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11.10.20 가을녁 사랑
  2. 2011.04.26 서글픈 긍정 2
  3. 2011.04.06 야근 4
  4. 2011.03.29 봄바람 2
  5. 2011.03.07 후회
  6. 2011.01.08 육개장 4
  7. 2011.01.06 오래된 농담 6
  8. 2011.01.03 아버지 2
  9. 2010.12.24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2
  10. 2010.10.14 바램 6

가을녁 사랑


가을녁 사랑일랑 하지를 마오
고작 한철 벌겋게 얼굴 붉히다
이내 바람결에 쓸려 떨어져
끝내 누런 먼지로 밟혀나갈
부질없는 정일랑 주지를 마오
아즉, 겨울도 되기 전이외다
그대 견뎌야할 고독은 차고도 깊소
둘러보오, 그대보다 어린 나무들도
홀로 북풍을 이겨낼 준비를 하오
다시 봄의 싹을 얻기 위해선
한껏 아름답게 물드는것보다
단단한 뿌리내림이 중요한 법이외다
이른 봄바람에도 휘청거릴
뿌리 약한 연일랑 맺지를 마오
얼기설기 엉성한 얽어짐들이
서로를 긁어내고 생채기 입히다
끝내 끊어져버릴 연이라면
애초에 너른 들에 홀로 서시오

2011.10.20 - 가을녁 사랑

외로움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렇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맺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볼때면, 스스로 외로움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란 것은 반대로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나쁜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외로움은 분별력을 흐리고, 조급하게 만들고, 그럼으로 인해 쉽게 오판을 불러오게 된다.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외로움은 긍정적으로 바라볼때는 끈질기게 사람을 향하게 하는 힘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관계를 형성하려고 할 때는 항상 그 관계를 지금 원하는 이유가 '외로움' 때문인지는 반드시 한발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는 거다. 언제나,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거다.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이유로, 사실 가을이란 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에 썩 좋은 계절이 아니다. 사람들은 외로워지고, 감상적으로 변하며, 다가올 추운 날들에 대한 걱정으로 조급해지기 십상이다. 물론 우리는 적당히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만한 월동준비를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지금 시기에 구매한 대단히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난로를 내년 봄이 되면 창고에 쳐넣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그리고, 너무다 당연히도 사랑은 필요할때 창고에 쳐넣어둘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이다.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글픈 긍정  (2) 2011.04.26
야근  (4) 2011.04.06
봄바람  (2) 2011.03.29
후회  (0) 2011.03.07
육개장  (4) 2011.01.08

서글픈 긍정


볕도 들지 않는 작은 방
묵직한 몸뚱아리 찬 바닥에 뉘인다 한들
천정 위로 바스락대는 어느 鼠生 소리에
혹은 어둔 방 한구석 습기찬 벽지 틈으로
한껏 머금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마른 잠 깨어 도로 책장 펼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달가운 새벽이랴

또는 끝내 다하지 못한 정에
가슴 한켠, 날마다 설운 눈물 품고 살아도
다만 홀로 아프거나, 홀로 괴롭거나
혹은 홀로 살아가거나 죽어가거나
넌더리 나는 삶의 무게, 나 홀로 지고 가니
이 또한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랴

2011.04.26 - 서글픈 긍정 -

삶에서의 가장 끔찍한 순간들에는 아주 자그마한 긍정조차 발견해내기 힘들다. 대다수의 그것들은 그 끔찍한 순간이 한참을 지나온 순간에서야 발견되곤 한다. 태풍이 불어 온통 쑥대밭이 된 대지 위에서 여린 새싹 하나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마냥 말이다. 그렇듯, 당신이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가장 참담했던, 결코 원하지 않았던 이별의 순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당신은, 지루하고 기나긴 삶동안 어쩌면 그 사람과 고통을 나누기는 커녕 서로에게 묵직한 짐이 되지는 않을것이란 믿음 하나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을 거듭해온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증명된 하나의 사실은 누군가와 삶을 공유한다는 것과 누군가를 죽을만치 사랑한다는 것은 조금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문제다. 아마도 그래서, 그 끔찍한 이별 앞에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라면 저런 굉장히 서글픈, 초라한, 볼품없는 긍정이라 해도 그것은 당신에게 매우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뿐이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녁 사랑  (0) 2011.10.20
야근  (4) 2011.04.06
봄바람  (2) 2011.03.29
후회  (0) 2011.03.07
육개장  (4) 2011.01.08

야근


모두가 자리를 떠난 사무실
이제는 나도 가야지 하다 창밖을 보니
어깨동무라도 할 듯 가까이에 솟은
날선 콘크리트 건물 20여층에서
여전히 잠들지 못한 불빛이 보인다

저 불빛 아래는, 또 누군가의 아비
혹은 누군가의 사내, 누군가의 아들이
온갖 삶의 무게를 짊어진채
이리도 깊은 밤을 지켜가고 있는걸까
괜스레 짠한 마음만 남긴채 사무실을 나선다

언젠가 더 늦은 밤에는
퍼뜩 홀로임이 사무치는 밤에는
봉화를 올려야겠다, 환한 형광등 불빛으로
아니, 사무실 전원 버튼을 까딱거리며
위로의 모르스 부호를 날려야겠다

헝클어진 넥타이에, 배가 불룩 나온
중년의 부장님에게 답신이 올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별빛에 가까운 옥상에 올라
양 팔 휘두르며 수신호를 보낼지도 모른다
고생하십니다, 소주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깊은 밤을 울리는 위로의 타전
한마디 말없이 스쳐지나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위로의 타전
오늘도, 도시의 밤을 지키는 이들에게.

2011.04.06 -야근-

밤을 하얗게 태우는 날들의 재시작이다. 퇴근 무렵엔 눈이 다 빡빡하다. 답답한 마음으로 퇴근을 하는데, 도심을 가득 메운 고층빌딩의 군데군데 불이 밝혀진 사무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어떤 사실중, 가장 보편적인 상황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는것은 '혼자가 아니야'라는 생각이다. 그래,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바지런히 일하며 밤을 밝히는 이들이 있구나. 참 별 것 아닌 사실에 위로를 받으며, 문득 그 모두에게 화이팅을 외치고 싶어졌던 밤이었다. 화이팅. 당신들이 지새운 밤들만큼이나, 당신의 삶이 충만해지길. 화이팅. 화이팅.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녁 사랑  (0) 2011.10.20
서글픈 긍정  (2) 2011.04.26
봄바람  (2) 2011.03.29
후회  (0) 2011.03.07
육개장  (4) 2011.01.08

봄바람


묻건데, 일찍이
봄을 품지 못한 봄바람보다
냉랭한 것이 또 있던가
다시 묻건데
온기 한점 없는 입맞춤보다
볼품 없는 기억이 또 있던가

2011.03.29 - 봄바람

봄이 왔다 하는데 날이 차다. 바람은 여전히 쌀쌀하다. 겨우내 지겹도록 허연 눈덩이들을 바라보았을 어느 지방에선 몇일 전까지도 눈소식이 들려오곤 했었더랬다. 봄바람은 그렇지 않았다. 꽃샘추위라 해도 마찬가지다. 봄바람은 봄기운을 담고 있어야 한다. 가지 끝을 슬쩍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겨우내 움츠렸던 꽃망울들이 바스락대며 기지개를 켜고 싶어지리만치.

세상의 모든,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들이 그렇다. 시시때때로 껍데기만 가지고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 허나 그것들은 결국엔 빠르게 잊혀지거나, 가장 볼품없는 기억의 단편으로 남거나 하게 되는 것이다. 가슴 더듬으려고 통과의례처럼 쭉쭉 빨아대는 입맞춤이 무슨 기억을 남기겠는가. 기껏해야 눅눅한 습기밖에 더 남기겠는가. 입맞춤에 진심을 담아내지 못하는 주제에, 아무리 용을 써봐야 그게 얼마나 뿌리깊은 기억,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밤이 되겠는가.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글픈 긍정  (2) 2011.04.26
야근  (4) 2011.04.06
후회  (0) 2011.03.07
육개장  (4) 2011.01.08
오래된 농담  (6) 2011.01.06

후회


이리 긴 이별일줄 알았다면
그대 노랫말 따라 갈 것을
그 밤을 다독이며 나즈막히 울리던
그대 부른 노래 한소절 따라 갈 것을
이제는 끊어진 노래, 늘어난 테이프
수북히 먼지 쌓인 레코드판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와도
무심코 지나친 후 아차 하는 노래
이렇게 오래도록 흘릴 눈물 알았다면
그밤의 그 노래 따라 갈 것을

2010.03.07 - 후회 -

가끔은 흘러간 옛 노래가, 득달같이 가슴으로 달려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또 그렇게 울컥대며 흘러넘치는 무수한 소리들을 잠재우기 위해, 얼마나 차디찬 술잔들이 필요했던가.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근  (4) 2011.04.06
봄바람  (2) 2011.03.29
육개장  (4) 2011.01.08
오래된 농담  (6) 2011.01.06
아버지  (2) 2011.01.03

육개장

죽자고 술을 마시다
방금 전장에서 기어나온
비참한 패잔병의 몰골로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락으로의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라는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다, 바로
사랑을 잃었던 밤의 일이다

도착한 산골의 간이역에서
나를 맞은건 눈사람이다
언젠가 날이 새도록 만들었던 눈사람
어느 햇살에 녹았나 했더니
도시가 싫어 이곳까지 걸어왔나
눈사람과 어깨를 걸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사이를 걷다
어느샌가 걸음을 멈춘 눈사람이
어젯 밤, 내 등을 바라보던 네 모습같아
휘청이는 다리로 도망쳐갔다

개미들과 함께 머물던 싸구려 여관방
몸을 누이니 천장이 돈다
아직도 죽지 못해 예까지 왔구나
도로 죽자고 술을 마시다
휘청이다 넘어뜨린 소주병에서
맑은 소주가 흘러넘친다, 눈물마냥
아니 어쩌면, 눈물만 흘렀는가
짭쪼름한 물기 위로 개미들만 신났다

눈을 뜨니 해는 중천이다
비척대며 일어나자니 치미는건 토악질
내장까지 모조리 토해낼 듯 토해내니
사지는 덜덜 이는 딱딱
그래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데
사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라, 살아다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끈덕지게 생을 열망하는 소리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나섰다
식당 문을 비집고 들어가니
벌건 눈과 퉁퉁 부은 얼굴에
흘낏대는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무엇을 먹어야할지 고민도 못했는데
입에서는 절로 말이 나온다
육개장이요, 육개장 하나 주세요
황급히 끓여내온 벌건 육개장이다

살아보겠다고
숟가락으로 퍽퍽 떠서 입으로 가져가니
오그라들던 온 몸이 펴지는 기분이다
언제 죽자고 그랬냐는듯 신나게 먹는데
뜬금없는 웃음이 터진다
시팔 사랑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이
살겠다고 쳐먹기는 잘도 쳐먹는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어도
숟가락은 멈출 생각이 없다

사랑을 잃고 떠나온 밤이었다, 아니
사랑하기에 살아감이 아닌
살아가기에 사랑해야 함을 깨달은 날이었다
아니, 그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육개장
그날의 사랑보다 더 뜨겁고
그날의 슬픔보다 더 진했던 육개장
육개장 한그릇 먹은 날이었다

2010.12.7 - 육개장 -

언젠가 포스팅도 한번 했었던 육개장 한그릇에 대한 이야기다. 여전히 그날 먹었던 육개장의 맛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독하디 독한 기억이긴 하다.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고통과 슬픔들 속에서도 고작 육개장 한그릇으로 그렇게나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삶의 의외성이고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항상 말하곤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고. 그저 슬픔이 치밀어오르는 날일 수록 쓰린 속에 뜨끈한 국물 한 그릇 밀어넣어 주는게 제일이라고. 사람 있고 사랑 있지, 사랑 있고 사람 있는거 아니지 않겠냐며 말이다.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바람  (2) 2011.03.29
후회  (0) 2011.03.07
오래된 농담  (6) 2011.01.06
아버지  (2) 2011.01.03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2) 2010.12.24

오래된 농담

이제와, 누군가 내게
무엇으로 살고 싶냐고, 아니
무엇으로 남고 싶냐고 묻는다면
오래된 농담으로 남고 싶다고

아는 놈만 알아먹는 최신 개그 프로
어거지로 쥐어짜는 유행 시트콤 아닌
늘근 친구들 술상 위, 안주거리 떨어질적
이놈아 네놈이 그랬더랬지 하며 올라와
날이 새도록 씹어대는 찰진 안주마냥
이제는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로다가

혹은, 성미 느긋한 친구들이며
잰 걸음으로 뒤를 따라 걷는 이들이
화투장 척척 후려치고, 술잔을 따르며
거 사람 참, 농담처럼 살았더랬지
눈물보단 몇마디 낄낄거림으로
웃으며 안녕 고할 수 있는

낡았으되 결코 남루하지 않은
묵었으되 결코 지리하지 않은
오래 지나, 두고 두고 떠올릴 적 마다
그리움보다 앞선 가벼운 미소로 남는
오래된 농담으로 남고 싶다고

2010.11.24 - 오래된 농담 -

부끄러운 말이지만, 소시적엔 참 사고도 많이 쳤더랬다. 그래도 그 시절의 사고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대단히 피해를 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다만 스스로를 낮게 여기고 괜한 자괴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던 시절의 일이어서 그런지 스스로 다치고 울고 깨지고 했던 사고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허나 분명히 친구들에게는 민폐도 많이 주었더랬다. 폭음을 하고 친구들에게 엉겨 붙어서 개민폐를 끼치고는, 다음날 깨었을적엔 속으로는 이미 스스로를 그렇게나 구박하고 있으면서도 친구들 앞에서는 괜한 허세를 부리곤 했었다. 어쨌든 즐겁긴 했잖아? 킬킬킬 하면서 말이다.

그게 그런데 또 우스운 것이, 그렇게나 많이 쳐놨던 과거의 사고들이 이제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서면 어김없이 찰진 안주감이다. 놀림감을 오십년치는 쌓아두고 있다고 말하곤 하지만 과장이 아닌게다. 이제는 사회에 다들 치여 사느라 예전처럼 자주 보지도 못하는데, 가끔 모여 안부를 나누다가도 술자리가 깊어지곤 하면 어김없이 그 시절의 그 이야기들이 흘러간 슬랩스틱 코미디에 대한 얘기마냥 안주감으로 오르게 마련이다. 그럴 적이면 아 또 그얘기야 하며 적당히 민망해하기도, 아니면 여전히 뻔뻔스럽게 어쨌든 즐거웠잖아? 라고 말하며 킬킬대기도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런 저런 이야기들로 밤이 늦은 시간까지 웃고 떠들게 된다.

이제는 나이를 먹고 그나마 좀 점잖게 살고 있자니 야 네놈이 사고를 안치니까 왠지 심심하다 뭐 한건 해봐라 하는 농도 난 예전에 많이 했으니 이제 네놈들 차례다 하며 받아치는 정도다. 분명한것은, 어찌되었건간에 그 시간들이 우리에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았고, 어설프고 모자르고 마구잡이였고 참 대책 없었지만, 그 혼돈의 시간들조차 이제는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함께 웃으며 즐길 수 있는, 때로는 종종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시간의 마법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죽을 날이 되어 무엇을 남기게 될까 하고 생각을 하곤 하였더랬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내 생각은 같다. 난 그렇게 썩 무겁고 진지하게 세상을 살고,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한것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저 생의 모든것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누군가들이 나를 떠올릴적에, 막연한 슬픔이나 괴로움, 혹은 뭔가 묵직한 채무감이나 진지한 깨달음, 그리움에 서늘한 가슴, 그런것 보다는 그저 가벼운 미소가 먼저 떠올랐으면 하는 바램이다. 말 그대로, 허, 거 사람 참, 재미있게 살았더랬지, 그놈 참 즐겁게 살았더랬지. 그런 기억으로 남겨지고 싶다. 마치 오래된 농담처럼. 수년, 수십년이 지나고 나서 문득 떠올리더라도 그저 웃음이 먼저 튀어나오는 오래된 농담처럼. 그렇게 말이다.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회  (0) 2011.03.07
육개장  (4) 2011.01.08
아버지  (2) 2011.01.03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2) 2010.12.24
바램  (6) 2010.10.14

아버지

사북 가는 심야 고속버스
깊은 침묵과 쌔근대는 숨소리만 품고
눈발 휘날리는 영동 고속도로를 달린다
궂은 날씨에 행여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 없다, 세시간에 더하고 빼기 삼십분
지금껏 아무리 궂은 날씨에도
좀처럼 늦어지지 않던 버스다

갑자기, 꼿꼿이 등을 새우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양반의 희끗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그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얼굴에 구불구불 남은 세월의 흔적
그 흔적들보다 더 급히 굽은 산길을
날랜 손놀림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에
문득 떠올린다, 내 기억속 그의 모습

내 아비도,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내가 나기도 전, 불빛 하나 없이 굽은 산길을
털털거리는 제빵공장 차를 몰고는
밤이 새도록 달리고 달렸다 하였다
어둠만큼이나 묵직하게 짓눌러오는 눈꺼풀을
창을 열어 들이치는 칼바람으로 깨우며

가자 가자, 삶으로 가자
내 새끼, 내 마누라 함께 살러 가자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흘러간 옛 노래 흥얼거리며
길가에 깔리는 허연 고독의 덩어리들을
달궈진 바퀴로 뭉개가며 달렸을 것이다

이제는 눈이 침침해 운전대도 못잡겠다
들을 적마다 가슴이 찌리한 말들을 하셔도
나는, 그만치 사랑하였나보다
뒷자리서 바라본 당신의 그 든든한 뒷모습을
운전대를 잡은 손등에 구불대던 힘줄들을
그리하여 겨우 지금에 와서야
그 무수했던 밤들에, 당신의 고독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는 것이다

시큰해지는 눈시울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송이는 별조각마냥 굵어져 있다
다시 앞을 보니, 불 꺼진 차 안에도
기사양반의 흰머리들만이 저 홀로 밝다
세상의 아비들은 그렇게 별빛이 되는가
나 또한 어느 날엔가 누구의 마음 위로
별빛처럼 쏟아져내리는 이름 되려나

2010. 12. 06. - 아버지 -

아버지께선 여전히, 내가 운전대를 잡는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아직도 가끔 운전 연수나 시켜달라고 얘기를 꺼낼 참이면, 꼭두새벽부터 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지셔서 보이지 않으시곤 한다. 버스 운전을 그렇게나 오래 하셨고, 운전에 그리도 능숙하신 당신께서도 차로 인해 그리 많이 고생을 하셨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은 행여라도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애초에 운전대를 잡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신 게다. 그 맘을 충분히 알기에 아직까지 굳이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싶은 마음도 없다. 언젠가 나도 가정을 가지고, 아이라도 하나 생기면 그때 쯤에나 생각해 볼까.

한번은 가족끼리 안면도에 여행을 갔었는데, 동이 틀 무렵에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툭툭 건드리시며 깨우셨다. 운전 연습 하러 가자고. 왠 바람이 부셨나 해서 따라 나섰더니 대뜸 운전대를 잡으라 하시고 옆 자리에 앉으신다. 얼떨결에 운전대를 잡고 한바퀴 돌아 오니, 그래도 면허 따고는 처음 하는 것일 텐데 날 닮아 괜찮게 하더라고 어머니 앞에서 자랑을 하시며 웃으신다. 왠지 모를 멋적음에 그저 웃고만 있었더랬다. 그리고는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무섭고 엄했던 아버지셨지만, 당신께서 운전대를 잡고 여기저기 가족들을 데리고 다닐 적이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듬직하고 능숙했었더라는걸. 괜스런 미움만이 가득하던 시절이었지만, 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자랐고, 그 모습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랬었다. 불빛 한점 없는 산길을 달리던 사북행 고속버스 안에서도, 운전석 뒤로 잠깐씩 보이는 운전기사양반의 희끗한 뒷머리를 보면서도,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최고의 베스트 드라이버였던, 아버지, 당신을 말이다.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개장  (4) 2011.01.08
오래된 농담  (6) 2011.01.06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2) 2010.12.24
바램  (6) 2010.10.14
낙엽 태우는 계절  (4) 2010.10.12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어느 해 겨울
내가 그대의 눈물을 훔쳤을적에
나는 알았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라는 것을

수십번, 아니 수백 수천번
삶을 거듭 살더라도
나의 그대보다, 그대의 나보다
더 멋드러진 어울림은 없으리라는
함께함에, 단 한 점의 주저함도 없으리라는

어린 풋사랑의 호언장담이 아닌
달콤함만을 꿈꾸는 교언도 아닌
살아온 만큼의 믿음과
살아갈 만큼의 용기를 담은
무엇보다 단단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나는 외쳤다
한없이 쓸쓸했던 어느 겨울 날
싸움에 지고 쫓겨온 늙은 개 같은 몰골로
다만 위로를 구하며 찾곤 했던
어머니 바다, 그 푸른 물결 앞에서
그대의 손을 부숴져라 굳게 잡고는

이 사람이 바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내가 수천번 삶을 고쳐 살더라도
대지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이 사람이 나의 마지막이라고

2010.12.24. -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

2010년 크리스마스. 애인님을 위한 헌시. 부족하지만. :)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된 농담  (6) 2011.01.06
아버지  (2) 2011.01.03
바램  (6) 2010.10.14
낙엽 태우는 계절  (4) 2010.10.12
옛 사랑  (2) 2010.10.09

바램


몰염치한 투정이 아니었다
떠나지 말아달라는
홀로 두지 말아달라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차마 생각도 할 수 없던
그 말을 하려던것이 아니었다

그날의 그대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마지막 바램은
웃으며, 뒷걸음질쳐주면 아니되겠냐고
그리도 사랑했던, 옅은 미소를 머금고
느릿하게 뒷걸음질치며 손을 흔들어
내게 오는지 나를 떠나는지 모를
마지막 착각이나마 남겨줄 수 없겠냐는
그리도 못난 말을 하고 싶었을뿐

2010.10.14 - 바램 -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지만 이별을 겪을때면, 또 이별을 보고 듣고 느낄때면 언제나 그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정말로 노래 가사처럼 담담히, 웃으며, 그렇게 안녕을 고할 수는 없을까 하는. 그렇게 등을 돌린 사람의 뒷모습이 너무 아파서, 트라우마라도 생긴건지 누군가의 닮은 뒷모습만 봐도 움찔거리게 되는 경험을 한다는건 쉽게 견디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시종일관 사람들에게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함을, 눈을 보고 당당히 이별을 말할 자신이 없거들랑 그 이별을 재고하라는 권유를 하곤 했지만 가끔은 그것이 반드시 정답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프지 않은 이별같은게 없다고는 하지만, 유독 후유증이 많이 남는 이별 정도는 있게 마련 아니던가. 조금 비겁해짐으로써 조금 덜 다치게 된다면, 어쩌면 그것도 종국에 가서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 될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물론 여전히, 그래도...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소오강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  (2) 2011.01.03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애  (2) 2010.12.24
낙엽 태우는 계절  (4) 2010.10.12
옛 사랑  (2) 2010.10.09
들을 수 있는 동안  (4) 2010.10.07
prev 1 2 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