 쉽게 이야기한다거나 하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그렇게, 어떻게 보면 꽤나 자연스럽게도 나는 가족들에게 마음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가족이란건 내가 일련의 책임감을 가지고 어떤 부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공동체, 조금 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내게 있어 어떤 '숙제'와 같은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딱히 풀어낼 가망이 보이지 않는 어떤 묵직한.

그리고 대단히 재미있게도, 그것이 바로 내가 자꾸만 내가 편안하게 무언가를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떤 네트워크를 가족의 외부에서 찾는 데 적극적이 된 이유다. 아마도 그것은 일종의 보상심리다. 가족에게서 채울 수 없었던 어떤 부족한 평온을 외부의 어떤 네트워크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이를테면 애정결핍같은 것의 원인은 그런거란 얘기다. 내게 있어 필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없으면 당연히 다른 어딘가에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는 것. 그게 애정이건, 우정이건, 그래서 내 청소년기는 그렇게 자꾸만 밖을, 밖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그건 또 그렇게 막연한 기대심리였다. '세상 어딘가에는, 가족이 아니어도 조금 더 편안하게, 조금 더 행복하게, 기쁘고 즐겁게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갈 수 있는 어떤 무리가 있을거야.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진 어떤 집단이라면, 가족 이상의 어떤 굉장히 이상적인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거야' 라는 것. 물론 그 시절에 이런 생각들을 말끔하게 정리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그 시절의 내 모습, 그리고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어떤 장면들을 보면 바로 그게 내가 자꾸 사람들을 향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었다는 것이다. 조금은 안타깝게도. 

*

당연스럽게도, 청소년기, 그리고 대학시절까지 이어지는 삶에서, 나는 항상 가득한 무리 속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언제나 무리 속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근원이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어떤 유전들, 그리고 가족이라는 공간 속에서 내 안에 은근하게 배어들었던 어떤 것들로 인한 것이었다는 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거다. 나는 영리한 편이었고, 또래보다 훨씬 키가 컸다. 워낙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며 자라서인지는 몰라도 타인의 어떤 감정변화들에 굉장히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자연스럽게 상대의 어떤 성향에 맞춰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짓는 일에 능숙했다. 감수성이 예민했고,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 내 희,애,락을 굉장히 솔직하게 표현하곤 했다(화는 에지간하면 내지 않았으니... 어쩌면 못했으니) 사실 또래 무리들과 어울리는데 저정도면 충분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학업 성적은 에지간히 나왔고, 큰 키 덕분에 일단 또래 무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켜서 그들로 하여금 먼저 손을 내밀게 하는데 꽤나 유리했다. 눈치가 빨랐으니 딱히 누군가들과 격하게 부딪칠 일이 없었고(학창시절에 싸운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솔직한 감정표현 덕분에 속내를 모르겠다, 뒤가 구리다 뭐 그런 취급 받을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가족 외의 어떤 네트워크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그 시절에는 나름의 적극성까지도 있었으니, 어디 가서 친구를 만들고 어떤 무리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달까. 

어울리는 범위 또한 보통을 기준으로 볼때는 상당히 광범위한 편이었다. 학업 성적 덕분에 공부 잘하는 수재형 친구들과 부대끼는데 별 문제가 없었고 그러면서도 공부는 더럽게 안하는 통에 적당히 노는 무리들과도 즐겁게 어울렸다(사실, 어딜 가나 가장 친했던 무리들은 바로 그 '적당히 노는' 무리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막 나가는' 무리들과도 아주 친해져서 막 같이 어울린다기보다는 한발정도 걸쳐놓고 부대끼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게 꽤나 정확했다. 아주 친하게 부대끼는 무리 8-10명 정도, 그리고 가끔씩 만나 이래저래 즐거운 무리 10명 정도. 나머지 그냥 학교에서 같이 부대끼고 놀고 하는 무리들. 웃기는건 묘한 팔자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학년이 올라가며,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년도에 친했던 이들과 또 같은 반이 되거나, 또 같이 부대끼거나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거의 매년, 새로운 애들만 그득한곳에 혼자 던져지는 수준) 그 와중에도 그렇게 빠르게 또 새로운 무리 속에 섞이고, 함께 부대끼며 비슷한 수준의 그런 무리들과 함께 해 나갔다는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다. 황당하리만치의 적응력은 그때부터 형성이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웃고 떠들며, 소란을 떨며 보냈다. 그리고 그때는 그것이 평생 지속될 어떤 안정적인 네트워크라고 느꼈고, 그것이 가족보다 내게 안겨주는 행복들이 더 크다고 느꼈더랬다. 그리고 그 어떤 일련의 평온함들에 어떤 균열들을 느끼기 시작한건 정확히 내가 대입을 눈앞에 두고 있을 쯔음에 겪은 일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그냥 피식 피식 웃으면서, 으아아 손발이 오그라든다 하면서 던지는 농담들에 불과하지만 그때는 그게 나름대로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어떤 '나의 세계'를 심각하게 흔들어놨던 사건. 첫사랑, 그리고 공동체의 균열.

*

살아서 맺은 사람의 연, 실낱같아 부질없다 - 좋아하는 김윤아씨의 노래 가사중 한 소절이다. 이걸 처음 느꼈던 순간.

생각해보면 이별은 내게 있어 그때까진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워낙에 사람 욕심을 부려대던 시절이었던지라 그렇게나 넓게 친해지고, 만나고 하였지만 위에 말한 그 묘한 팔자때문에 연락하기 힘들어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어느샌가 잊혀지고 하는 관계들이 어디 한둘이었으랴. 그 와중에도 정말 오래오래 남기고 싶었던 인연들은 여전히 머물러 있기도 했고(그저께 함께 술을 마신 내 20년 지기와 같은), 어느 정도의 인연들과 특별히 이별이랄 것도 없이 멀어지고 하는 것은 그저 삶의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그런 자연스러운 어떤 인연의 흐름이 아닌 굉장히 사소한 일에서 빚어진, 어떤 신뢰하던 공동체의 균열이라는 것은 꽤나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게 그것으로 인한 것인지 제대로 감도 잡을 수 없었던, 돌이켜보면 그게 그때 그렇게 컸던 것이었구나 - 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그건 바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 첫사랑이 계기가 되었더랬다. 옛 얘기고, 가끔씩 블로그에 이야기를 한적도 있었으니 간단히만 요약하면 친하게 지내던 친구 집단에서 어떤 친구로 인해 어떤 처자를 알게되고, 첫사랑이란걸 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풋내나는 첫사랑이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대상이 그 친구 집단 중의 한명과 바람이 났고, 그래서 소주 9병을 퍼마시고 떡이 되었다가 새벽 알바를 하던 설렁탕집에서 손으로 선지국을 퍼먹고는 거 사랑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고 봐야 되는거네 하는 웃기지도 않는 교훈을 남긴 채 마무리했더랬다. 뭐 다양한 이유가 있었는데, 정말 사실 그건 놀라우리만치 쿨하게 정리가 되었더랬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던 게지. 지금 생각하면 참 손발이 오그라드는 얘기긴 한데 당시의 나는 그 안정적이었던, 내가 아꼈던 그 무리가 그 일로 인해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더 걱정했었더랬다. 그래서 헤어진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크리스마스 파티 장소에 그 첫사랑과 그 친구놈도 함께 참여하는 것에 쿨하게 오케이를 날리는 관대함의 과잉을 보였던 것이다.

근데 그게 결국은 불씨가 되었더랬다. 즐거워야 할 자리가 순식간에 냉각되고, 친구들 사이에 네편 니편 하며 좌악 갈라져서 으르렁대게 되고... 나는 그 순간이 지금도 안타깝다. 그 당시의 나는 순전히 피해자의 입장이었으나, 나의 행동에 따라 적어도 그 집단에서 발생한 그 균열을 메꿀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있었다. 허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입은 상처도 상처였거니와, 대입으로 인해 또 순식간에 다른 환경과 다른 생각, 다른 삶속에 파묻혀버리느라 굳이 그 괴로움을 감당해내야 한다는 생각도 할 경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때 그렇게나 굳건히 신뢰했던 그 무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두어해가 지나, 기억하건데 야간에 보초를 서고 있던 부대의 초소에서 나는 내가 그 일로 인해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꽤 분명하게 가늠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견고하게 보이더라도, 아무리 완벽한, 흠잡을 곳 없어 보이는 어떤 관계일지라도 아주 작은 부주의, 혹은 아주 작은 실수, 혹은 아주 작은 환경의 변화, 혹은 아주 작은 균열 정도만으로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라고. 그것은 어쩌면, 피로 맺어진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의 가장 큰 차이일수도 있다고. 내가 멀어지려 하고, 등을 돌리고 싶어하고, 외면하려 그렇게 애를 써도 당신들께서 내 부모요 내가 당신의 자식임은, 내가 당신의 동생이고 당신이 내 형제임은 변함이 없으나 그렇지 않은 관계들은 어느 한순간의 어떤 선택이나 판단들로 순식간에 남보다도 더 먼 사이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참 슬픈 깨달음이지만, 살다 보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어떤 관문. 그게 그 시절에 내게 남겨졌던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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