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여'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0.11.09 상식에 관하여 4
  2. 2010.11.08 징크스에 관하여 2
  3. 2010.11.01 긍지에 관하여 2
  4. 2010.10.12 낡음에 관하여 8
  5. 2010.10.11 바닥에 관하여 2
  6. 2010.10.09 죄의식에 관하여 2
  7. 2010.09.29 주도(酒道) 에 관하여 4
  8. 2010.09.27 인연에 관하여 2
  9. 2010.09.13 어떤 개인의, 연애시대에 관하여 6
  10. 2010.09.09 연애하기 좋은 비오는 날에 관하여 6

상식에 관하여

타인을 저울에 올려놓고 평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도 타인으로 인해 그런 저울에 올라가서 평가될 수 있음을 알고 그렇기에 그런 평가의 순간이 오더라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스스로를 내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타인을 심판대 위에 올리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도 불특정 다수의 심판대에 올라 부당한 심판을 당하거나 난도질당할 수 있음을 알고, 타인에게 냉혹한 심판을 가하는것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고, 마땅히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타인의 어떤 행위에 자신만의 잣대를 적용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정당하다고 믿어지는 행동도 타인의 어떤, 그 사람만의 잣대에 의해 제 멋대로 그른, 옳지 않은 것으로 매겨질 수 있으리란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고 어떤 타인에게 100을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 100을 받았을적에 100만큼을 돌려줄 수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나는 주판알을 굴리며 너를 대할지언정 너는 나를 가슴으로 끌어안아다오 하는것은 넌센스에 가까운 일이고 나는 가슴을 모조리 열어보이지 않았지만 너는 내게 숨기는것이 있으면 아니된다 하는것은 터무니없는 탐욕이다. 가끔,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가 상식이 아닌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바야흐로 몰상식, 비상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답답해지는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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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크스에 관하여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무수한 징크스를 만들어내고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험공부를 할때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거나, 머리를 감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이빨을 닦지 않는다거나 하는 징크스를 만들어내는 이유가 그 근원을 찾아보자면 어떤 일에 대한 실패, 좋지 못한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을때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기 두려워함이기 때문이란 얘기다. 아 생각해보니 그저께 참다 못해 점심먹고 양치를 했어, 아 깜빡 하고 미용실에 들려버렸네, 아 시험날 아침인데 엄마가 미역국 끓여줬어, 우리 엄만 계몬가봐(?) 뭐 이런 식의 책임전가, 책임회피가 너무도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원치 않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알게든 모르게든 무수한 징크스들을 만들어내기도,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징크스들을 따르기도 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기본적으로 그런 징크스 같은것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항상 이야기하고 강조하는 것인데, 스스로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만큼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때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해버리는 것 만큼 그 개인의 성장에 독이 되는 일이 따로 또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있다가 우연찮게 똥을 택하게 되었으면 최소한 똥을 택한것이 나의 잘못이었구나, 다음에 또 똥을 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도는 얻어야 남는 장사가 되는 것이지, 넌 내게 똥을 줬어 하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해버린다면 남는것은 똥과 똥을 택할때까지의 아까운 시간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사람이란것이 약하고 약한 동물인지라, 언제나, 항상, 스스로에게 걸리는 부하를 고려하지 않고 100% 스스로의 책임을 모조리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때로는 그런 강직함이 스스로에게 오히려 독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그 사람의 잘못도 있지만 이런저런 외적인 불운같은것도 있는것이고 한데 너무 스스로의 잘못에만 몰입해버린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구덩이를 깊게 판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깊이 절망해버린다거나 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요약하자면 어떤 상황에서의 적당한 정도의 책임회피는 정신건강에 오히려 이롭다. 스스로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고치려 노력할 수 있을만치의 성숙한 인격체라면 순간의 책임회피 이후에도 언젠가는 그 상황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분별해내고 적당한 만치의 반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적당한 정도라는 것이 무척이나 정하기 어려운, 위태로운 외줄타기같이 아슬아슬한 어떤 정도라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가둬버리게 되는 어떤 징크스들은 에지간하면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보편적인 어떤 징크스들에 대해 반드시 '헹 - 난 그딴 징크스같은거 믿지 않는다는!' 이라고 고집을 피울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시험 망치고 나서 어머니의 미역국을 원망하는 것은 못난 일이지만 괜히 미역국 먹고 '찝찝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러 가서 좋은 이유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나 어떤 일에 대해 잘못된 결과가 돌아올 경우, 스스로가 입게 될 데미지가 클 것이라고 예상이 된다면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그런 보편적인 징크스를 피하는 것이 좋다. 쪽지시험 보는 날 미역국 먹고 갔다고 큰일 나는 것 아니지만 수능날 아침에 미역국을 완샷하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평생이 걸린 문제인데 일주일 한달정도 때를 안 민들 어떻겠는가! 양치야 뭐 입으로 시험 볼 것도 아니지 않은가!(...물론, 권하는 건 아니다)

이글루에서 쓴 글중에 덕수궁 돌담길에 돌을 던지랴라는 글이 있었다. 대충 이별 후 힘들고 괴로운 마음에서야, 덕수궁 돌담길에든 뭣이든 책임이라도 돌리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는, 그런 우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보편적인 징크스같은것들에 오기로 콧방귀를 뀌는 일은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애인한테 신발같은것은 굳이 사줘야 할 이유가 없고, 사방 천지에 좋은 데이트 코스가 널렸는데 굳이 덕수궁 돌담길을 같이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없다 그얘기다. 많은 경우에, 다수의 사람들이 얘기한다고 그걸 그대로 따라하는건 썩 권장해주고 싶지 않지만, 다수의 사람들의 경험이 녹아있는 어떤것들을 굳이 완전히 무시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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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에 관하여


만약 자신의 삶이 남다른, 유별난, 보통은 겪지 않는 불행의 연속으로 점철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권유하고 싶다. 왜 나에게만 이런이리이이 하고 부르짖기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긍지를 갖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론 말이니까 쉬운 말이고 실제로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아니 대체 저 사람에겐 왜 저렇게 삶의 굴곡이 거친걸까, 정말로 운이 나쁜걸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사람들의 앞에서 저런 말을 한다면 사람 가지고 장난하냐고 대뜸 멱살이나 잡히기 십상인 말이지만, 적어도 스스로 받아들이기엔 그렇게나 유별나고 대단한 불행들이 가득한것처럼 느껴져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 그렇게까진 - 이라고 생각될만한 이들이라면 말이다(물론, 멱살잡힐것이 두려워 좀처럼 꺼내지 못하는 말이긴 하다)

살아오며, 사람에 대해 거듭해서 느끼게 되는 것이라면 이런 것이다. 참 약하기도 강하기도 한 동물이라는것. 먼저 물리적인 면만 봐도 그렇다. 감기 한번 안걸릴 것 같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큰 병에 걸려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거나 하는 경우가 어디 한두번이겠는가. 반대로 문고리 잡고 백살까지란 말처럼 금새라도 숨이 넘어갈듯 넘어갈듯 보이는 사람이 질기고 질기게도 삶을 이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터무니없이 작은 사고, 상처로 허무맹랑하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쉽게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도 있고, 살아있는것 자체가 신기할정도로 큰 사고를 거듭해서 당한 사람이 언제 그런 사고를 당했냐는 듯 멀쩡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물론 정신적인 부분을 봐도 마찬가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았던 사람이, 그야말로 절대이성을 장착하고 있었던 것 같은 사람이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삽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폐인처럼 지내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허구헌날 왕따에 구박에 온갖 트라우마란 트라우마는 다 껴안고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의 일이나 어떤 분야에서 깜짝 놀랄만한 성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혹자는 트라우마로 범벅된 삶을 뒤집어버리듯 여봐란듯이 살아가고, 혹자는 젊어서의 총기를 눈 깜짝할새 잃어버린채 흐리멍텅한 눈빛과 죽지 못해 살아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저 삶을 유지한다. 저 사람은 강한 사람이야, 나약한 사람이야 라고 어느 한 순간에 어떤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것 자체가 무리일 정도로, 사람의 '내구성' 이란 것은 놀라우리만치 예측 불허한 영역이라는 것이랄까.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강함은 제쳐두고라도, 그렇게나 쉽게 부서져버리고 어느 한순간에 말 그대로 훅간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훅 가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스스로가 겪어온 인생의 굴곡들을 떠올려보자. 조금은 생각의 가지를 키워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때 이러저러한 선택을 했었더라면 - 이란 것을 최악의 방향으로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모골이 송연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렇게, 인생에 굴곡이 심했다고 자타가 공인할만한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게, 내 존재 자체가 신기해 하는 기분이 들게도 마련이다. 내가 살아있는게, 내가 지금 이렇게라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게, 내가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게, 어찌 저찌 밥값은 하고 살아가고 있는게, 그런 모든것들이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고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저떻게든 그 무수한 굴곡들을 넘고 넘어, 지금 그 자리에서 여전히 단단히 땅을 딛고 서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해내고 있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타인의 삶과의 불필요한 비교따위로 평가절하 하지 않은 순수한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한 긍지를 가져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헉, 저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저렇게 한방에 훅 가버렸어? 라고 하는 이야기, 말들이 시시때때로 튀어나오게 되는, 불확실성만이 가중되고 있는 세상이다. 그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 속에서, 어찌되었건 지금까지 잘 해오지 않았던가. 이랬든 저랬든간에. 나락으로 떨어져버렸을 수도 있었던 그 무수한 불행과 위험을 거치고 거쳐, 스스로를 질질 끌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앞으로야 어찌 되건간에, 우선 지금 이 순간의 삶 자체에 대해, 지금 이 순간의 내 삶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긍지'를 가질만한 자격이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적어도 스스로, 그렇게나 무수한 괴로움과 아픔을 이겨내며,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거나 책임을 돌리거나 푸념과 원망으로 시간을 단순히 '소모'하는데 그쳤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적어도 스스로를 어딘지 모르는 미래지만 그 한치 앞도 모르는 어딘가를 향해 질질 끌고 가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라면, 정체되지 않고 걸어가는 길을 선택했던 그대들이라면 말이다.

삶에 괴로움이 밀려올 적이면, 또 나에게만 이런 일이! 라는 울컥한 마음이 치밀어오는 날이면 한번쯤 지난 고난들을 떠올려보며 그렇게 숨을 골라보는 것은 어떨까. 잔뜩 움츠러들게 만드는 모든 상황들이 벌어져도 오히려, 오기로라도 피식 하고 웃으며, 만화 주인공같은 허세스러운 말 한마디를 내뱉어보는건 어떻겠는가. '훗, 네놈들과는 겪어온 아수라장의 숫자가 달라' 와 같은 허세 순도 200%의. 그게 왜 또 나에게만 이런 이리이이 하며 울부짖는 편 보다는 상황을 수습하고 해결하는데 백배는 더 이롭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것은, 스스로의 삶에 긍지를 가질 수 있을만치 스스로의 삶을 꾸준히 가꿔나가는 것이 가장 먼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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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음에 관하여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철학 세미나를 해주신, '대형'이라고 불리는 선배가 계셨더랬다. 워낙 공굴리기(?)를 많이 하였던 시절인지라 형님과도 종종 당구장에서 큐를 맞대곤 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당구장 구석에 있던 TV에서 가요 프로그램같은 것이 하는데 자우림의 김윤아씨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근데 형님께서 자기 차례가 돌아와도 넋을 잃고 보고 계시는게 아닌가. 그랬다. 틈만 나면 김윤아씨의 매력에 대해 극찬을 하곤 하셨는데 그게 재미있는것이, 내가 그당시엔 그 매력을 몰랐더랬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예쁜 걸로만 따지면 더 예쁜, 어린 가수들이 넘쳐나던 때 아니던가. 그당시의 김윤아씨는 그저 매력적인 음색을 가진 여가수 - 정도로만 뇌리에 남아있었더라는 것.

그러던것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풍파 좀 겪고, 이래저래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맹렬한 감정의 소모를 겪고 있던 그 시절에 다시금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 이런 매력이었구나. 이래서 그 형님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하셨던 것이었구나 하는.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것이 과연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일까, 행여 지나던 김윤아씨 팬이라도 우연찮게 이 글을 읽게 되면 무슨 망발이냐고 펄쩍 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긴 하는데 어찌되었건 그 당시에 내가 눈을 뜬 그녀의 매력이라는 것은 바로 일련의 '낡음'에 대한 매력이었다. 조금 낡은, 빛 바랜, 닳고 닳은. 이유없이 나른하게 느껴지는 권태 속에 순간 순간 반짝이는 빛을 품고 있는, 그런 느낌. 그냥 간단히 얘기하자면, 아무리 예쁘고 몸매좋고 어리고 노래 잘부르는 가수가 나온다 해도 애송이로써는 흉내내고 싶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런 매력이었달까.

그것은 아마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나 또한 그만치 어느정도는 '낡았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신체 기능의 저하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참 어쩌면 그랬을까 싶은 우여곡절 속에서 한계까지 울기도, 웃기도 하며 조금씩 마모된 감정의 모서리에 관한 얘기다. 그저 어느 순간, 이제 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순간만큼 많이 눈물을 흘릴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때 나오는 반쯤은 씁쓸한 조소. 삶이란게 그런 것인가 - 라는 어떤 나름의 깨달음들 속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약간의 권태와 그렇게 늘어지는 권태의 와중에서 찰나의 순간 반짝거리며 스스로를 일으켜세우는 즐거움과 행복. '세상 좀 살만큼 살고 풍파좀 겪을만치 겪어봤다' 라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그런 분위기. 그런 어떤 감정의 마모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기에 다시금 그녀의 노래를 들을적에 또 감탄하고 감탄하게 되는것이다(일례로 나는 오지 오스본의 'Goodbye to romance'가 원곡보다 그녀가 부른 버전이 더 마음에 든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낡음의 매력'에 대해 조금 덧붙여보자. 개인적으로 여성을 크리스마스 케익에 비유하는것을 무척이나 끔찍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원숙한 여성의 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리임에 불과하다. 적당히 삶에 닳고 닳은, 사랑도 해볼만치 해본, 조금은 시니컬하고 냉소적이거나 권태스럽지만 적어도 남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 줄 아는 그런 매력은 풋사랑에 울고불고하는 어린 여성들로써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매력인것이다. 물론 경험에 따라, 삶의 과정에 따라 나이를 먹고서도 여전히 풋사과(?) 같은 순진무구함을 가졌다거나 하는것도 나름의 매력이 될 수 있을것이고, 그런 저런 부분들에 대해 누군가들이 느끼는 매력들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어찌되었건 단지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매력이 없어지고 한다는건 터무니없는 얘기란 말이다. 김윤아씨를 봐라! 무려 애엄마다!(...물론 그녀는 연예인이긴 하지만)

어쩌다보니 김윤아 예찬론과도 같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예로 든 것 뿐이지 날이 갈수록 그런 어떤 '낡음'에 대한 애정이 커져가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노릇이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특히나 선배나 직장 상사들을 대하는것이 어쩐지 어려웠더랬다. 아무래도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부대끼는것이, 뭔가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리프레쉬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얘기하기도 편하고 너무 격식을 차리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쩐지 윗 분들을 대할적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다가 예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분들의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나 관록에서 묻어나는 어떤 매력들이 참 좋고 멋드러져 보인다. 나도 저 나이를 먹으면 저런 매력들을 가지게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또 한없이 부끄럽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무언가 오래됨으로 인해 빚어지는 어떤 은은함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다보면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진입할랑말랑 하고 있는 나이에 너무 늙은이가 되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이 슬몃 들 정도로.

언젠가 석모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인생의 황혼이 저만치 아름다울 수만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나은, 더 은은한 낡음의 빛을 띌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물론, 곱게 나이먹는 것은 세상 누구나에게 주어진 숙제, 그리고 좀처럼 쉽지 않은 숙제지만 말이다. 새로 지은 삐까뻔쩍한 건물의 새 사무실에서 낡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니 어쩐지 어색스럽다. 점심 먹고 앞에 있는 서울 역사박물관이라도 한바퀴 둘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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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관하여


울렁증 일어나는 삶의 굴곡들을 겪다 보면, 누구나 아 이게 내 인생의 바닥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을것이다. 권하건데 만약 어느 순간, 지금 순간이 정말 내 인생의 바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기뻐해도 좋다. 그것이 진정한 바닥이라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것 아닌가. 더 나빠질 것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삶을 이어가는데 큰 위로다. 인생은 항상 울렁울렁 곡선을 그리는 법이지 바닥에서 바닥으로 직선주행을 하는 인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바닥의 끝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게다가 바닥이 어떤것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향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방향으로든간에 꽤나 든든한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본다. 비슷한 바닥을 경험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한번 경험해본 바닥에서의 기억이 조금은 더 다시 찾아온 그 바닥을 견디기 쉽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경험이건 나쁜 경험이건간에 '처음' 과 '두번째' 는 그 경험으로 인한 충격의 강도가 엄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이런식의 단순비교는 사실 곤란하기도 하지만 이별을 보라. 이별을 해볼 만큼 해본 사람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을리는 없는 법이지만 적어도 이별 후에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어떤 것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리란 것은 지난 이별 후의 학습된 결과로 인해 조금은 수월하게 견딜 수 있게 마련이다. 물론 애정의 크기라거나 사랑했던 기간이라거나 하는 무수한 변수가 있다 하더라도.

바닥을 조금 여유를 가지고 받아들이라는 충고 외에, 아 진짜 바닥이에요, 정말 최악이에요, 더는 나빠질 것이 없을 것 같아요 하는 이들에게 내가 권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바닥에서의 스스로를 주의깊게 관찰해보라는 것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좋은 상황에서의, 행복한 날들 속에서는 누구건간에 스스로의 내면 깊숙히 잠들어있는 최악의 어떤 단면을 난데없이 끄집어내진 않는다. 불행할때, 슬플때, 힘들때, 고통스러울때 사람은 어쩌면 굉장히 그 사람의 '진짜'에 가까운 면들을 유감없이 끄집어내게 마련이다.

때문에 그렇게 바닥이라고 부를만한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런 상황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끌고 나가는지 등을 세밀하게 관찰해두는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경계하고 삼가는 법을 깨우치게 만드는 일이고, 진정한 자기대면의 가장 중요한 일부이다. 적어도 향후에 어떤 바닥을 경험할적에라도, 이런 짓거리를 하게 될지도 몰라! 하며 경계할 수 있다는건 '최악의 바닥' 만은 회피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억을 더듬어보라. 괴롭고 힘들 적에 스스로가 저질렀던 최악의 실수들을.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터무니없이 찌질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과 행동들을. 스스로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괴물과 눈을 맞춰보는 거다.

누구도 괴물이 되기를 희망하지 않으나, 스스로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가 어떤 상황에 처할때 어떻게 괴물이 될 수 있는가를 명확히 안다면, 최소한 그 상황만큼은 피하려고 더 노력할 수 있고, 그런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괴물이 되는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적당히 격리시키거나 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것들을 다 떠나서라도 적어도 하나. 스스로의 내면에 얼마나 컴컴하고 어둡고 더럽고 이기적인 욕망들이 소용돌이치고있는가를 정확히 바라본 사람은, 최소한 타인의 어떤 부족함들앞에서 조금은 더 관대해질 수 있게 마련이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우리가 바닥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수한 가치들에 눈을 뜰때, 그 바닥은 더이상 그렇게 괴롭고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바닥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바닥에서의 시간을 귀중히 여기길. 아직까지 스스로 바닥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어느날 그런 시간이 다가와도 너무 당황하지 말길. 신은 어떤 사람을 바닥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적어도 한명쯤은 세상에 안배해 두었다. 바로 '자신'말이다. 부디, 스스로를 그 바닥에서 구하길.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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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에 관하여

죄의식이란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불행하게도 그래서 우리는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 사람이라고 우기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제법 흔하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건 우선 논외로 치자. 수치심을 느끼는 것,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했음을 깨닫고 죄의식을 가지는 것, 이것은 얼핏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너무나 당연하다고 해서 그 중요함이 조금도 희석되지 않는, '사람다움'의 기본 척도라고나 할까.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잘못 하나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것이고, 떠올려보면 부끄럽고 민망한 기억에 얼굴이 확확 달아올라서 괜히 마음이 묵직해져버리는 죄의식 같은 것들을 크고 작고를 떠나서 하나도 가지지 않은 이들은 없을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느끼는 그런 죄의식들을 어떻게 스스로의 삶에 반영할것인가, 어떻게 그것들을 관리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죄의식이란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의미와는 전혀 별개의, 삶을 더 바른 방향으로 끌고가기 위한 영양 만점의 고민이라는 것, 바로 그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요점부터 말하자면, 항상 제일 어려운 것이지만 제일 진리에 가까운 것,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게 - 가 가장 바람직한 죄의식의 관리방안이랄까.

이를테면 죄의식이란것을 이고 지고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버거운 일이다. 술에 취해 노상방뇨를 한 기억이라던지 하는 사소한 잘못들에 대한 죄의식이야 그냥 너털웃음 몇번으로 털어낼 수 있을만한 것이지만 스스로가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스스로의 커다란 과오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족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같은것을 떠올려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일수록 더 그런 부분에서 지나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용서라는 것에 목말라있고, 쉴 새 없이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 역시 일부는 그런 죄의식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가 바로 종교라는 산물이고, 현대사회에서 거짓 선각자들이 신을 팔아가며 너무도 뻔한 거짓을 일삼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기에 길게 얘기하진 않지만 특정 종교의 어떤 교리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편케 하는가. 절대자께서 나의 잘못을 용서하셨다! 나는 용서받았다! 그분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한낱 미물에 불과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하느냐! 와 같은, 기상천외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을 우리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굉장히 편하게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문제다. '편한 용서'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삐뚤어진 욕망 가운데서도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규모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것이랄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잘못도 아닌데 이것도 내 잘못, 저것도 내 잘못, 난 그냥 살아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죄의식에 금새라도 질식해버릴듯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무척이나 걱정스럽고 너무나 쉽고 편하게 용서를 구하려하고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이들을 볼적이면 무척이나 한심스럽다. 죄의식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죄인처럼 살아가는것도,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죄의식을 건성으로 한 반성 몇번에 집어던진채 희희낙락하는것도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길이 아니란 이야기다. 물론 그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항상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잠깐씩 균형을 잃어버릴 적이면 순식간에 삶이 괴로움만 가득해지거나, 절대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지 못하게 되거나 한다는 것이랄까.

정리하자면 이렇다. 어찌되었건 살아내어야 하는 존재로써의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에 깃든 죄의식을 대할적에 가장 바람직한 마음가짐은 이런 것이 될것이다. 다만 비슷한 과오들을 반복하지 않기를, 내가 세상에 늘여놓은 상처보다,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기쁨과 희망들이 더 큰 것이 되기를.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여미고 나가는 것이 그 죄의식이란 녀석을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표지판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 이야기다. 적어도 그 편이, 마비된 죄의식으로 인해 타인에게 위협이 되거나, 신을 사칭하여 나는 신에게 용서받았네 마네 하며 신을 모욕하는 것 보다 백번은 더 '인간다운'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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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酒道) 에 관하여

술이란 녀석을 처음 알게 된 후 대략 1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름 애주가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지나온 세월들을 돌이켜보면 술로 인해 골치를 썩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니라서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곤 한다. 놀림감 50년어치는 적립해두었다고 진담 반 농담 반을 하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여전히 밤이 늦어지면 그 시절 그 슬랩스틱 코미디같은 상황들을 이야기하곤 할 적에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것이 스스로임을 돌아보면 놀림감 50년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게 실수하고 뉘우치고 스스로를 더 윽박질러도 보고 케세라 세라 하며 보내기도 해보고 했던 경험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이제는 거의 술자리에서 실수하는 일이 드물어졌고, 아 그간 내가 술이란 녀석을 잘못 대했었구나 하는 일련의 깨우침도 있어서 이쯤해서 이렇게 기록해두는 바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 세상을 떠날 날까지 얼마나 더 술잔을 기울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후로 이어질 술자리들에서 내가 가장 우선시 하는 주도(酒道)가 될것이니 혹여 스스로 술을 좋아라 하신다 하는 분들이라면 나의 주도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돌아보는 것도 가을 냄새가 물씬 나서 절로 흥이 일어나는 계절에 한번쯤 해봄직한 생각일 것이다.

흔히 주도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술자리에서의 어떤 예의와 같은 것들이다. 특히나 어른들과의 딱딱한 술자리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 말이다. 술잔을 기울여 받는거라던가, 두 손으로 받는다거나, 고개를 돌려 마신다거나 하는. 하지만 그런거야 적당히 사회생활들을 하다보면 절로 알게되는 것이고 대충 남들 하는걸 보고 따라하면 썩 부족하거나 모자랄 이유가 없다.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떠한 술자리에서건간에 항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어떤 마음가짐, 가장 핵심되는 생각이라고 봐도 좋을것이니 바로 다음과 같다.

술은 스스로 즐겁게 마셔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내가 15년간 술을 마셔보고 내린 결론이다. 괴로운 마음으로, 어거지로 마시게 되는 술은 항상 스스로에게 독으로 남는다. 똑같은 양의 술을 먹었어도 즐겁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며, 흥에 올라 마신 술과 비탄에 젖어 부어넣듯이 속에 집어넣은 술은 그 뒤끝이 온전히 다르다. 괜스레 분위기에 취해 허겁지겁 사흘 굶은 사람이 밥본듯 집어넣는 술과도 또 다르다. 천천히 한잔 한잔을 기울여가며 알큰하게 올라오는 취기를 여유롭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괜스레 사람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면서 술잔을 강권하여 타인을 괴롭게 하는 일 없이, 내가 술을 얼마나 마시고 얼마나 즐기고 있는가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 홀로 술에 취해 날뛰다가 술자리를 망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만 스스로 얼마나 그 술잔들을, 그 술자리의 모든것들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가를 돌아보며 여유를 가지고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랄까.

물론 항상 즐겁고 흥겨운 술자리만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매냥 똑같은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그때 그때 다른 것이 아니던가. 심지어는 혼자서 술을 마실 적에도 같다. 기분이 들뜨고 흥겨우면 그 상태 그대로를 즐기면 되는것이고, 행여 그렇게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묵혀둔 고민이나 비애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면 그 순간이 바로 술을 그만 마셔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애초에 즐길만할 것이 전무한 술자리에 어거지로 끌려가게 되었다면 처음부터 술잔 기울이는 일에 인색해지는 것도 바로 저 '즐겁게 마시기' 라는 도를 위해서다. 친구의 고민상담을 해주는 묵직한 술자리에서 어찌 즐거움을 찾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내가 그를 위해 그런 자리를 준비하고, 그 사람과 어떤 정서적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답할 것이다. 단순한 희희낙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내일 아침에 오늘의 자리를 돌아보아도 그래도 좋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보람찬 시간이었다 할 수 있는, 그런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자리를 가져야 한다는것. 그리 하기 힘들 것 같다면 술을 줄이든 그 자리에 붙어 있는 시간을 줄이든 모종의 조취를 취해야 한다는 것. 풀어 설명하자면 대충 이런 이야기라는 것이다.

종종 술을 잘 하지 못하는 지인들에게 '술을 모르면 인생의 절반을 모르는거야' 라고 농담을 던지곤 할 정도로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내가 기울이게 될 술잔들에 즐거움과 기쁨들이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참으로 다시 돌아보아도, 지금껏 겪어온 그 모든 괴로움과 슬픔들은, 그걸 잊어보겠노라고 미련스럽게 부어넣었던 술만큼이나 출렁거리며 스스로를 더욱 어지럽혔던 것이다. 다시는 그리 미련스럽게 몸과 마음을 함께 괴롭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그대들의 그 모든 술잔들에도 항상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하기를, 그리하여 참으로 스스로의 도를 잘만 찾아내면 인생에 그만큼 흥을 더해주는 것도 없는 술이란 녀석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길, 그렇게 빌어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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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에 관하여


인연은 사람이 반, 하늘이 반이라 이야기하곤 한다. 한때는 그렇게나 사람에 목숨을 걸고 살다가 이제 적당히 사람을 놓기도, 잡기도 하며 적어도 스스로를 해칠만큼 무리한 인연에 대한 욕심은 내지 않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이후부터다. 정확히는 그렇게 기를 쓰고 이어가고 싶었던 인연을 끝내 놓치고 나서, 그 허망함과 괴로움의 끝에서 겨우겨우 얻어낸 소중한 깨달음이 있고 나서다. 이 이야기를 스면서도 참으로 헛헛해서 다시 웃는다. 삶이 그런 것이 아니던가. 진흙탕 속을 뒹굴어도 바닥을 긁어보면 얻을 진주알갱이 하나정도는 있는것이고, 한없이 어두운 길을 걸어도 멀리 반짝이는 불빛 하나정도는 있는법이다.

어찌되었건 이제는 어떤 인연의 잇고 끊어짐 앞에서도 조금은 스스로 마음을 편케 하는 길을 깨쳤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진작 저런 마음가짐으로 흘러간 인연들을 대했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인연으로 남게 되었을 이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그럴 적이면 또 아쉬움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되는것이 사실이지만 지나간 일이야 어쩌겠는가. 그저 내가 그 흘러간 인연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는것은 단 하나를 위함이다. 그때는 참으로 하늘이 나를 많이 도왔는가, 하늘의 반을 넘치게도 채워주었는가를 돌아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사람의 반을 충분히 해왔는가, 내가 반 이상으로 대했던 이들은 누구고 반의 반절도 못했던 이들은 누구고 어째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가, 그런 점들을 곰곰히 돌아보며 뉘우치기도, 지금 내 곁에 머무르는 인연들에게는 어찌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기도 하려는 것이랄까.

살아가며 얻는 깨달음이 모두 그러한것처럼, 어떤 하나의 깨달음이 절대적인, 어떠한 순간이라도 조금도 틀림없이 들어맞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인연에 대한 그런 깨달음도 마찬가지리라. 그렇게 조금은 사람들을 놓을 수 있겠다 하여 이제는 되었다 하며 지내던 어떤 날에 갑자기 그런 불안함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이 반 사람이 반, 나는 그리하여 또 하늘의 반에 너무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 깨달음이란것이 사실은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체념을 온순히 받아들이기 위한 거짓 깨달음은 아닐까. 사실 말이야 바른 말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연인과 이별하여 눈물흘리는 지인들에게 우리가 가장 자주 건네는 위로의 말이 어떤것이던가.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네가 부족함은 없었으되, 하늘이 그 반을 제대로 돕지 아니했나보다 하는 말로 그저 순간의 다독임을 전하고자 하지 않던가.

그제사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참으로 그것이, 균형을 잡기 힘든 말이더라. 내가 잘해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어쩔 수 없고 내가 못해도 하늘이 그 이상 해주면 어찌 저찌 잘 풀려갈지도 모르는 일인데 내가 굳이 지금 이렇게 애를 쓸 필요가 있겠나 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게 될 수도,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반에 반도 아니하여놓고는 스스로 난 이만하면 반은 하였으니 되었다 할 수도 있는 법 아니던가.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기본적인 생각이야 저리 한다 하더라도 마음먹음의 자세가 중요하더라.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선후를 따져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랄까.

간단히 말해 이렇다. 어떤 사람을 대할적에, 어떤 인연을 대할적에 하늘이 반이라는걸 먼저 생각하고 뜬금없이 정화수 떠놓고 기도부터 드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이야 어찌 되건 말건간에, 나는 항상 나의 몫을 다하고 있는가, 이 인연을 지켜나가기 위한 사람의 반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혹은 반 이상을 하고 있는가, 끝내 모진놈의 하늘이 그 인연을 허락치 않아 놓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눈물 머금고 등을 돌리면서도 스스로 나는 나의 몫을 다했노라고, 그러니 그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만큼 공을 들였는지, 가슴이라도 떳떳이 펴고 당당히 걸어갈 수 있을만큼의 노력은 하였는지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몫을 다 한 다음에야 나머지를 하늘에 맡기건, 기적을 바라건 하는것이지 스스로 할 몫을 다 하지도 않은채 감나무 아래서 입벌리고 있는 것 같은 어리석은 기대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랄까.

만약 어떤 인연을 떠나보내려 하는, 혹은 붙들려 하는 이들이라면 항상 먼저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과연, 얼마나 마음을 다하였는지. 만약 아직 더 할 수 있다면, 더 남겨진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뻔한 속담이지만 사실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 있지 않던가.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스스로 마음을 다하였다면, 그 공들인 인연을 어찌 하늘이 나몰라라 하겠는가. 물론 모든 순간에 그런 기대들이 기대했던대로 이루어지진 않더라도 최소한 마음에 후회 한점이나마 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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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인의, 연애시대에 관하여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하다보면 누구나 지치게 마련이다. 사랑이란것이, 연애란것이 그렇게 쉽고 달콤한 것만은 아니지 않던가. 넌더리나게 싸우고, 피눈물을 흘리기라도 할듯이 슬퍼하고, 지겹고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고, 그런 모든것들이 사랑이라는, 연애라는 것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는 이상 사랑이나 연애에서 달콤한 면만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은 터무니없는 욕심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또 한번의 사랑과 이별을 거친 후에는 누구나 그렇게 외치기 마련이다. 아 제길 내가 이런걸 또 하나봐라, 사랑은 끝났어, 내 인생에 연애는 없어, 연애는 성공의 적(?) 과 같은 말들을 이를 갈면서 토해내게 되지 않던가. 물론 주변에 적당한 경험을 거친 적당히 나이든 사람들이 있다면 그냥 코웃음치며 나중에 얼마나 민망해지려고 지금 그렇게 떠들고 다니냐 하며 무시하겠지만, 또 어느 순간에 과거의 스스로가 그렇게 외쳤던 것을 떠올리며 얼굴이 벌개지는 날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제길, 도대체 왜, 이딴걸 내가 또 왜,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이란.

사실 또 사랑과 연애에 대한 모든 것들은 케바케에 가까운지라 일반화시켜 이야기하기 곤란한 문제긴 하지만, 적어도 개인의 대연애시대 - 가 언제 종료되는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스스로는 납득할만한 해답을 찾은 상태라고 믿기에 혹여 그런,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언제까지이이이를 외치고 있을 누군가들이 읽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렇게 남겨본다. 당신의 연애시대가 언제쯤 끝나는지, 언제쯤 지금의 그 번뇌에서 조금쯤은 자유로워지는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줄 것이다.

앞으로 당신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될지, 그것이 언제쯤일지, 그건 모른다. 한치앞도 내다보기 힘든 세상에 미래의 일을 예측한다는게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연애시대란 것은, 죽기 직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로 인해 괴로움도 생기고, 괜스레 애가 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느날 갑자기 얼굴이 화끈해지기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으며 안온함을 느끼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것들이 다 연애의 일부라고 한다면, 당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제기랄 이젠 정말 끝 - 이라고 외쳐봐도 소용없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숙명이다. 무슨 허리케인같은 사랑의 대폭풍같은것이 불어닥치는 일이야 당연히 나이를 먹어가며 터무니없이 줄어들겠지만 그런 것들 또한 언제 새로운 바람이 불지 모르고, 건어물이 아니라 아주 그냥 사막의 모래알 수준으로 건조가 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폭우처럼 쏟아져내리는 어떤 열정들에 휩싸일지 모르는 노릇인 거다. 그 모든 가능성들을 내포한 그 어떤 개인의 연애시대란것은, 종료가 없다. 생의 종료가 그 시대의 종료다. 운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말이다.

하지만 그럼 죽을때까지 이렇게 외롭거나 번뇌하거나를 반복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차라리 지금 깔끔하게 자결하는게 낫겠어요 - 라고 말할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덧붙여주자면 이렇다. 완벽한 종료는 없을지언정, 어느 시점에 아, 이제 그 지독한 번뇌들에 깔려 죽을 것 같은 시기는 지나갔구나 - 하고 느끼게 되는 시점은 온다는 것. 과거같으면 훨씬 더 심각하게 괴로워했을법한 어떤 거대한 번뇌가 밀려와도 피식 하고 쓴웃음 한번 지으며 시크하게 넘겨버릴 수도 있는, 어떤 분기점같은것이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점은 말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만나, 아, 그냥, 이 사람이구나. 하는 순간.

조건이고 뭣이고 모든걸 다 떠나서, 아, 그냥, 이 사람이구나. 싫든 좋든, 잘났든 못났든, 그냥 나는 이 사람이랑 함께하는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거구나.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모든걸 다 떠나서 그냥 이 사람과 함께 삶을 살아나가야겠구나.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역시나 운이 좋을수도 나쁠수도 있게, 그런 순간을 빨리 만나건 늦게 만나건 혹은 만나지 못하건간에, 그저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멘트를 떠올려달라. 축하한다. 당신은 이제 더 나은 구애를 위해 끊임없이 황야를 떠도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같이 눈에 불을 밝히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더이상 그 무수한 밤들을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래라 하며 지샐 필요가 없다. 물론 이제 새로운 유형의 번뇌들이 생겨나겠지만, 우선은 그 울렁증 일어나는 폭풍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번뇌야 뭐. 번뇌가 없는 삶이란게 어디 존재하기나 하겠는가. 이 말을 말이다. 아니, 다 잊더라도 그냥 그 축하의 말 한마디는 기억해두길. 축하한다. 진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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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기 좋은 비오는 날에 관하여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비내리는 날은 햇빛이 맹위를 떨치는 날보다야 훨씬 연애하기 좋은 날인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우산 쓰세요 우산 씌워주세요 하는 작업의 정석 3-2장 28P 4번째줄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한 우산 아래에서 오버하여 상대에게 우산을 기울임으로써 일부러 흠뻑 젖은 어깨죽지를 노출하는 전략으로의 스무스한 이동은 얼마나 무수한 청춘남녀가 써먹었던 방법인가. 보라. 한 우산 아래라는 공간만큼 좁은 공간에서,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붙어있을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무수한 멜로영화에서 등장하는 한 우산 씬은 얼마나 풋풋한 청춘남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였는가. 수줍은 듯 우산속으로 뛰어들어와 가볍게 팔짱을 끼는 여성으로 인해, 그 팔에 와닿는 아찔한 감촉으로 인해 의식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남성들은 우산이란것이 발명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겠는가. 우산 아래 로맨스의 정점을 찍는, 슬쩍 우산으로 가려진, 하지만 분명 키스씬이 벌어지고 있을거라 예상되는 그 우산 너머는 얼마나 또 무수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던가.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살짝 풋사과는 벗어난 시점의 청춘남녀들이라면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절로 입에 군침이 흐르게 되는 파전과 동동주 한잔이나 빈대떡과 소주 한잔같은 저렴하지만 분위기로 인해 맛이 적당히 보정되어버리는 술자리 데이트를 무척이나 쉽게 기획할 수 있을 것이며 오너 드라이버인 남성이라면 햇볕 쨍쨍한날보다 두배는 쉽게 '바래다 드릴게요'라는 멘트의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평소에는 듣지도 않는 음악을 틀어주며 분위기 한번 잡아보려 해본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우산도 차도 없는 맨발의 청춘이라고? 무슨 문제겠는가. 역시나 무수한 로맨스 영화들에서 검증된 솔루션, 자켓 벗어 머리에 덮어씌우고 함께 뛰어가기 같은 얼마든지 응용 가능한 솔루션들이 있지 않던가! 심지어 '비 좀 잦아들면 움직이자' 와 같은 속 뻔한 멘트들까지도 살려주는것이 비오는 날인 것이다! '오빠 믿지? 잠깐 쉬어가자' 와 같은, 할아버지 세대들부터 사용해온 개구라도 통할 확률이 높아지는 날. 바로 비오는 날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연인들에게 이렇게 고하노니. 비온다고 짜증내지 말고,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는 마음으로 뜨거운 데이트를 즐겨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조리 말려버릴 듯한 기세의 뜨거운 키스는 어떠할까.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것은 우산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줄 사람이다라는 말을 증명하라! 비오는 날엔 더 촉촉한 데이트를! 그것 또한 청춘의 로망중 일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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