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면성에 관하여


사람은 다면체다.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단면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단면은 살아가며 겪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어느 순간에 생겨날 수도 있다. 한 사람을 두고 볼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면들을 다 파악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이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단면들에 대해 100% 파악하였소 한다면 나는 그를 달인이나 도인으로 부를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얌전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광적인 키보드 워리어로 변신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다면성의 표출은 오히려 상식선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저 사람의 내면에, 어떤 무수한 단면들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그저 어림짐작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정도일 뿐.

타인의 다면성은 그렇다 치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히나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단면에 대해 새로이 깨닫게 되는 순간이란건 사실 불행하게도 좋은 상황보다는 달갑지 않은 상황일 경우가 확률적으로 더 많다. 우리가 가끔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지 혹은 하고 있지 하며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상황같은 것들 말이다. 거듭되는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단면일 뿐이라고 종종 말하곤 하는데 적어도 나의 믿음은 그러하다. 스스로의 못난 부분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하나의 모습,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마 스스로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또 하나의 나라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어쨌든 그렇게 의도치 않은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그 전까지는 몰랐던 스스로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부정하려 들지 말라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하나의 단면이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고스란히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당신이 설령 치명적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떤 단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엔 놀랍게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단면을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각보다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스스로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단면에 대해서 오히려 애정을 가지는 사람을 만날수도 있다. 자신의 못난 부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외면하려 하거나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부족한, 못난 단면들은 당신을 집요하게 괴롭힐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이 잠시라도 그것들에 대해 경계를 늦출때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골치아픈 문제들을 일으킬것이다. 당신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그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어떤 단면을 들킬수도 있다. 그러한 자괴감은 또다시 마이너스적인 에너지로 작용하여 당신의 그 못난,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복잡한 각도로 비틀어놓을 것이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될수록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장점들을 꺼내보일 수 있는 기회들을 점점 놓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부족한 면을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나긴 삶의 전체로 보았을때, 지금 이순간에라도 스스로가 가진 그런 부족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오히려 운이 좋은 일이다. 어떤 병이건 늦게 알수록 고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간단한 예를 들어, 스스로의 술버릇을 명확히 알고 있는 이라면 적어도 미래의 장인 장모님을 뵈러 간 자리에서 술에 취해 노상방뇨를 하거나 식당에서 난동을 피우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무수한 나를 하나 둘씩 알아가는 것은, 지금 당장에야 이따위것 알고 싶지 않았어 하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생각한다면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때때로 즐겁고 우습기까지 하지 않던가. 

만약 당신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당신 속에 있는 반짝이거나 거무틔틔한 어떤 단면들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의 삶은 조금 더 수월하게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한 신의 선물이다. 당신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얼마나 무수한 단면들이 존재하건간에, 당신은 스스로 나이고 싶은 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Default 설정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삶의 굴곡속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단면들이,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며 때때로 스스로 원하지 않은 단면들이 튀어나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는 어떻게 살아가려 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당신의 내면에 굴러다니고 있는 그 다면체는 어느샌가 제자리를 찾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다. 분명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