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

죽자고 술을 마시다
방금 전장에서 기어나온
비참한 패잔병의 몰골로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락으로의
돌아오지 못할 여행이라는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다, 바로
사랑을 잃었던 밤의 일이다

도착한 산골의 간이역에서
나를 맞은건 눈사람이다
언젠가 날이 새도록 만들었던 눈사람
어느 햇살에 녹았나 했더니
도시가 싫어 이곳까지 걸어왔나
눈사람과 어깨를 걸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사이를 걷다
어느샌가 걸음을 멈춘 눈사람이
어젯 밤, 내 등을 바라보던 네 모습같아
휘청이는 다리로 도망쳐갔다

개미들과 함께 머물던 싸구려 여관방
몸을 누이니 천장이 돈다
아직도 죽지 못해 예까지 왔구나
도로 죽자고 술을 마시다
휘청이다 넘어뜨린 소주병에서
맑은 소주가 흘러넘친다, 눈물마냥
아니 어쩌면, 눈물만 흘렀는가
짭쪼름한 물기 위로 개미들만 신났다

눈을 뜨니 해는 중천이다
비척대며 일어나자니 치미는건 토악질
내장까지 모조리 토해낼 듯 토해내니
사지는 덜덜 이는 딱딱
그래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데
사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라, 살아다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끈덕지게 생을 열망하는 소리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나섰다
식당 문을 비집고 들어가니
벌건 눈과 퉁퉁 부은 얼굴에
흘낏대는 시선들이 날아와 꽂힌다
무엇을 먹어야할지 고민도 못했는데
입에서는 절로 말이 나온다
육개장이요, 육개장 하나 주세요
황급히 끓여내온 벌건 육개장이다

살아보겠다고
숟가락으로 퍽퍽 떠서 입으로 가져가니
오그라들던 온 몸이 펴지는 기분이다
언제 죽자고 그랬냐는듯 신나게 먹는데
뜬금없는 웃음이 터진다
시팔 사랑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이
살겠다고 쳐먹기는 잘도 쳐먹는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어도
숟가락은 멈출 생각이 없다

사랑을 잃고 떠나온 밤이었다, 아니
사랑하기에 살아감이 아닌
살아가기에 사랑해야 함을 깨달은 날이었다
아니, 그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던 육개장
그날의 사랑보다 더 뜨겁고
그날의 슬픔보다 더 진했던 육개장
육개장 한그릇 먹은 날이었다

2010.12.7 - 육개장 -

언젠가 포스팅도 한번 했었던 육개장 한그릇에 대한 이야기다. 여전히 그날 먹었던 육개장의 맛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독하디 독한 기억이긴 하다.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고통과 슬픔들 속에서도 고작 육개장 한그릇으로 그렇게나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삶의 의외성이고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항상 말하곤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고. 그저 슬픔이 치밀어오르는 날일 수록 쓰린 속에 뜨끈한 국물 한 그릇 밀어넣어 주는게 제일이라고. 사람 있고 사랑 있지, 사랑 있고 사람 있는거 아니지 않겠냐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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