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불가항력에 관하여

우리는 각자의 의지에 무관하게 기억을 잃어간다.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마찬가지다. 나쁜 기억을 잃어버리는 거야 당연히 누구나 바라 마지 않는 일이겠지만 나쁜 기억만 선별해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게 가끔씩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는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이나,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던 친구들과의 어떤 농담들, 그리고 떠올리는 것 만으로 가슴이 저릿해지거나 두근거리거나 뜨끈뜨근해지곤 하였던, 어느 날의 사랑했던 기억들까지도. 어느날 갑자기,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삭제된 것처럼 한번에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그 형상들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옅어지는 과정을 거쳐, 어느 날엔가 그것들은 좀처럼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될런지도 모른다. 무섭고 슬프게도 말이다.

그것은 사실, 그 기억의 강렬함이나 소중함과도 거리가 먼 것들이다. 물론 개인적인 의지가 완전히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떤 것들에 대해 필사적으로 기억하려 노력한다면, 그것들은 조금 더 오랜 시간동안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은 논외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억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경험들과 조우하고, 새로운 것들을 보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듣고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무수하게 축적되는 경험들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 빨리 잊어버려야 할 것들을 분류해서 잽싸게 머리속의 어떤 영역에 올려두곤 한다. 생각해보면 대단히 징그럽게 짜증나는 일이지만, 다른 기억들에 몰두하다가 카드 결제일이나 공과금 납부일을 잊어버린다면 그건 기억을 더듬고 자시고가 아니라 당장 살아가는 일 자체에 불편을 끼칠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안타깝게도, 어떤 기억도 기억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미래 지향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거다. 잊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되는 어느 날, 괜히 시려오는 가슴에,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가득 차는 느낌에 전전긍긍해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더라도, 곧 털어버리길 권하는 거다. 그게 당신이 유난히 머리가 나빠서라거나, 질병이 있어서라거나 하는 이유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힘이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유한한 기억용량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으로써의 숙명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좀 더 말랑하게 끌고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세상의 모든것들이 기억됨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 지난 날의 뜨거웠던 사랑의 기억을 어느 순간 당신이 잠시 잊었다고 해서, 그것이 없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그것들은 그 시간에, 그 공간에, 그 차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할 이유도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가 몰두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더 뜨거운 기억을 남겨갈 수 있느냐다. 그러니 쓰린 가슴들은 접어두시라. 누구 못지 않게 뜨거웠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 어떤 기억이라면, 그것이 잊혀지건 잊혀지지 않건, 그 기억들이 남겨준 무수한 것들이 당신의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알게건 모르게건.

그렇게, 세파에 치여 기억하고 싶었던 날을 지나보내고, 씁쓸함이 가득 치밀어오르는 날 남긴다. 이는 오직,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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