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여'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3.12.02 내 낡은 겨울 코트에 관하여 2
  2. 2013.07.29 신념에 관하여
  3. 2011.10.04 소문에 관하여 2
  4. 2011.08.16 이해에 관하여 10
  5. 2011.03.15 독설가에 관하여 2
  6. 2011.03.14 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4
  7. 2011.03.09 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2
  8. 2011.03.07 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6
  9. 2011.02.22 두려움에 관하여 4
  10. 2011.02.14 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2

내 낡은 겨울 코트에 관하여

사춘기 시절의 가정환경과 아버지의 영향으로 물건에 대한 집착이라는건 거의 없다시피 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애착이 가는 것들이란건 있게 마련이다. 또, 사람마다 어떤것에만큼은 유난히 집착하거나 하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나의 경우에는 그게 옷이란 얘기다. 마치 옷은 새 것이 좋고 - 를 몸소 반증이라도 하듯 마음에 쏙 드는 옷 같은 경우에는 너덜너덜해져서 더이상 입고 다니다간 거지라 의심받겠다 싶기 전까지는 주구장창 입고 다니기도 하거니와 이미 충분히 너덜해져서 아마 다시는 걸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매번 옷장에서 꺼내 내놓았다가 그래도 한번쯤은 - 하고 도로 옷장에 넣어놓기가 일쑤인 것이다. 


물론 거기엔 개인적인 웃지 못할 이유도 한몫 함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테면 쓸데없이 지나치게 길고 그에 비해 예전보다야 살이 쪘다고 한들 여전히 누가 봐도 처음에는 말랐네 - 를 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엿가락 같은 체형 말이다. 좀처럼 길이에 잘 맞으면서도 지나치게 허수아비같지 않고 적당히 몸에 잘 맞는 옷을 찾기가 힘들어 야 이건 꼭 맞는데?(혹은 안 짧아보이는데?...) 하는 옷의 경우에는 다른 옷들보다 착용 횟수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 아버지의 옷장 습격을 받아 버려졌지만 여전히 기억에는 미련으로 남아 있는 옷들도 있다. 고2,3을 함께하고 대학시절 초반 이런저런 이유로의 노숙들을 함께했던 전신을 다 감싸는 농구 코트라거나(이건 정말 지금 찾아봐도 쉽지 않은 길이일게다) 담배빵을 한 세군데 당하고도 꿋꿋이 지켜냈었던 고교 시절의 츄리닝이라거나 하는 옷들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단순히 옷이 잘 맞는다거나, 잘 어울린다거나 하는 이유만으로 옷에 대한 어떤 이상 애착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단순히 그 옷을 오래 잘 입었고 이런 이유보다는 반대로 그 옷들을 자주 입고 다녔기에 어떤 순간의 기억을 그 옷과 함께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적합할 것이다. 이를테면 위에서 얘기한 내 생애에 가장 길었던 농구 코트는 첫사랑(이라기보다 첫 연애)의 종언을 나와 함께 맞이하며 한겨울 춥고 추웠던 지하 주차장에서의 노숙에서 나를 지켜주지 않았던가!!! 담배빵이 세번 난 츄리닝은 생애 처음으로 동대문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맞춘' 유니폼이 아니던가! 그러니 어쩌면 그건 어떤 특별한 이유보다는 자연스러운 서사에 가까운 거다. 잘 맞는다 > 즐겨 입는다 > 많이 입는다 > 많은 기억을 공유한다 와 같은 말이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사라져버린 옷가지들이었지만 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여름에 농구코트를 입고 탈출이라도 했을것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전우여... 아 여기까진 아닌데.


오랫만의 포스팅에 왠 쓸데없는 옷얘기로 광분이냐면, 바로 어제 또, 욱씬거리는 과거가 진득하게 들러붙어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녀석 하나와 이별하게 되어서이다. 생각해보면 처음 샀을적부터 대단히 고난과 역경을 많이 겪어서 수명은 이미 두어해전에 다했던 녀석이다. 정확히 기억하건데 2006년 10월에 산 겨울 코트다. 옷을 아낀다 한들 그닥 뭐 옷을 꼼꼼히 제대로 관리하거나 하는 인간은 아닌지라 눈비를 하도 맞은데다 그걸 그대로 방치한 덕에 버클이며 단추의 녹이 여기저기 묻어 있고, 무슨 털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엔 하얀 백호의 털처럼 맵시를 뽐내며 지퍼 경계를 장식하던 털들이 이젠 원래 동네 누렁이 털이었던 것처럼 변색되었고 본래 색깔이 그렇다고 주장하기엔 5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이미 등판이며 팔이며 어디며에 탈색의 흔적이 역력하다. 더욱이 치명적으로 뭔 땅을 기어다닌것도 아닌데 이리저리 쓸린 소매는 너덜너덜하여 정말로 수명을 다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실은 2년전 신혼집으로 옮겨올적부터 작년에 겨울옷을 꺼낼때, 올해 초 다시 겨울옷을 정리할때, 이미 여러차례 끄집어내어 이제는 작별을 고할 때가 왔구나 하며 현관까지 내놓았었던 녀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어제까지도 작별을 고하지 못한 건. 


그렇게도 괴로운 시절에 나를 지켜주었는데. 그 옷을 입고 빛을 품었던 적도 있었는데. 하는, 옷장을 열어 한자리를 두둑히 차지하는 녀석을 볼때까지는 이제야말로 자리를 비워줘야 할 때다 - 라고 호기롭게 꺼내들다가도 그 진득한 세월의 흔적들을 보면 어쩐지 약해지는 마음에. 


사랑을 잃고 늙은 개처럼 도망쳐간 강원도에서, 그렇게 징그럽게도 퍼붓던 눈발 속에서, 한겨울의 바닷바람과 모래사장에 질퍽하게 녹아내린 눈, 허옇게 일어나던 파도 거품밖에 없던 겨울 바닷가에서, 죽자는 심정으로 술을 퍼마시고 몸을 가누지못해 널브러지던 어느 눈밭에서. 녀석은 한결같이 나를 지켜주었는데 - 라는, 누가 보면 참 몹시도 손발이 오그라들지 모르는 몹쓸 감상이 일어 차마 그간 이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만치나 나이를 먹은 지금에 와서도 떠올리면 가슴이 울컥해지는 그 괴로웠던 순간들에 항상 내 몸과 함께였던 너를 버리는게 어쩌면 차마 하면 안되는 짓 같다는 생각으로 이미 세탁을 맡겨 봐도 더이상 새로워질 수 없는 너란걸 알면서 괜스레 겨울옷 사이에 슬쩍 끼워 맡겨보기도, 현관에 나와 있는 녀석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도로 집어들어 옷장속에 구겨 넣기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수명을 다한 어떤것들을 끝내 붙들고 있는 것이, 외려 또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예우는 아님을 알기에. 


이번에도 겨울옷을 정리하며, 아내님의 손에 의해 현관 앞에 나와있던 옷무더기에서 녀석을 보고 또 한참을 망설였었더랬다. 근 일주일간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애써 모른척 하기도 했었더랬고, 어떻할까 묻는 아내님의 말에 한번은 '에이, 날씨 궂은 날 한번쯤은 더 입을 수 있지 않을까?' 란 궁색한 핑계를 대며 마지막으로 한번 걸쳐 입어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 이란 맘이 들었지. 어차피 내 지난 어떤 옷들처럼 내 기억속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오래토록 있을 것인데, 한때는 제법 근사한 모습을 자랑했던 녀석을 더이상 남루함이란 이름으로 기억되게 하는것도 몹쓸 짓이다 생각이 들어서. 다행히도 못내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에이 이제는 정말 못입겠다 - 라고 하는 말에 마음을 읽은건지 아내님이 얘기했지. 그거 내피는 아직 괜찮은 것 같은데? 내피는 남겨두자 - 오, 묘안이로세. 


그래서, 이제는 깔깔이처럼 내피만 덩그러니 남겨진 내 낡은 겨울 코트와, 그리고 그 진득했던 슬픔의 기억들과 이제는 바이 짜이찌엔하게 되었다는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남겨보는 얘기다. 하기사 뭐, 옷을 버린다고 그런것들이 버려지는 것들이었다면 진작에 모조리 버렸을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함께 해준 내 오랜 벗 - 에게 안녕을 고하며 이정도의 글은 남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가며 짊어지고 갈 기억들에 낡은 코트 한벌 걸어둘 자리가 없겠는가. 도로 추운 계절이 왔다. 오늘도 누군가의 기억들과 더불어 그 한기와 괴로움들을 함께 이겨내고 있을 누군가의 옷들에게 경의를. 그리고 빛을 안고 있을 어떤 옷들에게도. 늙은 감상쟁이는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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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 관하여

신념의 옳음은 무엇으로 증명할까?


정치, 사상, 종교... 매일같이 무수한 신념의 충돌들이 일어나는 세상이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라면 적거나 많거나의 차이일 뿐이지 매한가지다. 오늘도 세계의 어딘가에서는 저 신념의 충돌이란 것으로 매일같이 피비린내가 자욱하다. 물론 단순한 신념의 충돌만이 아닐 게다. 허나 이득을 위해 일어나는 충돌의 경우에도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이득을 취해 너보다 잘살겠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으니 그 또한 따지고 보면 신념의 충돌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그 무수한 순간에 매번 상대의 목을 따거나 폭탄을 끌어안고 적진으로 돌격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탕수육 소스를 부어먹느냐 찍어먹느냐를 가지고 싸우다가 탕수육 대신 상대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니가 옳으네 내가 옳으네를 가지고 다투지 말고 서로의 신념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는 찍어먹고 나는 부어먹으니 주방장 요리 나올때 반반씩 갈라 주시오 하는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게다. 이거야 뭐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먹을만한 일반론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니 그렇다 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것이 반드시 옳기에 반드시 누군가들에게 관철시켜야 하고,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것이 옳은 것이다 라고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믿는 신념이 있다면 어떨까?


이건 단순히 내 생각일 뿐이지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일단 오래 살라고. 오래오래 살면서 스스로 그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이 굉장히 모두를 위해 좋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라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과도 끈질기게 소통해나가면서, 그것의 옳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들을 보완해 나가면서, 하나씩 둘씩 동조하는 이들을 만들고 무리를 이뤄나가면서. 또 그렇게 구성된 무리가 그 신념을 무리 밖의 사람들에게 너무 급하게 강제하거나, 무리 밖의 사람들을 배격하거나 하게 되는지 경계하고 또 경계하면서. 그렇게 스스로의 삶 자체를 하나의 신념으로 가득 채워 끝내 너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어떤 이들까지도 너의 그 신념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할 정도로. 변치 않고 오래오래 끝까지, 많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지금 당장보다는 천천히, 하지만 더 끈질기고 강하게.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묻건데, 인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이제 와서야 모두가 믿는 어떤 이들의 신념들중에, 그것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광신처럼 번져서 천지개벽처럼 이뤄진 것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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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관하여


소문이 좋지 않았던 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주변에서 뭐하러 만나느냐고 말을 들었다. 약속을 했으니 봐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랬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소문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꺼내봐야 좋을 것이 없다 생각이 되어 꺼내질 않고 있었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더랬다. 무척이나 말끔하게, 소문의 일부가 사실임을 인정하고 어떤 부분들은 억울하기도 하지만 본인의 잘못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라 하였다. 그러냐고 웃으며 이야기하고, 살며 한번 실수정도 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느냐며 위로를 건네고 돌아왔더랬다. 워낙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었던지라 더 가까워질 수는 없었으나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꽤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도 생각을 한다. 

소문이 영 좋지 않게 났던 적이 있었다. 소문이 증폭되는 과정을 리얼타임으로 듣다보니 영 억울하고 분한 부분이 없지 않았는데 사실 또 따져보면 그런 소문이 나게 된 책임도 스스로에게 영 없지는 않았던지라 그저 입을 다물었더랬다.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면 사실은 귀찮았더랬다. A-B-C-D 이런 식으로 소문이 흘러가며 A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 한뭉터기, B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 한뭉터기, C의, D의... 이런 식으로 소문이 무슨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꿈틀대며 몸집을 불리는데 그 와중에 뛰어들어 이놈 저놈 붙잡고 이건 아니고 이건 맞고 설명하기 귀찮았더랬다. 어차피 모조리 내 사람이 될 이들도 아닌데 알아서 떨어져 나갈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남을 사람은 내게 묻겠지라고 생각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더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건 예상처럼 그리되었더랬다. 

누군가가 굉장히 악의적인 소문을 내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를 만나게 되었더랬다. 굉장히 놀라웠던 것은 무엇 하나, 그 소문이 그렇게 쉽게, 더 독하게, 악의적으로 번져나갈 수 있을만한 성격이 아니었던 거다. 그것은 지나치게 엉성하고, 뜬금없고, 좀처럼 믿어질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확실하게 한 사람을 압사시킬 정도로 부풀려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다수의 이득'이었다. 한 사람을 그렇고 그런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 인해 꽤나 많은 이들이 집단의 소속감이라거나, 동지애라거나, 선의의 피해자란 타이틀이라거나, 뭐 그런 식의 다양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더랬다. 정확하게 그 이유만으로 소문은 괴물이 되어 한 사람을 짓밟았다. 나는 우선 도망치라고 권유했더랬다. 그렇게,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문이란 괴물을 키워낸 집단으로부터. 그 뒤로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잘 도망칠 수 있었기만을 빌 뿐이다. 

이런저런 삶의 과정속에 소문이란 것에 대해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뿐이다. 때로는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는 말이 들어맞을 때도 있고, 모든 소문이 근거없는 헛소문이기만 한것도 아니다. 가끔은 소문의 순기능 덕분에 어떤 사람들이 좋지 못한 경험을 모면하기도 하고, 그것이 천만 다행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단 한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때, 그 선택이나 판단의 기준이 [소문]만 가지고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그것을 기반으로 스스로 그 상황, 그 사람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하고 직접 경험해보고 부대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사회의 많은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의 무엇도 없이 단지 어딘가에서 듣게 된 [소문]만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고 재단하고 결정짓는다. 그래서 오늘도 이 사회 어딘가에선 사람들이 키워낸 그 소문에 소리소문없이 짓밟혀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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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에 관하여


안타깝게도, 사람은 나 아닌 다른 사람 -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이나 행동 등을 포함한 모든 것 - 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 그렇게, 나 아닌 다른 개체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났다면 오늘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비극들은 절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듯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의 사람은 그 자체로 온전히 하나의 우주와도 같다. 어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우주의 신비를 밝혀낸다는 것과 동급으로 둘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굉장히 자주, 타인들과의 어떤 관계속에서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좀처럼 잘 이해해낼 수 없다. 분명히도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작 스스로가 이해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타인에게 '당신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에 접하곤 한다. 그것은 또 누구나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은 무척이나 달콤한 위로의 말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이해받지 못함으로 인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그 말은 설령 그 말을 100%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순간적인 위로가 될 수 있다. 또 많은 경우에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위로다. 몰이해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아쉬우면 니가 날 이해시켜 보시던가'하는 말따위를 내뱉는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허나 그러한 순간에조차 나는 당신이 쉽게 누군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데 조심스러워 할 수 있기를 권한다. 그 이유는 그런 어설픈, 섣부른 판단들이, 타인을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의 그 판단들이 불러올 수 있는 해악들이 생각보다 더 크기 때문이랄까. 

예를 들어 A와 B가 비슷한 연애를 하고 비슷한 실연을 경험했다. 과연 A는 B가 느끼고 있는 슬픔의 크기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어떤, 굉장히 유사한 상황에 직면한 굉장히 비슷한 점이 많은 두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황의, 그리고 개개인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그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들과 그 상황을 대처해나가는 방식, 그 경험을 통해 얻는 것들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하지만 종종 우리는 쉽게 어떤 슬픔에 대해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으니 나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게다가 놀랍게도 그런 순간에, 어떤 사람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확신'을 갖는 순간에 많은 이들은 굳이 발휘할 필요가 없는 오지랍을 발휘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너를 이해해, 그러니 너는 내 말대로 하면 될거야'와 같은 요상한 논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그것은 이해의 탈을 쓴 폭력이지 이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그런, 이해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것에 굉장히 근거없는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려든다. 

그리고 그런 식의 어설픈, 반토막도 되지 않는 이해들은 오히려 사람과 사람을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고 서로를 더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런저런 푸념을 하는 연인에게 고등학교 선생님처럼 딱딱한 말투로 훈계를 늘어놓은 남자는 분명히 상대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이해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겠지만 사실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어설픈 이해가 만들어낸 어떤 틀 속에서 상대를 가둬두고 그 틀에 맞춰 상대를 해석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이해란 오히려 무지만 못하다. 아예 모르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려고 노력하게 마련이지만, 내가 그래도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이있게 알아가려고 좀처럼 노력하지 않는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 

결론은 이런 것이다. 타인이 느끼는 어떤 감정들에 대해 동조하지 말라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건간에 어떤 사람이 느끼는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 오케이, 이해했다고 스스로 단정짓는 것을 피하라는 이야기다. 당신의 그 믿음이 크면 클수록 당신은 그 이해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어떤것들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인하려고 들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에 이해하고 싶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 대상에 대한 스스로의 호감 때문이라면 당신은 오히려 '쉬운 이해'들을 경계해야 한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을 들여가며 하나씩 둘씩 상대의 그 모든것들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고, 상대의 변화에 발맞춰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수정하고 보완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란것은 결코 한순간에, 단박에 완전히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설령 당신이 독심술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덧붙이자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인류 공통의 소망이겠지만 너무 그 이해에 목매달지 않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좀 더 유리할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누구도, 이해받기만을 바라는 사람을 이해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당신이 타인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거듭해갈 수록 당신 역시도 누군가들에게 이해받을 가능성들이 열려갈 것이란 얘기다. 세상의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등가교환의 법칙 아래서 동작하고 있다면 이해 역시 그러하다. 언젠간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이해를 얻게 되길 빌며 비오는 화요일에 적는다. 나 또한 여전히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누군가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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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가에 관하여

사람들은 '나의 편'인 독설가에게 쉽게 열광하지만 그만치 '남의 편'인 독설가를 쉽게 증오한다. 정확한 수치로 통계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어떤 독설가의 말에 묻어있는 맹독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와 반대편 이들이 그 독설로 인해 입는 상처와 분노, 증오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지 않을까 하고 짐작한다. 그래서 독설가는 그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으면서도 사실 사회에서 좀처럼 자리잡기 어렵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설가가 스스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굉장히 편향된 시선과 더 반대편을 향한 더 극단적인 말을 함으로써 우군의 열광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정치판을 보라. 시정잡배만도 못한 독설을 날리는 이들이 얼마나 그들의 우군에게 확고한 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또 재미있게도 그것이 독설가가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딜레마가 된다. 사람은 자극에 금새 적응한다는 걸 잊지 말자. 독설가가 자신의 말에서 독을 줄이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우군이었던 이들에게 '심심하다'거나 '말랑말랑 해졌다' 혹은 '사람이 변했네'와 같은 시선들을 받게 될 것이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서는 더 치명적인 맹독을 품은 말들을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대단히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독설에 열광하는 것은 극히 찰나의 순간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독설로 인해 열광했던 사람들, 그 열광의 크기가 컸던 사람일수록 그 독설을 누가 했는지조차 기억 못할정도로 빠르게 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바로, 그 독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독설로 인해 상처입은, 그 독설가의 '적'들이란 얘기다. 독을 버리는 순간 그는 우군에게서 잊혀질 것이고, 적들에게만 기억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세상엔 언제라도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독설가가 존재한다. 세상이 얼마나 독한 세상인가.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어떤 집단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독설가로 사람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당신은 언제나 남들보다 조금 더 경계하고, 조금 더 스스로의 컨셉을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사람들의 열광에 들떠 스스로의 말에 독을 바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그건 최악의 어리석은 짓이다. 항상, 항상 스스로에게 주지시켜라. 사람들은 당신에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 대신에 누군가에게 험한 말을 해줄 누군가에게 열광할 뿐이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우둔하지 않다. 특히 집단 안의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무리를 이루었을때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쉽게 비열해지고, 죄책감을 쉽게 타인에게 전가한다. 당신의 독설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라. 그래야 언제고 나 홀로 벌판에서 바람 맞고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경우는 피할 수 있을 것인즉. 그리고 조금씩, 주위에서 뭐라건간에 스스로의 말에 담긴 독들을 조심스레 거둬들여봐라. 생각보다 독한 말이 아니고서라도 당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물론 쉽고 빠르진 않겠지만. 또 한번 품은 독을, 그렇게 쉽게 걷어내기도 어렵겠지만.

허나. 다 필요없고, 난 원래 생겨먹은게 이런 놈이니까 죽을때까지 독설을 퍼부어주마 한다면... 괜찮다. 죽을때까지 독하게 살아라. 어쨌든, 그것도 나름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스스로의 삶을 희생시키는 길이 될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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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자유에 관하여

감정을 느끼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강제할 권리를, 또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왜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빽빽거려봐야 원하는 사랑을 얻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고, 바퀴벌레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바퀴벌레도 우리 친구지예 하며 백날 떠들어봐야 바퀴벌레에 대한 극적인 호의를 얻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것은 자유 이상의 영역이다. 사회나 조직에서 그 구성원의 감정에 대한 어떤 강제적인 통제를 시도했던 경우, 인류의 역사에서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생각보다 끔찍한 재앙을 불러왔다. 때문에 누구도 누군가의 감정을 스스로의 어떤 목적에 의해 강제하거나, 자신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많은 경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대단히 중요한 가치로 존중받게 마련이고, 그렇기에 어떤, 대단히 보편적 정서에서 벗어나는 감정의 표현들조차 자유의 영역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리는 거리에서 대통령 개새끼라고 외칠 자유가 있으며(그것이 어떤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동물애호가를 앞에 두고 보신탕 예찬론을 펼 자유가 있다. 물론, 스스로의 감정이 외부로 표현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무수한 관계와 '사회'의 어떤 도덕률, 관습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감정의 표현이 그 자체만으로 어떤 법적인 제재같은 것을 받는 경우는 사실 반대의 경우에 비해 드문 편이다(물론, 여전히 이 사회는 그런 표현의 자유에 대해 특정 부분에 있어서는 꽤나 인색하다).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때,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좋은 세상 아닌가.

하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에겐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귀중한, 침묵의 자유가 있음을.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때때로 천마디의 말보다 더 좋은,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당신은 이웃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참사 앞에서,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건 모르겠지만 그 나라에 우상이 이번 기회에 파괴되길 바란다거나, 과거에 잘못을 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는 거라거나, 다 모르겠고 쌤통이네 따위의 이야기를 물론 할.수.도.있.다. 그 자체만으로 당신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욕을 먹을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최소한 당신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고, 당신의 말 한마디는 단순한 '개드립'이란 말 한마디로 규정지어져 어느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게 될 것이고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조롱과 개무시를 당하게 될 것이다. 다만 당신이 키보드 한번 두드릴 시간 정도의 침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피할 수 있다. 어째서 그 짧은 침묵을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욕을 먹기를 자청하는가?

놀랍도록 발전한 기술들은 우리가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 표현들이 더 빠르고 널리 공유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 나라 정치인 한명의 개드립이 삽시간에 지구 반대편 국가에서 조롱거리가 되는건 더이상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더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우리는 무엇을 말할 자유도, 말하지 않을 자유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죽음앞에 애도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누가 당신을 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압도적인 슬픔에 몸부림치고 있을 어떤 '사람들' 을 위해 당신은 최소한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 쉬운, 빠른, 그리고 효과적이 애도다. 부디, 한마디 한마디에 더 신중을 기할 수 있길 바란다. 최소한, 스스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또 '사람들'과 함께 공존해나가고 싶은 의지가 분명히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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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기술에 관하여


동기부여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에게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거짓말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에 대해 그 거짓말이 간파되었을 경우에 일어날 상황, 거짓말이 간파될 위험성까지를 포함해서 계산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하고 있는 세세소소한 거짓말들 - 예를 들어 약속시간에 늦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교통체증이라던가 - 이 들통나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은 많은 경우에 어렵고 불편하다. 친구와 밤새도록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중간에 흥을 깨기도 싫어 네 전화를 무시했다고 말한 후 화가 난 여자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보다 일찍 잠이 들어 진동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것이 훨씬 쉽고 편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익숙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로 인해 당신이 얻었던 이익이 작으면 작을수록, 당신은 곧 당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거짓말은 들통난다. 만약 당신이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거짓말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과 거짓이 들통났을때 당신이 입게 될 손해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지시켜라. 때로는 조금 부풀려 생각을 하는것도 좋다. 거짓말의 '성공'이 그것이 밝혀지지 않게 하는데 있다면, 성공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강력한 동기부여다. 비단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스스로에게 충분히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말해야 할 거짓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 결정된 거짓에 디테일함을 구성해 보는거다. 야근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상가집 누구의 상가집에 몇시까지 누구와 만나 가기로 했으며 상가집에서 만나게될 사람들은 누구누구가 있고 고인의 사인은 무엇인지까지. 거짓의 디테일을 구성할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디테일에 포함시키면 안된다는 것이다. 거짓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당신이 경험해본, 당신이 알고 있는, 익숙하게 술술 읊어댈 수 있는 범주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고인의 사인에 대해 교통사고라고 얘기하려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프로세스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사고에 관련된 보험, 교통사고 처리 전문 병원, 교통사고로 인해 죽은 사람의 사인... 등등의 지식들은 당신의 거짓말을 더 생동감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평소에 익숙치 않았던, 거짓말을 위해 '공부'한 것들을 거짓의 디테일을 꾸밀적에 사용한다면 정작 거짓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 기억이 안나서 더듬거리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스스로의 기억력을 과신하지 말라. 만약 이 과정에서 그 디테일을 구성하기 위해서 당신이 공부하거나, 미리 알아놔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된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거짓을 찾으라. 이를테면 부모님 생신과 같은 것은 일년에 두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곤 디테일을 구성하기에 아주 편한 거짓이다. 최소한 당신은, 부모님이 뭐라시던데? 라는 질문에는 당신이 너무나 지겹도록 들어온, 랩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법한 일상의 부모님 잔소리를 좔좔 읊어댈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거짓을 말해야 할 지 정해지고, 그 거짓말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게끔 디테일한 수준까지 구성된 후라면 그 거짓말을 하기 전의 준비 단계를 거쳐야 한다. 스스로 준비해 놓은 거짓말의 완벽함에 우쭐해하며 들뜨는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다. 당신은 사기꾼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단 한번의 큼지막한 거짓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자잘한 수백가지의 거짓말들로 스스로의 행동을 꾸며낸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공이 들어간 거짓말일 수록 탄로날 확률이 적다. 오늘 저녁 상가집 거짓말을 하려고 한다면 아침엔 검정 넥타이를 매고 가는게 기본인거다. 평소에 바퀴벌레 기어가는 소리에 잠을 설쳤네 하는 사람이 유난히 그날만 진동소리를 듣지 못하고 잠들었다고 말한다면 개가 웃을 일인 거다. 전설의 거짓말장이인 카이저 소제를 보라. 당신은 절룩거리며 걸어야 한다. 오늘 친구와 술약속이 있고 내일 오전에 출근하기 힘들 것으로 보여 내일 오전의 핑계거릴 찾아야 한다면 최소한 오늘 저녁 사람들이 야근을 위해 저녁을 먹으러 갈 적에 요새 속이 아프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하는 핑계로 저녁 한끼정도 걸러주는 것도 좋은 일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루를 더 준비해서, 이틀 전쯤 요즘 집에 보일러가 이상하다, 주말에 손좀 봐야겠다 하는 떡밥을 던져놓았다면 누구도 당신이 몸살에 걸려 뻗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명심하라, 거짓말의 승패는 그 준비단계에 얼마나 그 거짓말을 위한 자잘한 복선들을 깔아두었는가에서 이미 갈리는 법이다. 잠시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한번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세 가지 이상의 거짓말에 대해 고민해라. 끊임없이 머리속으로 거짓말을 했을 경우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예상 질문에 대한 QA를 준비하라. 지속적으로 거짓말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복선을 깔고, 그 모든것들을 반드시 기억해라.

만약 준비과정까지의 그 기나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거짓말에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정말로 완벽한 거짓말을 원한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마저 속이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정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태어날때부터, 일단 잠들면 옆에 155미리 곡사포탄이 떨어져도 잠이 깨지 않는 사람이다. 당신의 아버지 생신은 비록 두달 전이셨지만 바로 오늘이다. 만약 당신이 이렇게, 스스로까지 속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차선책은 거짓말에 대한 정당화, 자기 합리화다. 많은 경우 대단히 완벽해보였던 거짓말이 들통나는 이유는, 거짓말의 실행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경우에 대한 공포나 긴장감, 그리고 거짓말로 인해 짊어지게 되는 죄책감으로 인해 떨리는 목소리나 눈동자 때문이다. 스스로의 거짓말에 대해 거짓말이라는 분명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설득시켜라. 이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백색이다. 나는 오늘 비록 거짓말을 하고 칼퇴근을 하겠지만, 집에서 충분히 쉬고 난 이후, 내일 처리해낼 수 있는 업무량은 평소의 두배가 될것이다. 이것은 내가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않아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사랑하기도 아까운 시간을 다툼으로 흘려버릴까 우려했기에 하는 거짓말이다! 강력한 자기합리화는 주저함이나 망설임같은 완벽한 거짓말의 마지막 장애물들을 말끔히 제거해줄 것이다.

성공적으로 거짓말을 하였다고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은 모니터링이다. 절대, 한순간 그 거짓말이 성공을 거뒀다고 방심하지 마라. 어떤 풋내기들은 거짓말의 성공에 도취해 자랑처럼 그 거짓에 대해 딴에 믿을만 하다고 생각되는 지인들에게 떠들어댔다가 다된 밥에 재를 뿌리고 만다. 하나의 귀라도 줄이는데 애써라. 당신의 거짓말을 듣게 된 귀가 하나라도 적을 수록, 당신의 거짓말이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지켜질 가능성은 그만치 증가할 것이다. 그러려면 그 거짓말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대해 항상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또, 상대가 그 거짓말에 완벽히 속았는지,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인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대화를 나눌적이면 그 완벽했던 거짓말에 균열을 만들어낼 만한 소재가 등장하지는 않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그런 소재가 나올적이면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잊지 마라, 설령 당신이 자신까지 속였다 하더라도, 당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당신이 죽고 나서도 변함이 없다. 때문에 사실 어떤 거짓말에 대해 '완벽한 성공'이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은 느리지만 얄밉게도 언제고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건 당신의 그 거짓말이 '실패하지 않도록' 관리해나가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아마도 추가로 하게 될 거짓말을 준비해야 할 지도 모른다.

이 모든것이 거짓의 기술이다. 끝도 없고, 완벽한 성공도 없지만, 최소한 실패를 면할 수는 있는 거짓의 기술. 어떤가. 글을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쌓인다고? 오, 이런. 진실은 대단히 잘나거나, 대단히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거나, 대단히 돈이 많거나, 대단히 아는게 많거나 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간때문이 아닌 거짓에 쉽게 피로해하는 당신과 같은, 가장 보통의 존재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거다. 왠만하면 그냥 정직하게 살라. 진실은 짧은 순간 무척 불편하고 무겁지만, 거짓은 기나긴 피로를 끊임없이 누적해가는 것이다. 조금은 아쉽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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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덜 부러워하기에 관하여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키가 무척 크다. 이게 좀 도를 지나치게 큰 통에 느끼게 되는 물리적 불편함 이외에도 사실 제법 많은 고민거리가 되었더랬다. 아버지께선 굉장히 장난끼가 많으신 분이셨는데, 덕분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에 그런 농담들을 하시곤 하셨다. 공부를 못해도 키는 커다란놈이 - 운동을 못해도 키는 커다란놈이 - 와 같은. 간단히 말해 남들보다 무언가 못하거나 뒤쳐지는 것에 대해 원치 않게 자라버린 키로 인해 스트레스를 두배로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그렇게나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이유도 사실 그로 인한 영향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면 키와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 없는, 농구와 같은 운동이 그렇다.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키는 큰데 별거 없다 - 는 시선을 받는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 농구공은 손에 잡지도 않고 자랐더랬다. 물론 고2이후, 한참 슬램덩크며 뭣이며 열풍이 불때 재수 좋게 못해도 잘한다 잘한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제법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여하튼 여전히 회사에서 운동같은거라도 한번 할 참이면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가 될 수가 없다. 결국, 단순히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꽤나 커다란 트라우마를 껴안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키가 크다는게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랄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먹고 살기 편한 종족(?)은 무얼까 라고 묻는다면 제법 많은 사람이 이렇게 대답할거라 믿는다. '예쁜 여자'라고.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남들보다 우월한 외모라는건 생각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이다. 남자도 그러할진데 여성은 더더욱 그렇다. 그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근데 그게 또,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더라. 실제로 나 역시 언젠가까지는 야 내세엔 예쁜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 수천명은 울리며, 군림하며 살아야지 낄낄낄 이란 시답잖은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게 어느 순간에 어우 야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한참 연애상담을 하고 있었던 시절에, 몇몇의 '예쁜 여자'들로부터 그들의 색다른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너무 들이대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한명에게 들었던 멘트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지들은 한번 찍고 두번 찍고 찍어봐야 열번 찍지만 그게 열명이 되면 백번이 되고 백명이 되면 천번이 되는거 아니냐며. 이게 듣고 보니 정말 뭐라 말할 길이 없는거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아 완전 배부른소리네 난 열번이라도 찍혀봤음 소원이 없겠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되짚어 보라. 당신이 정말 싫어하는 이성 열명이 끈덕지게 당신에게 달라붙으며 찍고 찍고 또 찍는 상황을. 물론 스스로의 외모를 무기삼아 남들 잘 이용해먹고 배부르게 잘 사는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게 무슨 곤욕이랴. 그건 뭐 잘잘못을 따질 수가 없는 것 아니던가. 단지 예쁘게 태어났다는 이유. 정말 단순한, 그 하나의 이유.

이것이 여전히 배부른 소리다 - 라고 들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조금이라도, 그것도 나름 고충일수는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사람의 모든것에는 유/무형의 세금이 따라붙는다. 남들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뭔가 태어날때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인한 세금이 반드시 따라붙는다는 얘기다.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우게 되는. 그것은 예외없는 삶의 진리다. 그리고 그것을 상기하는 것은, 조금, 아주 조금 타인을 '덜' 부러워할 수 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의 삶에서 빛나는 부분은 쉽게 발견하고, 쉽게 부러워하고, 그로 인해 쉽게 열등감에 사로잡히지만 정작 그 개개인의 고유한 삶들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감과 고달픔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는 불만과 스스로 가진것들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러움을 거세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부러움도 때로는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법이다. 허나, 적어도,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의 근사함에만 시선을 뺏겨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치를 외면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금 덜 타인을 부러워하며 사는것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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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관하여

두려움이라고 해서 마냥 떨쳐버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그 무수한 감정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두려움이란 것이, 공포라는 것이 사람을 위축시키는, 어렵게 만드는 건 사실이지만그런 위축됨 또한 나름의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경우 또한 많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불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지 못했다면 사람의 손으로 일구어놓은 그 무수한 것들이 벌써 언제쯤 잿더미로 돌아가 버렸을지 모르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가끔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하면, 그것이 대단히 급박한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면(예를 들어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데 도끼를 든 괴한이 뒤에서 고함을 지르며 따라온다와 같은) 스스로 느끼는 그 두려움이란 것에 대해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때로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우선 그것은 스스로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를 명확하게 해줌으로써 두려움을 반감시키는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더 크게 자극하는 것은 대부분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흐릿하게 안개에 가리워진 듯한, 어둠의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는듯한, 예를 들어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올때는 등골이 쭈뼛해지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밤늦은 길을 걸어 퇴근하는 누군가의 모습이었음을 확인할때만큼은 그런 두려움들이 확연하게 반감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렇게 스스로 느끼고 있는 두려움들과 눈을 맞춰보는 것이 가져다줄 수 있는 잇점은 또 이런 것이 있다. 공포 - 라고 하면 떠오르는, 귀신이나 핵전쟁이나 하는 것보다 가장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바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말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간에. 사랑하는 연인이 존재하는 사람이면 그가 내 곁을 떠나지는 않을까가 두려울 것이고 효심이 지극한 자식이라면 부모가 언제 세상을 떠나게 될까 두려워할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던 시간에서 삼십분만 넘어가도 왈칵 밀려드는 두려움을 느낄것이고, 1등이란 칭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언제 그 1등이라는 타이틀을 잃게 될지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릴까봐 그렇게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명확히 해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금 더, 지금 그렇게 내게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어떤 것들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흔히 사람들은 막연히 불안해하면서도 그 불안함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갈팡질팡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막연한 불안함만으로 우왕좌왕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얘기지마는.

가끔은 내게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을 가정해볼 필요도 있다.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의 가치에 대한 가장 정직한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 느끼는 두려움을 단순히 지우거나 잊으려고 애쓰지 말기를. 가끔 그 시커먼 그림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보기를. 그렇게 바라며, 우연찮게 마음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날, 가만히 마음을 더듬어보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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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비이성에 관하여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외부로부터의 어떤 공격 앞에서는 쉽게 비이성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이 모여 만든 집단의 특성이다. 때로 그것은 개개인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경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집단이라는 것은 분노의 가열과 비애감의 부풀림, 어느 방향으로도 홀로 있는 개인보다 훨씬 더 용이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집단 내 어떤 특정인의 분노에 쉽게 동참하고, 어떤 개인이 품고 있는 비애감에 대해 공감함으로써 그것을 더 극적인 비애감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집단 내 개인을 향한 어떤 것이 아닌 집단을 향한 공격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런 공동체 의식, 집단에 대한 소속감, 그런것들이 긍정적으로 발현이 될 때에야 그 자체가 집단이 가지는 장점이고 강점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집단에 소속된 개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훨씬 더 클 수 밖에는 없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집단의 비이성은 집단의 폐쇄성이 강화될수록 자주 드러나게 되는 경향이 있고, 그렇게 집단의 폐쇄성에 의해 돌출되기 시작한 집단의 비이성으로 인해 어떤 견고해보였던 집단이 와해되거나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집단의 폐쇄성에 대한 진단은 복잡한 진단 절차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도 간단히 들여다볼 수 있는데, 가장 좋은 것은 집단 내부의 소수 의견이 그 집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특정인의 주도나 특정 사람들의 이익 수호라는 어떤 뚜렷한 목적에 의해서 처음부터 제도와 체계를 갖추고 형성된 집단이 아니라면, 즉 자연스럽게 형성된 어떤 집단이라면(특히나 친목단체와 같은) 대부분 초기 단계에서는 어떤 소수의 의견도 나름의 존중을 받고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집단 내부에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아싸(아웃사이더)의 선이 그어지는 순간부터 소수의 의견은 무시당하거나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갭이 커져감에 따라 소수 의견에 대한 배척과 더 나아가 공격성을 띄는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쯔음이 되면 그러한 집단의 비이성적인 행동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정없이 비어져나오게 되게 마련이다. 이는 결국 집단 내 어떤 다양한 의견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느냐가 그 집단의 수명을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 아닐까, 외부로부터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공격을 받게 되더라도 그것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 그것은 평소 그 집단이 어떻게 다른 의견들을 다뤄 왔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집단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가해질때, 그리고 그 공격에 반응하는 주류의 정서가 '분노'일때 집단 내부의 개인들은 쉽게 그 분노에 이끌려간다. 혹은 외면하거나 방관한다. 집단 내에서 특정한 위치나 권력을 차지하는 이들일 수록 어떤 다른 의견을 내거나 주류의 정서와는 다른 반응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그런 맹목적 동조나 외면, 방관들은 그 어느 것도 집단의 진화나 집단 내 개개인의 성장에 마이너스가 된다. 어떤 집단이건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라면, 그 집단에 가지고 있는 애정만큼이나 뚜렷한 자신의 의사를 내비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스스로의 집단이 외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 주류가 아닌 목소리들을 어떻게 취급하는 지에 대해 개개인이 항시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의 제안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지금 당장 눈앞에 떨어진 어떤 이슈와 사건에 대해서 즉흥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거시적으로 집단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현명한 개인이 집단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현명한 개인들이 모여 여럿이 될 경우 그것이 집단의 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주 부질없는 기대만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였다고 생각했음에도 그 집단의 폐쇄성의 가속화를 막을 수 없다면, 그리고 그런 집단의 비이성적인 모습이 그대를 향한 공격성까지 띄게 된다면.

아쉽지만 가급적이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그 집단을 이탈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한번 소속되었던 집단을 벗어나는 데 주저하게 되는 것은 그 집단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그 집단 내부에 남아있는 스스로의 네트워크, 인맥, 기타 여러가지의 사유가 있지만, 또 그렇게 집단에서 이탈함으로써 그 자체로 인해 부당한 괴롭힘이나 공격을 당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뜨뜨미지근하게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집단에 소속되어 눈과 귀가 가려진채 스스로의 사고의 폭을 한없이 좁혀가게 되는 것에 비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때 해당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이 백배는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집단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점에 대해 지나친 결벽성을 띄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어찌되었건간에 사람은 무리를 지어 살게 되고,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간에 어떤 집단에건 소속되기 마련이고, 사람의 모임인 어떤 집단이란 것은 어떤 측면에선 비슷한 문제점들을 끌어안고도 굴러가고 있게 마련이니까. 선택은 그대의 몫이다. 집단의 그 어떤 비이성을 개선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외면하거나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그대의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에 대한 판단 말이다. 물론 나는 반대한다는 것 뿐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스스로 더 나은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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