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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6 다면성에 관하여 8
  2. 2010.08.04 미래지향적 사고에 관하여 6

다면성에 관하여


사람은 다면체다.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단면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단면은 살아가며 겪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어느 순간에 생겨날 수도 있다. 한 사람을 두고 볼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면들을 다 파악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이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단면들에 대해 100% 파악하였소 한다면 나는 그를 달인이나 도인으로 부를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얌전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광적인 키보드 워리어로 변신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다면성의 표출은 오히려 상식선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저 사람의 내면에, 어떤 무수한 단면들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그저 어림짐작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정도일 뿐.

타인의 다면성은 그렇다 치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히나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단면에 대해 새로이 깨닫게 되는 순간이란건 사실 불행하게도 좋은 상황보다는 달갑지 않은 상황일 경우가 확률적으로 더 많다. 우리가 가끔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지 혹은 하고 있지 하며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상황같은 것들 말이다. 거듭되는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단면일 뿐이라고 종종 말하곤 하는데 적어도 나의 믿음은 그러하다. 스스로의 못난 부분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하나의 모습,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마 스스로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또 하나의 나라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어쨌든 그렇게 의도치 않은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그 전까지는 몰랐던 스스로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부정하려 들지 말라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하나의 단면이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고스란히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당신이 설령 치명적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떤 단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엔 놀랍게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단면을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각보다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스스로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단면에 대해서 오히려 애정을 가지는 사람을 만날수도 있다. 자신의 못난 부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외면하려 하거나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부족한, 못난 단면들은 당신을 집요하게 괴롭힐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이 잠시라도 그것들에 대해 경계를 늦출때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골치아픈 문제들을 일으킬것이다. 당신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그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어떤 단면을 들킬수도 있다. 그러한 자괴감은 또다시 마이너스적인 에너지로 작용하여 당신의 그 못난,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복잡한 각도로 비틀어놓을 것이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될수록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장점들을 꺼내보일 수 있는 기회들을 점점 놓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부족한 면을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나긴 삶의 전체로 보았을때, 지금 이순간에라도 스스로가 가진 그런 부족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오히려 운이 좋은 일이다. 어떤 병이건 늦게 알수록 고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간단한 예를 들어, 스스로의 술버릇을 명확히 알고 있는 이라면 적어도 미래의 장인 장모님을 뵈러 간 자리에서 술에 취해 노상방뇨를 하거나 식당에서 난동을 피우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무수한 나를 하나 둘씩 알아가는 것은, 지금 당장에야 이따위것 알고 싶지 않았어 하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생각한다면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때때로 즐겁고 우습기까지 하지 않던가. 

만약 당신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당신 속에 있는 반짝이거나 거무틔틔한 어떤 단면들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의 삶은 조금 더 수월하게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한 신의 선물이다. 당신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얼마나 무수한 단면들이 존재하건간에, 당신은 스스로 나이고 싶은 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Default 설정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삶의 굴곡속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단면들이,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며 때때로 스스로 원하지 않은 단면들이 튀어나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는 어떻게 살아가려 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당신의 내면에 굴러다니고 있는 그 다면체는 어느샌가 제자리를 찾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다. 분명히 말이다.

미래지향적 사고에 관하여

사람이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지 -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와중에 툭툭 던져놓곤 했던 말이다. 대충 그렇게 뭔가 머리속에 들어있던 이야기들을 꺼내게 된것이 고등학교 시절 이후니까 대충 처음 그런 이야기를 했던것도 그쯔음일 것이다. 스스로가 그렇게 미래지향적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노릇이지만 어쨌든 시건방지게도 저 말을 많이도 했었더랬다.

재미있는것은 처음 그런 생각, 그런 말들을 하게 된 이후로 십수년이 지나는동안 그렇게나 많이 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 말을 입에 올렸을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지금 그 말을 할적에 담고 있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무게와 의미가 완전히 다른, 그 말의 근간에 흐르는 어떤 내면의 무언가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얼마전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로 이렇게 정리해서 남겨본다.

오래전 그 시절들과 현재의 개인적인 미래지향주의가 달라진 부분은 간단히 말해 이런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완전히 달라졌다는것. 어린 시절, 사실 몇 해 전까지의 나는 그랬다. 스스로를 돌아볼적에 부족한 점, 못난 점이 너무도 많았고, 스스로에 대해 아 이정도면 좀 쓸만하지 않음? 과 같은 부분이 전무하다시피 했던것. 지금 돌아봐도 그 시절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겪어온 자존감 부족이었던 것이랄까.

그러니 당연스럽게도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볼적이면 그 시절의 나는 언제나 못나고 부끄럽고 지금도 모자란데 더 모자랐고... 결국 그 시절의 미래지향주의란 것은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수동적 측면의 것이었다는 얘기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제도 부족했고, 오늘도 부족한데,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부족할거라면 살아갈 의미가 없어라는 극단적 생각까지 가지 않았던것이 신기한 노릇이다.

어쨌든 그렇게, 지난 무언가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억지로 앞을 향했던 것이 그렇게 썩 긍정적인 무언가만을 가져다주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앞을 바라보면서도 뒤를 두려워했고, 작고 큰 실패를 할때마다 지난 과거의 부족했던 모습들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것이 아닐까 하는 강박에 가까운 질책을 스스로에게 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그만큼의 불안정함과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어쩌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을 그림같은것으로 표현한다면 이럴 것이다. 절뚝거리며, 다리를 질질 끌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달리다 멈추다를 반복하며 기껏 달렸는데 얼마 가지도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 그런것이 아닐까.

어느 시점부터 그런, 과거의 못난 모습들마저 그저 나의 일부, 살아온 과정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는 조금씩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정말로 그저 웃으며 그땐 그랬지, 그래도 그때도 이런건 내가 좀 - 이란 우스개를 할 수 있는, 과거의 일을 얘기하며 짖궂게 놀리는 친구들에게 어쨌든 즐거웠잖아? 라고 능글맞게 넘겨버릴 수 있는. 스스로의 부족함에 집착하기보다는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 것인가에 더 몰두하는 그런 식의 변화들이 삶에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과거에 대해 썩 예쁘게 바라보진 못하고, 가끔 스스로의 부족함에 한심함까지 느끼곤 하지만 예전같지는 않은. 천천히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급함은 적당히 내려놓을 수 있는 상태.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똑같이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등지고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건지, 어떤 것을 딛고 올라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불확실성의 세계속에서 어느정도는 든든한 기분까지 들게 된다는것.

글을 맺으며 내리는 결론은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는 없고, 모두 스스로가 바라보는 방향이, 겪어온 과정도 다를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진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스스로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일련의 애정들은 가져보는것이 좋을것이다. 그 모든 자신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의 자신또한, 당장 몇분 후면 금새 과거의 나로 남겨질것이다. 가끔은 그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며, 그래도 수고했어 - 하며 어깨라도 툭툭 두들겨주는 것은. 바톤 터치다, 이제 간다 - 라고 외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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