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나라에 관하여

부산 출장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서둘렀던 날이었다. 7시 열차를 타고 내려가려 준비하고 집을 나서고 나니 너무 서둘렀는지 삼십분은 넘게 시간이 훌쩍 남았더랬다. 역사 내의 패스트푸드 점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잔 사서는, 역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대 꺼내 물고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는데, 남루한 행색의 할머니 한분께서 멀찌감치서 천천히 눈치를 보는 듯 하며 다가오셨다.

근처에 오셔서도 '아휴 춥다', '아휴 춥다' 하고 혼잣말만 되풀이하시며 계속해서 눈치만 흘끔흘끔 보시는것이 쉽게 말을 건네질 못하시더라. 어찌 해야 할 지 모르는 난감함속에 그저 가만히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결국 말을 건네셨다.

'저기, 미안한데 아가, 그... 담배 한대만 얻어 피울 수 있겠니?'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아휴 착해라, 아휴 고마워라... 고마워...'

담배를 꺼내어 불도 붙여드리고 나니 후욱 하고 연기를 뿜어내신다. 문득 보아하니 손에는 어디서 주워 오셨음직한 종이컵 하나가 빈 채로 들려 계셨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말을 붙이신다.

'저기, 미안한데... 그 커피도 좀 나눠 줄 수 있겠니'
'아 네, 여기요...'
'아휴, 이렇게 고마울데가... 고맙네 고마워...'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커피를 통째로 넘겨드리지 못하고 엉겁결에 내민 잔에 따라 드린 어설픔에 스스로 민망해질 쯤 해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계시다가 또 흘끔흘끔 눈치를 보시는 거다. 그쯤 되니 이제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슬슬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다.

'그... 아침도 못먹고... 근데 돈까지 달라고 하면 안되겠지? 요즘 사람들은 또 신용카드를 많이 써서 현금도 안 가지고 다니잖아? 그렇지?'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도 못하시고, 계속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게 참으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식사라도 하시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어 손에 쥐어 드리고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아휴, 고마워 고마워...'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쩐지 그 고맙다는 말들이 마음을 더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듯 해서 서둘러 역사 안으로 발을 옮겨 기차에 올랐더라는 것.

생각해보면 그다지 특별한 에피소드도 아니었다. 또, 내가 매번 그렇게 구걸을 하시는 분들께 후한 인심을 베푼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기에 할머니들께는 유난히 약하기도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적엔 그렇게 마냥 후하기만 했던것은 아니란 거다. 허나 그 새벽에 그렇게 마음이 짠했던 이유는 그렇다. 그저 어린 놈 눈치를 봐 가면서, 고개를 굽신굽신 해가며 그 추운 새벽녁에 역 주위를 맴돌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이, 어쩐지 무한한 비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랄까.

그 짧은 에피소드에서, 좋은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소득이었을 것이다. 그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필요 이상으로 당신들보다 어린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저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매번 출장 등으로 각지의 으리으리 삐까뻔쩍한 역사에 들리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답답함의 정체가 또 그러한 것이다. 최첨단 시설의 역사와, 너무도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항상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노숙인들. 누가 그들을 그 공간으로 내몰았는가, 진정한 '좋은 나라'라면, 삐까뻔쩍한 역사를 크고 넓게 짓는 것 보다도, 그곳을 떠돌고 있는 삶의 비애들을 조금이나마 걷어내는데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런, 왠지 모를 어색한 풍경들을 걷어내는데 주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더라는 것이다. 아, 이런 얘길 하면 강제로 역사 밖으로 노숙인들을 몰아내는 대책을 강구하라고 들릴지도 몰라 더 무서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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