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관하여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린 시절엔 참 눈을 많이 봤었다. 서울에서도 말이다. 발목까지 푹푹 파묻히는 눈에 신발을 몽창 적셔가면서도 신이 나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기억이 아직껏 생생하다. 골목길마다 쌓여있던 연탄재들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언제나 눈사람으로 변신해 있었고, 놀이터며 골목길마다 눈사람 하나씩은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눈송이를 받아 먹으려 혀를 내밀고 하늘만 보고 있기도 했었더랬고, 동네 친구들과의 격한 눈싸움들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중 하나였더랬다.

그러던것이 어느날인가부터는 겨울에, 서울에선 눈 구경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제법 흩날린다 싶던 눈송이들도 도심의 열기 덕분인지 내리는 족족 녹아버리기 일쑤고, 한 차례 아름답게 세상을 뒤덮기도 전에 질척거리는 흙탕으로 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기가 내가 기억하던 그 동네가 맞나 싶게 넓다란 도로가 뚫리고 그 넓다란 도로를 또 차들이 가득 메우곤 하는데, 그만치 그 시절보다 눈 오는 날의 투덜거림은 더 크게, 더 시끄럽게 들려오곤 하였다. 나이를 먹을만치 먹었음에도 그저 눈이라면 마냥 신나서 어쩔줄을 몰라하는 어른애같은 나로써는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얼마나 그렇게 눈소식을 기다렸던가. 인생의, 사랑의 제대로 된 쓴맛을 보고 돌아온 강원도에서, 사방 천지에 그득그득 쌓인 눈더미들은 또 얼마나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었던가.

헌데 묘하게도 작년부터는 제법 눈이 내린다. 난데없는 폭설로 네시간씩 출근 버스 안에 갖혀있으면서도 그 불편함보다는 참 신나게도 퍼붓는다 싶은 마음에 괜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물론 버스 안에 가득한, 사람들의 짜증 섞인 얼굴에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쩐지 그렇게, 난데없이 잦아진 눈송이들이 개인적으로야 마냥 반갑기만 한데 또 이런저런 것들을 따져보면 그리 즐거워만 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삼한사온은 옛말이 된것처럼 갑작스런 추위와 갑작스런 따스함이 교차되는 이상기후도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나이 드신 노부모께서 어디 길 가다 잘못 발이라도 미끄러지실까 걱정도 되고, 아끼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이 이런저런 불편함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저 혼자서 그렇게 즐겁다 즐겁다 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 오지랍을 넓혀 보면 새벽마다 박스를 주우러 동네를 돌아다니시던 할머니도 걱정이 되고, 집에서도 뜨끈하게 한기를 녹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이들에게도 미안함이 앞선다. 폭설에 비닐 하우스가 주저앉아서 피해를 보았다는 뉴스를 보아도 그렇고, 도로에 고립되어 이리 가지도 저리 가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다. 참으로, 세상에 마냥 즐기고 좋아하기만 할 수 있는 것이 이리도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 일이다. 허나 어쩌랴. 나만 해도 당장 급하고 중요한 용무가 있는데 눈때문에 발목을 잡힌다 하면 마냥 맘 편히 속 편히 좋아하지만은 못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 그저 단 하나의 바람이라면.

그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저 모두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바쁜 세상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하늘로부터 강제되는 여유가 아니던가. 눈 쌓인 도로 위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때 그저 이런 저런 사람들 생각 한번 더 해보는 것은 어떨까. 눈온다, 길 막히고 미끄러운데 조심하렴 하고 짧은 문자 하나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그냥 눈오니까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 하고 싱거운 전화 한통 건네보는건 어떨까. 어차피 조금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김에, 조금 더 부지런을 떤다 치고, 차로 가면 십분이면 갈 거리를 기꺼이 삼십분쯤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를 뽀득뽀득 소릴 내며 밟아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시절의 동무들을 한번쯤 그리워해보는 것은 어떨까. 불편하고 답답한 마음에 찌푸렸던 미간을 잠시 펴고, 그저 그러라고 그러나보다, 조금 쉬엄쉬엄 가라고, 하루만이라도 조금 쉬엄쉬엄 뒤도 옆도 돌아보며 가라고 그러나보다 하며, 그렇게 싱긋 웃어버리는 것은 어떨까. 그저 그런 바램을 가져보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이다.

어쩌면, 자연은 생각보다 인간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을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물론 가끔은 성을 버럭버럭 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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