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여'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0.12.27 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6
  2. 2010.12.22 기억에 대한 불가항력에 관하여 4
  3. 2010.12.20 좋은 나라에 관하여 4
  4. 2010.12.17 눈에 관하여 2
  5. 2010.11.29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3 - 4
  6. 2010.11.25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2 -
  7. 2010.11.24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1 - 4
  8. 2010.11.23 로망에 관하여 9
  9. 2010.11.18 나에게는 쉬운 일과 자수성가의 함정에 관하여 6
  10. 2010.11.09 사랑의 죽음과 믿음에 관하여

선물의 로망에 관하여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보니, 연말이다 보니, 이래저래 사람들끼리 누구에게 선물 뭐 해주려 하냐 식의 정보교환이 빈번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몇몇 이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 선물로 뭐 사주려고 하냐고 물어보니 돈이 제일이라고 현금 주고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상품권같은거나 사주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냥 이야기를 들었을적엔 뭐 그런가 하고 넘어갔는데, 크리스마스 TV 프로그램 중 하나를 보고 있자니 그런 내용이 나오더라. 크리스마스에 애인한테 받고 싶은 선물은? 중에 3위를 차지한 것이 상품권이었다는. 아, 그런것이 슬슬 대세를 이뤄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그저 입맛을 쩝쩝 다셔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더랬다.

다른 사람들끼리 어떤 선물을 주고 받느냐에 사실 별로 왈가왈부할 이유도 없고, 상품권 선물이 나쁘다 좋다 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것이 최고의 선물 아니던가. 게다가 진심을 담은,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면 그것이 돈이 되었건 상품권이 되었건 뭐 문제 될 이유도 없을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나쁘다 옳다 그런 가치판단을 떠나서, 그저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적어도 애인에게 주는 선물로 상품권같은 것은 나이를 얼마를 더 먹건간에 피하고 싶은 일이랄까.

이를테면 선물의 로망이라는 것은 그렇다. 그냥 주고 받는, 그 교환의 순간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는 거다.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며, 이걸 해줘야 좋아할까 저걸 사주면 더 좋아할까, 같은 물건을 놓고서 이 디자인이 더 좋을까 저 색깔이 더 어울릴까, 가만,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녔으니 이런 것은 아닌것같고 저것이 더 나을것 같고,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고민의 과정들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골라내는 것이 선물이라는 거다. 기념일 전날이나 당일날 황급하게 달려가서 준비하는 것보다 몇날 몇일 전부터 준비해놓고는 D-day 를 기다리며 또 잔뜩 마음 졸여하는 것이다. 이미 준비했는데 하루 지나 다른걸 보니 저게 더 나은게 아닐까, 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저쩌지 하며 괜히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는 맛이 있는 거다. D-day 가 되면 행여 건네기 전에 먼저 눈치라도 챌까봐 두근 반 새근 반 하며 가방속에 깊이 숨겨놓았던 선물을 꺼내어 상대에게 건네고, 취업관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구직자의 심정처럼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또 선물의 로망이 아니던가.

그런 길고도 살떨리는, 하지만 설레고 두근거리는 그 모든 과정들을 패스한채 '자 여기 상품권, 너 사고 싶은거 사라 - ' 하고 건네는 것으로 압축해버린다는 것은, 물론 딱히 원하지 않는 선물을 받았을때의 실망감에 대한 리스크도 없고, 괜히 마음 졸이고 걱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어쩌면 굉장히 효율적이고 굉장히 현명한, 차가운 도시의 남녀들에 어울리는 시크함일지도 모르겠으나 뭐랄까, 역시 로망 지상주의자인 나로써는 딱히 내키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그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그렇게 설레며 보냈었더랬나. 그렇게 애태우던 밤들은 또 얼마나 반짝이는, 이제 와 떠올려보면 얼마나 얼굴을 발갛게 붉히게 만드는 기억들로 남아있는가. 어쩌면 나날이 무덤덤해지는 세상 속에서, 그 설레임들은 얼마나 삶을 상큼하게 만들어주던 그런 것이었나.

일전에 쓴 글에서, 스스로의 삶에서 '편한' 이란 가치를 어떤 가치판단을 내리는 순간에 후순위로 미뤄놓는다면 생각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이야기를 했었더랬다. 어쩌면 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족도에 대한 불안감도 없고, 위험요소도 없고, 고민도 없는, 편한 선물. 그것이 바로 상품권이란 형태가 아닐까. 다시 강조하지만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편한 길을 위해서, 우리가 여전히 느낄 수 있는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아아, 참으로 멋대가리 없어지는 물질 만능의 세상이여.

2010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어느 고루한 이가 묻는다. 선물의 로망을 기억하십니까 라고. 그 설레던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하십니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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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대한 불가항력에 관하여

우리는 각자의 의지에 무관하게 기억을 잃어간다.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마찬가지다. 나쁜 기억을 잃어버리는 거야 당연히 누구나 바라 마지 않는 일이겠지만 나쁜 기억만 선별해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게 가끔씩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는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이나,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던 친구들과의 어떤 농담들, 그리고 떠올리는 것 만으로 가슴이 저릿해지거나 두근거리거나 뜨끈뜨근해지곤 하였던, 어느 날의 사랑했던 기억들까지도. 어느날 갑자기, 머리속에서 무언가가 삭제된 것처럼 한번에 날아가지는 않겠지만 그 형상들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옅어지는 과정을 거쳐, 어느 날엔가 그것들은 좀처럼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될런지도 모른다. 무섭고 슬프게도 말이다.

그것은 사실, 그 기억의 강렬함이나 소중함과도 거리가 먼 것들이다. 물론 개인적인 의지가 완전히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떤 것들에 대해 필사적으로 기억하려 노력한다면, 그것들은 조금 더 오랜 시간동안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은 논외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그렇게 기억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경험들과 조우하고, 새로운 것들을 보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듣고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무수하게 축적되는 경험들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 빨리 잊어버려야 할 것들을 분류해서 잽싸게 머리속의 어떤 영역에 올려두곤 한다. 생각해보면 대단히 징그럽게 짜증나는 일이지만, 다른 기억들에 몰두하다가 카드 결제일이나 공과금 납부일을 잊어버린다면 그건 기억을 더듬고 자시고가 아니라 당장 살아가는 일 자체에 불편을 끼칠 수 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안타깝게도, 어떤 기억도 기억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바로 미래 지향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거다. 잊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되는 어느 날, 괜히 시려오는 가슴에,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가득 차는 느낌에 전전긍긍해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더라도, 곧 털어버리길 권하는 거다. 그게 당신이 유난히 머리가 나빠서라거나, 질병이 있어서라거나 하는 이유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힘이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유한한 기억용량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으로써의 숙명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좀 더 말랑하게 끌고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세상의 모든것들이 기억됨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 지난 날의 뜨거웠던 사랑의 기억을 어느 순간 당신이 잠시 잊었다고 해서, 그것이 없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그것들은 그 시간에, 그 공간에, 그 차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할 이유도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가 몰두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더 뜨거운 기억을 남겨갈 수 있느냐다. 그러니 쓰린 가슴들은 접어두시라. 누구 못지 않게 뜨거웠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 어떤 기억이라면, 그것이 잊혀지건 잊혀지지 않건, 그 기억들이 남겨준 무수한 것들이 당신의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알게건 모르게건.

그렇게, 세파에 치여 기억하고 싶었던 날을 지나보내고, 씁쓸함이 가득 치밀어오르는 날 남긴다. 이는 오직,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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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라에 관하여

부산 출장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서둘렀던 날이었다. 7시 열차를 타고 내려가려 준비하고 집을 나서고 나니 너무 서둘렀는지 삼십분은 넘게 시간이 훌쩍 남았더랬다. 역사 내의 패스트푸드 점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잔 사서는, 역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대 꺼내 물고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는데, 남루한 행색의 할머니 한분께서 멀찌감치서 천천히 눈치를 보는 듯 하며 다가오셨다.

근처에 오셔서도 '아휴 춥다', '아휴 춥다' 하고 혼잣말만 되풀이하시며 계속해서 눈치만 흘끔흘끔 보시는것이 쉽게 말을 건네질 못하시더라. 어찌 해야 할 지 모르는 난감함속에 그저 가만히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결국 말을 건네셨다.

'저기, 미안한데 아가, 그... 담배 한대만 얻어 피울 수 있겠니?'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아휴 착해라, 아휴 고마워라... 고마워...'

담배를 꺼내어 불도 붙여드리고 나니 후욱 하고 연기를 뿜어내신다. 문득 보아하니 손에는 어디서 주워 오셨음직한 종이컵 하나가 빈 채로 들려 계셨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말을 붙이신다.

'저기, 미안한데... 그 커피도 좀 나눠 줄 수 있겠니'
'아 네, 여기요...'
'아휴, 이렇게 고마울데가... 고맙네 고마워...'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커피를 통째로 넘겨드리지 못하고 엉겁결에 내민 잔에 따라 드린 어설픔에 스스로 민망해질 쯤 해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계시다가 또 흘끔흘끔 눈치를 보시는 거다. 그쯤 되니 이제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슬슬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다.

'그... 아침도 못먹고... 근데 돈까지 달라고 하면 안되겠지? 요즘 사람들은 또 신용카드를 많이 써서 현금도 안 가지고 다니잖아? 그렇지?'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도 못하시고, 계속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게 참으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식사라도 하시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어 손에 쥐어 드리고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아휴, 고마워 고마워...'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쩐지 그 고맙다는 말들이 마음을 더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듯 해서 서둘러 역사 안으로 발을 옮겨 기차에 올랐더라는 것.

생각해보면 그다지 특별한 에피소드도 아니었다. 또, 내가 매번 그렇게 구걸을 하시는 분들께 후한 인심을 베푼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기에 할머니들께는 유난히 약하기도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적엔 그렇게 마냥 후하기만 했던것은 아니란 거다. 허나 그 새벽에 그렇게 마음이 짠했던 이유는 그렇다. 그저 어린 놈 눈치를 봐 가면서, 고개를 굽신굽신 해가며 그 추운 새벽녁에 역 주위를 맴돌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이, 어쩐지 무한한 비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랄까.

그 짧은 에피소드에서, 좋은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소득이었을 것이다. 그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필요 이상으로 당신들보다 어린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저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매번 출장 등으로 각지의 으리으리 삐까뻔쩍한 역사에 들리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답답함의 정체가 또 그러한 것이다. 최첨단 시설의 역사와, 너무도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항상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노숙인들. 누가 그들을 그 공간으로 내몰았는가, 진정한 '좋은 나라'라면, 삐까뻔쩍한 역사를 크고 넓게 짓는 것 보다도, 그곳을 떠돌고 있는 삶의 비애들을 조금이나마 걷어내는데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런, 왠지 모를 어색한 풍경들을 걷어내는데 주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더라는 것이다. 아, 이런 얘길 하면 강제로 역사 밖으로 노숙인들을 몰아내는 대책을 강구하라고 들릴지도 몰라 더 무서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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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관하여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린 시절엔 참 눈을 많이 봤었다. 서울에서도 말이다. 발목까지 푹푹 파묻히는 눈에 신발을 몽창 적셔가면서도 신이 나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아직껏 생생하다. 골목길마다 쌓여있던 연탄재들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언제나 눈사람으로 변신해 있었고, 놀이터며 골목길마다 눈사람 하나씩은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눈송이를 받아 먹으려 혀를 내밀고 하늘만 보고 있기도 했었더랬고, 동네 친구들과의 격한 눈싸움들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중 하나였더랬다.

그러던것이 어느날인가부터는 겨울에, 서울에선 눈 구경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제법 흩날린다 싶던 눈송이들도 도심의 열기 덕분인지 내리는 족족 녹아버리기 일쑤고, 한 차례 아름답게 세상을 뒤덮기도 전에 질척거리는 흙탕으로 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기가 내가 기억하던 그 동네가 맞나 싶게 넓다란 도로가 뚫리고 그 넓다란 도로를 또 차들이 가득 메우곤 하는데, 그만치 그 시절보다 눈 오는 날의 투덜거림은 더 크게, 더 시끄럽게 들려오곤 하였다. 나이를 먹을만치 먹었음에도 그저 눈이라면 마냥 신나서 어쩔줄을 몰라하는 어른애같은 나로써는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얼마나 그렇게 눈소식을 기다렸던가. 인생의, 사랑의 제대로 된 쓴맛을 보고 돌아온 강원도에서, 사방 천지에 그득그득 쌓인 눈더미들은 또 얼마나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었던가.

헌데 묘하게도 작년부터는 제법 눈이 내린다. 난데없는 폭설로 네시간씩 출근 버스 안에 갖혀있으면서도 그 불편함보다는 참 신나게도 퍼붓는다 싶은 마음에 괜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물론 버스 안에 가득한, 사람들의 짜증 섞인 얼굴에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쩐지 그렇게, 난데없이 잦아진 눈송이들이 개인적으로야 마냥 반갑기만 한데 또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보면 그리 즐거워만 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삼한사온은 옛말이 된것처럼 갑작스런 추위와 갑작스런 따스함이 교차되는 이상기후도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나이 드신 노부모께서 어디 길 가다 잘못 발이라도 미끄러지실까 걱정도 되고, 아끼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이 이런저런 불편함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저 혼자서 그렇게 즐겁다 즐겁다 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 오지랍을 넓혀 보면 새벽마다 박스를 주우러 동네를 돌아다니시던 할머니도 걱정이 되고, 집에서도 뜨끈하게 한기를 녹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이들에게도 미안함이 앞선다. 폭설에 비닐 하우스가 주저앉아서 피해를 보았다는 뉴스를 보아도 그렇고, 도로에 고립되어 이리 가지도 저리 가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다. 참으로, 세상에 마냥 즐기고 좋아하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이리도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 일이다. 허나 어쩌랴. 나만 해도 당장 급하고 중요한 용무가 있는데 눈때문에 발목을 잡힌다 하면 마냥 맘 편히 속 편히 좋아하지만은 못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저 단 하나의 바람이라면.

그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저 모두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바쁜 세상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하늘로부터 강제되는 여유가 아니던가. 눈 쌓인 도로 위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때 그저 이런 저런 사람들 생각 한번 더 해보는 것은 어떨까. 눈온다, 길 막히고 미끄러운데 조심하렴 하고 짧은 문자 하나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그냥 눈오니까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 하고 싱거운 전화 한통 건네보는건 어떨까. 어차피 조금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김에, 조금 더 부지런을 떤다 치고, 차로 가면 십분이면 갈 거리를 기꺼이 삼십분쯤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를 뽀득뽀득 소릴 내며 밟아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시절의 동무들을 한번쯤 그리워해보는 것은 어떨까. 불편하고 답답한 마음에 찌푸렸던 미간을 잠시 펴고, 그저 그러라고 그러나보다, 조금 쉬엄쉬엄 가라고, 하루만이라도 조금 쉬엄쉬엄 뒤도 옆도 돌아보며 가라고 그러나보다 하며, 그렇게 싱긋 웃어버리는 것은 어떨까. 그저 그런 바램을 가져보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이다.

어쩌면, 자연은 생각보다 인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을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물론 가끔은 성을 버럭버럭 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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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3 -

많이 노는 사람이기보다 잘 노는 사람이고 싶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허락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노는 방식이야 그때그때 다르겠지만, 어느 순간에 내가 어떻게 노는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인줄은 알고 놀고 싶다는 얘기다. 스스로 마땅히 누려야만 하는 휴식과 여유를 어떤 책임감이나 의무감으로 마냥 희생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스스로에게 여유와 휴식을 제공하려면 마땅히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들 속에서 그만치 더 공을 들여 대하고 힘써 행함으로 어느 시점에 내가 이래저래하여 좀 숨좀 고르겠소 한다면 누구라도 그대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노라고 끄덕일 수 있을만은 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과 돈의 무게를 잘 달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깟 돈 몇푼 더 벌자고 스스로의 삶을 지나치게 피폐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쓰잘데 없는 여유를 부리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놀지는 못해 놀아도 돈 것 같지 않은 마음에 마냥 게으름만 부리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취미가 나이 들어도 즐길 수 있을 만한 것인지는 한번 되짚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이 들어 여유는 생기고 하는 일은 적어지는데 즐길 것마저 줄어든다면 그게 나이를 그냥 고대로 먹어가는 지름길이다. 다행히 나야 쓸데없이 이것저것 끄적대기를 좋아하니 밥벌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죽을때까지 이것저것 끄적여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나이 들어 골방에 틀어박혀 글만 끄적일 것도 아니니 좋은 취미를 두어개 늘여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운동과 같은 것은 언제 가지더라도 좋은 취미니 하나쯤은 꾸준히 하도록 습관을 들여놓는 것이 좋을것이고 악기를 다루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취미를 고를때 항상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상황이나 환경의 제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버려져야 할 취미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에지간한 취미에 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지만 꼭 그렇게 돈을 쏟아부어야 만족을 느낄 수 있고 하는 취미라면 아마도 그 취미로 인한 즐거움보다 지날수록 버겁고 괴로움이 커지지 않을까 두렵다. 물론 그것도 스스로의 능력이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좋은 일이겠지만.

좋은것을 보고 즐기는 일에 쉽게 질리고 무뎌진다면 스스로 그것을 과연 충분히 즐기고 그 참맛을 보았는가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워낙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고 오감을 어지럽히는 오만가지 새로운 것들이 날마다 튀어나오는 세상인지라 누구라도 쉽게 무뎌지고 자극에 둔감해짐은 당연한 일일 것이나 스스로를 지나친 자극에 노출시키고,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마모됨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오랫동안 즐거운 일을 찾고 누리는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극에 둔감하게 반응해서인지 아직껏 눈만 내려도 바다만 보아도 좋아라 즐거워라 하는데 이런 것들은 늘그막에까지 쭈욱 끌고갈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 어릴 적에야 만날 새롭고 좋은 것, 짜릿하고 황홀한것들을 찾기 위해 천지사방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 하더라도 나이 들어까지 그리 살아서야 사오십만 넘겨도 세상에 재미난것이 하나 없을까 두려운 일이다. 정말로 좋은 것이 있다면 하나를 즐김에도 끈기를 가지고 깊이 있게 즐겨보는 자세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어떤 것들이 가지고 있는 참맛은, 진국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훑어낸다고 해서 맛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니 스스로가 살아가며 보게되는, 참 나이를 헛먹었다 싶은 이들을 보며 저리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항상 고민하며 살 일이다. 어떤 사람이라는 하나의 우주라는게, 참으로 스스로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좁쌀만치 작아지기도 헤아릴 수 없이 넓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지금은 저들을 욕하지만 내가 나이 먹어서 그들처럼 행동하게 되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주어진 상황, 환경, 경험으로 인해 사람은 빠르게 변하고 빠르게 경직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뻔한 이중잣대를 태연히 들이밀고 그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러니 항상 누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건간에 일단은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들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어린 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마냥 나랑은 거리가 먼 것이로다 철없는 것들이로다 하며 깎아내리지 않고, 나보다 나이 먹은 이들의 이야기에 뻔한 잔소리다 고리타분한 소리다 하며 귀를 막아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살아가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항상 더 주의를 기울이되,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건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내 몸이 아프고 괴로운데 타인에게 마냥 그 사람의 온갖 장점들만을 다 내비치며 사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이란것은 그런것이다. 스스로가 좋고 편하고 멀쩡해야 남들에게도 좋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지 내 스스로가 괴롭고 아픈데 남들에게는 좋고 편하게만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어거지를 부려볼 수는 있더라도 그것을 꾸준히 지속해나갈 수는 없는것이다. 무슨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보양식을 찾아 헤매고 그러라는 말이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집착이고 꼴불견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적절한 운동, 그리고 몸에서 이상신호를 보낼적에 빨리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요, 건강에 해로운 것을 멀리하는 게 두번째이다. 스스로 지금까지는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이 이 부분이니, 앞으로는 당연히 더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항상 틀린말은 아닌것이다. 돈은 없었다가도 생기고 있었다가도 사라지고 하는 것이지만 건강은 한번 잃어버리면 도로 찾기는 열배는 힘이 든 것이다. 강철이라도 씹어먹을 나이에 골골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이 보게 되는데, 스스로의 삶을 모조리 즐기고 누리려면 지금부터 건강관리부터 하라고 권해주고 싶어지는게 당연한 노릇이다.

사는 것도 여행이고 죽는 것도 여행이니,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쓸데없는 집착들로 괴로워하다 죽는다면 그만치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하나 둘씩 버려나가야 하는 것들중 하나가 그런 집착들이다. 돌아보면 지금껏 사람 욕심으로 적잖게 마음을 괴롭게하였고, 지금도 가끔 그런 욕심에 끙끙대고는 하지만 적어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는 그런 욕심들을, 집착들을 모조리 놓아보내고 싶다. 그저 헛헛이 웃으며,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참으로 고마웠다고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그저 내가 손발같이 아꼈던 내 사람에게, 또 몇몇 지인들에게 그래도 그대 있어 다행이었다는 이야기 한마디 듣는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이다. 재산을 남기기보다는 좋은 이야기와 좋은 생각들을 남길 수 있다면 그만큼 복된 일이 없을 것이고, 뒤에 남겨진 이들이 나를 떠올릴적에 괜한 가슴 저림보다 오래된 농담을 들은것처럼 가만히 웃어볼 수 있는 정도의 삶이었다면 참으로 좋겠다.

이것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도 멀고도 먼, 그러나 꼭 도달하고 싶은 이상. 가장 인간적인 삶, 너무나 인간적인 삶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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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2 -

돈은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버는 것이지 돈을 벌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 하나만큼은 항상 새기고 살고 싶다. 필요 이상으로 몸을 편케 하려고 금전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의 삶의 방향을 원치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나는 '얼마나 벌 것인가'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 이상의 돈벌이를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으려한다. 나이 들어 좀 한적한 곳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을 만큼이면, 그리고 나와 내 배우자 될 사람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노년을 근심걱정으로 채우지 않을 정도면 족하다. 행여라도 운수가 좋아 스스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다면 적당히 좋은 것들을 누리고 즐기되 남는 것들은 항상 기꺼이 나누며 살 수 있을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돈을 벌기보다 중요한것은 죽는 날까지 무언가 하나라도 꾸준한, 매일 매일 의미있는 노동을 하고 싶다는 거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중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내가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일테고 그렇지 못하다면 반드시 무언가, 노년에 맥없이 풀어져버리지 않을 수 있는 꾸준한 일거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결혼하여 자식을 갖게 될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죽는 날까지 십원짜리 하나라도 자식 덕을 보며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떨쳐낼 수 있도록, 부지런히 일하고 그렇게 스스로 아직 노동을 할 수 있음에 하루하루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그깟 돈이야 많건 적건 무슨 문제겠는가.

인간적인 삶을 이야기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스스로 타인과 관계맺음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가장 먼저 이런 것이다. 나보다 잘난, 권세가 강한, 힘이 센, 돈이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을적에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적보다 두배는 더 신중을 기하고 적절한 거리 둠에 주의를 기해야 한다. 사람 마음이 다 닮은 부분이 있는지라, 누구라고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처럼 고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위에 권세와 재물이 많은 이가 있으면, 아무리 아쉬운 것이 없는 이라 할 지라도 덕을 보고 싶어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만큼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가는데 해가 될만한 것이 또 없다. 기대려 하거나 덕을 보려 하다보니 그를 대할적이면 절로 마음이 비굴해지거나 혹은 이유없는 원망이나 부러움, 질시하는 마음이 생겨 스스로를 망치기 십상이다. 애초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 수 있으면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고, 어쩔 수 없이 함께 부대끼게 된다면 철저하게 주고 받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은 일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지금의 회사에서 일을 하며 이런저런 무리들에 속하게 되고, 스스로 원해서건 우연찮게 그렇게 되어서건간에 많은 무리 맺었다가 또 무리에서 떨어져나오곤 하는 일이 생길것이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와 어떤 무리를 이룬다고 할 적이면 당연스럽게도 다른 이와 1:1의 어떤 관계를 형성할 때 보다 열배는 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사람은 무리를 이룰수록 좋지 못한것을 빠르게 전파시키기도, 좋은 것들을 널리 나누기도 한다. 허나 나쁜 것은 좋지 못한 것보다 빨리 배우는것이 사람이 가진 속성이기에 불특정 다수와 어떤 무리를 이룰적이면 그 무리에서 혹여라도 내가 나쁜 것을 배우고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항상 돌아봐야 한다.

무리를 이룬다는 것이 또 위험한 이유는, 어떤 무리든간에 그 무리는 무리 외부의 다른 사람이나 무리에 대해 배타성을 띈다는 것 때문이다. 무리의 역사가 오래되고 내부의 결속이 강해질수록 그 무리가 외부의 어떤것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무리가 생기면 반드시 권세가 생기고, 무리의 핵심에 있는 이들일수록 그런 권세로 인한 교만함과 무리 내부에서도 또 그들만의 무리를 이뤄 이득을 보려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스스로 어떤 무리에 몸담고 있다면 그 무리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나 시각들에 대해 오히려 깊이 새겨 듣고 받아들여 생각해볼 수 있는 귀를 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나는 바라건데 스스로 어떤 무리를 이루건, 그 무리의 중심이나 핵심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이어지고 엮어지는, 그 끊고 맺음이 자유로운 그런 무리라면 얼마든지 속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무리에 스스로 속하게 된다면 항상 주의하고 또 주의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경험한 것에 의하면, 어떤 좋지 못한 무리에 속했을때 그 무리에서 발을 빼는것은, 그 무리를 떠남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것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스스로에게 훨씬 득이 되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그만치 이뤄놓은 관계인데.. 하며 관계에 전전긍긍하다가 스스로를 해하게 되는 경우가 없기만을 바래본다.  

※생각해보니 이게 간단히 정리될게 아닌데 -_-; 결국 다음 포스팅으로 또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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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 1 -

나는 남다른 도덕성을 가지고 유별나리만치 곧게 살고 싶지 않다. 지금껏 살아오며, 결벽에 가까운 도덕성을 자랑하던 이들이, 그로 인해 타인에게까지 유별난 도덕의 잣대를 들이밀며 그들을 핍박하던 이들이 정작 스스로에게 어떤 특별한 경우가 생겼을때 같은 기준과 잣대로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게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다면, 나는 그저 툭툭 털면 적당히 먼지가 묻어나오되 스스로 그 먼지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가 되고싶다. 남들 보기에는 온통 먼지투성이, 흙투성이로 살면서도 타인의 옷깃에 묻은 먼지 한톨 가지고 남을 핍박해대지만 않으면, 유난히 비틀어진 도덕관념으로 불특정다수에게 해가 되도록 살지 않으면 그정도로 족할것이다.

또, 무슨 전설속의 성인군자나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움만으로 만족하곤 했다던 옛 사람처럼 한 점 물욕도 없이 독야청청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적당히 욕심을 부릴것이요 가끔은 그 욕심이 지나쳐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일도 겪게 되기를 바란다. 다만 가끔은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되 그럴 수록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귀함을 상기하고, 내가 무언가를 욕심내어 얻으려 할때 노력 없이 그것을 얻게 되는 일을 경계하며 살고프다. 고기를 물고 물가에서 자신을 바라본 강아지마냥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얻으려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던지는 꼴을 당하지 않게 주의할 것이되 우연히 좋은 운수로 몸과 마음이 편하고 즐거울 일이 생길 적이면 행여 나의 그 편안함과 즐거움이 남에게 크게 화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며 살고 싶다.

마땅히 항상 꿈을 꾸고 스스로 정한 삶의 목표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되 지나치게 허황된 망상같은것만 쫓다가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 내 삶의 무게를 전가하게 되는 일은 피하고싶다. 또, 내가 꿈꾸는 것에, 내가 바라는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못났다 부족하다 나는 너와 다르다 하며 허황된 우월감에 빠지는 일을 경계하고 한방에, 단박에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성과를 거두거나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버리려 노력할 것이다. 스스로가 이루는 작은 성취들에 충분히 기뻐하되, 그것이 온전히 나만 잘나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내 주변 이들의 공과 운이 함께 작용하여 이뤄진것이라 믿고 스스로의 성공이나 성과의 열매를 기꺼이 나누려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언제든지 원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해줌으로 그들의 성공이나 성취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꿈과 이상에 동참할것을 호소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행동으로 증명해나가는 이들을 믿으려 할 것이다.

가급적 실수를 줄이려 노력하겠지만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실수를 가장 먼저 스스로가 깨달으려 노력하고, 만약 내가 모르는 실수를 누군가가 일깨워준다면 고마워하며 들을것이다. 내 실수로 인해 혹여 해를 받은 이가 있다면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보고 작은 방법이라도 곧 실행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실수에 대해 지나치게 스스로를 핍박하고 채찍질해서 위축된채로 소극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일도 주의해야 할 것이고 다만 실수의 경중에 따라 스스로에게 엄하게도 가볍게도 대하는 법을 깨치려 노력할 것이다. 실수로 인해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결과물들을 당연히 물어야 할 세금이다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쓸것이다. 항상 나 아닌 다른 이들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실수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이들에겐 스스로 가진 관용의 한도까지 그 실수를 품으려 노력할 것이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남탓을 해대는 이들을 멀리 할 것이다.

다만 지상에 발을 딛고 있을 적에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주력하고, 다음 세상이나 사후세계같은 것에 대한 헛된 공포로 귀한 삶을 낭비하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스스로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이라 믿어진다면 언제든 어떤 종교든 가지겠지만 천국행 티켓을 발권해주겠다고 자신의 신을 팔고 사람들의 죄의식을 이용해서 스스로의 잇속을 챙기는 거짓 종교인들을 바퀴벌레보듯 멀리해야 할 것이다. 죄를 지었을때 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기보다 내 죄로 인해 해를 입은 것등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빌 수 있는 용기와 스스로 삶을 다잡아나갈 수 있다는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종교가 무슨 필요겠느냐 하는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믿음에 대해 함부로 조롱하거나 섣불리 그릇된 것이라 단정짓지 않을것이다. 어떤 종교에서 나온것이건간에 귀한 가르침이라면 귀기울여 들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고 내 의지대로 이뤄지지 않는 어떤 일을 두고 부질없이 신을 원망하거나 반대로 신에게 기대하거나 하지 않으려 해야 할 것이다.

※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적인 삶에 관하여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이어지는 생각은 다음 포스팅으로.

로망에 관하여

가끔 떠올리곤 하는,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적에 종종 꺼내는 이야기다. 언젠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바에서 한 청년을 만난적이 있다. 나보다 다섯살인가 어렸더랬나. 우연찮게 이야기를 섞게 되었는데 사람이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긍정적일 수 있는가, 밝을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밝은 사람인게다. 무엇이든지 잘 될거라는 생각,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 멋진 연애와 멋진 사랑에 대한 기대감, 행복한 가정에 대한 이상, 그 모든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그에게 무척이나 흥미가 생겨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했었더랬다. 그 끝을 모를 밝음과 긍정성의 근원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달까.

그리고 새벽녘쯤까지 이어진 이야기에서 그의 가정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바로 그 이야기들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름 아닌 그의 부모님 이야기였다. 아버지께선 저학력 노동자였고 어머니께선 전업주부셨기에 평생을 부지런히 일하셨지만 3남매를 키우면서 집은 항상 가난한 상태였다고. 건강이 안좋아서 이제는 학교 수위 일을 하시면서 계시는데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부모님께서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힘들게 살림을 꾸리면서도 항상 어머니께선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노력하고 있음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하시곤 하셨고, 아버지께선 어머니께 큰 소리 한번 안내시고 자식들 다 키워낸 지금은 두분이서 얼마나 금슬이 좋으신지 모르겠다고. 그 얘길 듣고는 그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그렇구나, 그런 가정에서 자라났으니 저렇게 밝을 수 밖에 없지. 당연한거지, 암, 그런거지. 하며 그저 웃으며 술잔을 건네는 수 밖에는 없었다는 것. 대충 3년쯤 지난 이야기.

- * -


가끔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읽을적이면, 요즘 아이들은 참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아이들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시대가 시대고 사회가 사회인데 어느정도야 당연히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를 책하거나 할만큼 오지랖이 넓거나 훈장병에 걸린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씁쓸하지만 굉장히 현명한 판단이기도 하다. 또 내 주변의 누군가들이 그런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나 역시 현실적인 조언들을 해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이야기 하나를 읽고는 반론을 달고 싶어졌더랬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가난해도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로망같은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거다. 뭐 그런 얘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던것. 아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것을 실현해내는 게 로망인데, 현실적으로 로망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무어냐고. 현실적으로 쉬운, 당연한 것들이면 그게 로망의 영역에 속할리가 없잖나. 그건 그냥 현실 그 자체지. 하하.

그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렇다. 나는 썩 부유하게 살 자신은 없고, 그렇다고 처자식 밥 굶길만큼 무능하게 살기도 싫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함께 할 사람이라면, 당신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좋아요 - 라는, 그렇게 함께 로망을 펼쳐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이야기. 현실적으로 밋밋하게 살아가기보다야, 바보같아도 마음껏 꿈을 꾸며 사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지만 말이다.

나에게는 쉬운 일과 자수성가의 함정에 관하여

나에게는 쉬운 일이 타인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이 사실 하나을 항상, 제때 제때 떠올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불행하게도 비단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 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종종 저 간단한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고, 나에게 쉬웠던 것이기에 너에게도 쉬운 일이야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은 상대에게 확실한 몰이해를 체감하게 해주고, 상대와의 마음의 간격을 깊고 넓게 벌리게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굉장히 많은 경우에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아니 그게 왜, 그건 쉬운거라니까? 라는 식의 인식밖에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말과 글은, 불특정다수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 상처를 주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놀라운 것은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 극적인 성공을 거둔 이들, 특히나 그것이 어떤 상황이나 여건, 운 등의 외적인 요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그러한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가 바로 저러한 것이란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 그렇게 성공한 이들이라면 남들에게 귀감이 되는 부분도 얼마든지 있고 배울만한 부분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씩 어떤 사안들을 대할때마다 심심치 않게 그런 생각들이 표출되곤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들에겐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해당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굉장히 어려움을 느끼고 했었을 지라도, 이미 성공을 거둔, 실패와 고난들이 과거의 것이 된 상황에서는 어쨌든 이미 지난 일로 편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런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서 유독 그런, 사회의 문제들을 개인의 근성의 문제로 치환해서 해석한다거나 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잊고 있다. 그들은 남다른 노력을 통해 어떤 성공을 거두었지만, 같은 노력을 하는 누구나 그들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똑같이 백일동안 마늘과 쑥을 먹는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노력하면 모두가 성공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공한 사람은 모두가 노력했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나는 그런것이 바로 자수성가의 함정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기울인 노력만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것, 그리고 스스로가 노력함으로 인해 얻은 댓가들을 그 사람들도 같은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너무 쉽게 단정지어버리고 어떤 문제가 단지 그 사람의 노력 부족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것이 말이다.

사회 구조의 변화로 인해 자수성가라거나 개천에서 용 난다 하는 경우들이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 사회의 근간에 흐르고 있는 것은 자수성가나 개천에서 용 나는 것들에 대한 어떤 동경들이다. 그렇기에 또 그런 식의 성공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은 그만치 많은 이들에게 스스로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런저런 매체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스스로의 의욕을 북돋운다거나 하는 형태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이들은, 그런 성공을 통해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사람들은 더더욱 언행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내가 나의 성공을 온전히 스스로의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나에게 자연스럽고 쉬운 것들이 타인에게도 자연스럽고 쉬울 것이라 너무 쉽게 단정짓고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지를 말이다.

자수성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거창한 성공같은 것이 아니어도 인간은 쉽게 교만해지고, 그로 인해 무례해진다. 스스로 아주 작은 성공, 아주 작은 극복의 희열같은 것을 경험한 후에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품는 것은 좋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만심과 자신감의 경계는 몹시 모호하고, 한발만 헛딛으면 자만이 자신이 되기도, 자신이 자만이 되기도 한다. 타인을 대할때에 나의 자신감이 자만의 경계로 넘어가 상대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어려움에 대해 너무 쉽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돌아보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이 사회는, 굳이 누가 물어보지 않더라도 내 문제에 대해 일일이 가르치려고 드는 오지랍이 충만한 사회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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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죽음과 믿음에 관하여

가끔 연애상담을 하며 '사형선고'를 바라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본 적이 있다. 가망 없는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하는데 집착인지 미련인지 아무튼 여전히 괴롭고 힘든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신력있는 누군가로부터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어야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해주기를 원하는 듯한 눈길을 말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에 대부분 나는 그것이 내가 사형선고를 내린다고 해서 쉽게 상대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사랑이 맞다 아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뭐 이런 식으로 단정지어서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보편적인 사랑의 끝, 어떤 사랑의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것이다.

사랑은 믿음과 함께 살고, 믿음과 함께 죽는다고.

간단히 말해 이런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 행동에, 눈빛에 대해 더 이상 믿음을 가질 수 없을때 그 사랑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향해 사랑한다고 하는 그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도, 사랑스럽게 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언제나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아도 불신과 의혹만이 가득할때 그 사랑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너에 대한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겠지만 너를 떠나진 못하겠어 - 라는 상황 쯤이라면 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정말 난데없이 어디선가 불신의 장벽이 대지를 뚫고 불쑥 튀어오르는 경우는 없다. 불신의 벽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 하나의 거짓말이 밝혀짐에 따라 하나의 신뢰를 잃고, 그 잃어버린 신뢰로 인해 불필요한 의심이 생기고.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처럼 생각보다 견고하게 쌓여나가는 것이 불신의 벽이란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견고하게 쌓이는 것이기에 그만치 부수기도 어려운것이 당연지사다. 신뢰라는 것은 최초에 얻어내기나 잃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한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기는 그만치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특히나 연인 사이에서의 불신이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거짓말로 인해 잃어버린 작은 믿음 하나가 향후에는 엄청난 장애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두개의, 작은 불신같은 것들도 아니고 상대가 말하는, 행동하는, 그 모든것들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사랑은, 그 관계는 이미 죽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반대로 얘기하면 어떻게 신뢰를 구축해 나아가는가에 사랑의 유통기한이 달라진다는 말로도 해석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어떻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정답은 연애의 모든것은 상호작용이라는 평범한 원칙에 맞는, '함께'가 될 것이다. 많은 연인들이, 이런 문제들로 인해 한번쯤은 다투곤 한다. 서로의 이성친구에 대한 문제 등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때마다 등장하는 멘트가 이런것이다. 넌 왜 날 그렇게 못믿어? 널 못믿는게 아니라 그X를 못믿... 이런. 여기서 문제가 되는것이 그런거다. 믿음은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에게 '넌 날 사랑하니까 넌 날 믿어' 라는 한마디로 당연히 생겨나게 되는것은 아니다. 믿음을 얻고 싶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하고, 믿고 싶은 사람은 너무 주관적인 입장에서 상대의 행동을 해석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믿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을 서로 쌓아가는 것이란 얘기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얼마나 상대를 믿을 수 있는가 - 하는 문제는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 와 종종 직결되는 문제다.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서로에게 불신의 벽을 쌓아나가지 않도록, 그리하여 결국 그 사랑의 종언을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미 그 사랑이 호흡기를 떼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면 당신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그 높다랗게 세워진 불신의 벽을 깨뜨리려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상조업체에 전화라도 할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앋.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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