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죽음과 믿음에 관하여

가끔 연애상담을 하며 '사형선고'를 바라고 있는 듯한 눈길을 본 적이 있다. 가망 없는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하는데 집착인지 미련인지 아무튼 여전히 괴롭고 힘든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신력있는 누군가로부터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어야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해주기를 원하는 듯한 눈길을 말이다.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에 대부분 나는 그것이 내가 사형선고를 내린다고 해서 쉽게 상대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사랑이 맞다 아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뭐 이런 식으로 단정지어서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보편적인 사랑의 끝, 어떤 사랑의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것이다.

사랑은 믿음과 함께 살고, 믿음과 함께 죽는다고.

간단히 말해 이런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 행동에, 눈빛에 대해 더 이상 믿음을 가질 수 없을때 그 사랑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향해 사랑한다고 하는 그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도, 사랑스럽게 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언제나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아도 불신과 의혹만이 가득할때 그 사랑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 너에 대한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겠지만 너를 떠나진 못하겠어 - 라는 상황 쯤이라면 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정말 난데없이 어디선가 불신의 장벽이 대지를 뚫고 불쑥 튀어오르는 경우는 없다. 불신의 벽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그 하나의 거짓말이 밝혀짐에 따라 하나의 신뢰를 잃고, 그 잃어버린 신뢰로 인해 불필요한 의심이 생기고.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처럼 생각보다 견고하게 쌓여나가는 것이 불신의 벽이란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견고하게 쌓이는 것이기에 그만치 부수기도 어려운것이 당연지사다. 신뢰라는 것은 최초에 얻어내기나 잃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한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기는 그만치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특히나 연인 사이에서의 불신이라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거짓말로 인해 잃어버린 작은 믿음 하나가 향후에는 엄청난 장애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두개의, 작은 불신같은 것들도 아니고 상대가 말하는, 행동하는, 그 모든것들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사랑은, 그 관계는 이미 죽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반대로 얘기하면 어떻게 신뢰를 구축해 나아가는가에 사랑의 유통기한이 달라진다는 말로도 해석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어떻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정답은 연애의 모든것은 상호작용이라는 평범한 원칙에 맞는, '함께'가 될 것이다. 많은 연인들이, 이런 문제들로 인해 한번쯤은 다투곤 한다. 서로의 이성친구에 대한 문제 등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때마다 등장하는 멘트가 이런것이다. 넌 왜 날 그렇게 못믿어? 널 못믿는게 아니라 그X를 못믿... 이런. 여기서 문제가 되는것이 그런거다. 믿음은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에게 '넌 날 사랑하니까 넌 날 믿어' 라는 한마디로 당연히 생겨나게 되는것은 아니다. 믿음을 얻고 싶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하고, 믿고 싶은 사람은 너무 주관적인 입장에서 상대의 행동을 해석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믿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을 서로 쌓아가는 것이란 얘기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얼마나 상대를 믿을 수 있는가 - 하는 문제는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 와 종종 직결되는 문제다.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서로에게 불신의 벽을 쌓아나가지 않도록, 그리하여 결국 그 사랑의 종언을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미 그 사랑이 호흡기를 떼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면 당신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그 높다랗게 세워진 불신의 벽을 깨뜨리려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상조업체에 전화라도 할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앋.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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