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여'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10.09.06 혼자 떠나는 여행에 관하여 10
  2. 2010.08.23 이성으로써의 매력이란 '힘'에 관하여 14
  3. 2010.08.16 다면성에 관하여 8
  4. 2010.08.05 쉽고 편하게란 가치에 관하여 4
  5. 2010.08.04 미래지향적 사고에 관하여 6
  6. 2010.07.20 행복의 딜레마에 관하여 10
  7. 2010.07.14 인생과정주의에 관하여 12
  8. 2010.07.03 외로움에 관하여 - 1 - 6

혼자 떠나는 여행에 관하여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바쁜 인간인지라 마음처럼 여행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다.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볼 참이면 또 그 시간들을 할애해야 하는 관계들이 있는지라 더더욱 힘들다. 소시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뭐, 그땐 그것으로 좋았지 하며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성격이지만 유일하게 아쉬움이 많이 남는것은 충분히 시간이 많이 남을적에 충분히 많이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며 점점 더, 그렇게 마음 내키는대로 여행을 다니기가 수월치는 않을 것이란게 너무 뻔히 내다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럿이 가는 여행이건 혼자 가는 여행이건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고 맛이 있다고 하겠지만 굳이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망설이다가 혼자 다니는 여행이 더 좋다고 답변할 것이다. 물론 친구들 여럿이 모여 여전히 함께 있을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하며(이제는 좀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란을 피우고 다니는 것도, 연인과 함께 구름위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알큰달큰한 여행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굳이' 따지자면 말이다. 그것은 단지 혼자 떠나는 여행이 누구나 예측 가능한 몇몇 장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스케쥴을 맞추느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거나, 함께 다니는 이들과의 의견차이로 좀처럼 시원시원하게 움직일 수 없다거나 하는 단점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장점들 외에도, 혼자 가는 여행은 혼자 가는 여행만의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랄까.

그 무언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른 어떠한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자기대면의 시간' 이 혼자 가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온전한 자기대면이란 것은 우리네,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것이다. 흔히 자기대면이라고 하면 방안에 틀어박혀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런것은 자기대면의 어떤 하나의 수단이고 방법일 뿐이지 그것만이 자기대면의 유일한 방법이거나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히려 방구석이나 산중에 홀로 틀어박히는 것 보다 홀로 자유롭게 새로운 세상과 만나가면서, 그 경험의 와중에 스스로의 내면과 만나는 것이 더 삶에 유용한 자기대면의 방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사람들에게 혼자 여행을 떠나라고 권하는 이유이기도, 스스로가 그렇게나 혼자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해 보면 이렇다. 실제로 혼자 여행을 다니는데 익숙치 않은 사람들의 경우, 우연치 않게 혼자 여행을 가게 되는 경험을 하더라도 뭐 속 편하고 괜찮긴 했는데 - 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아직 그런 시간들 속에서 스스로에게 좀 더 집중하는 데 익숙치 않아서다. 간단히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보다 몇 배는 많은 선택을 직접 내려야 한다. 그 선택의 순간들에, 나는 왜 그런 선택들을 하였는가? 를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어딘가의 술집이나 식당에서 혼자 밥이나 술을 먹을때 나는 왜 그 장소를 선택하였고 왜 그 음식, 그 술을 선택하였는가? 누군가가 우연히 말을 걸어올때 나는 적당히 대꾸하고 자리를 피했는가 혹은 함께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가? 어떤 이유로 그런 자리를 피하거나 좋아하게 만들었는가? 저기 앉아 있는 저 사람도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혼자 있는 것일까? 나는 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은가 혹은 걸고 싶은데 용기가 없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것이다. 삶이란것이 어차피 선택으로 가득차 있다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이란 것은 그런 순간 순간의 선택들을 압축이라도 한듯 더 타이트하게, 짧은 시간 내에,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도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없을 만한 찰나의 시간에 그 무수한 선택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선택들에 '왜?', '무엇을 위해서?' 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볼만한 여유도 충분히 존재한다. 혼자 여행을 떠나서 10시에 잠들고 7시에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처럼 생활하는 사람이 있던가? 무수한 경험과 그 경험들 속에서 스스로의 무수한 선택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때쯤엔 낮동안의 그 무수한것들을 스스로 돌아보고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는 점에서 그 시간들을 어떻게 스스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랄까.

여행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봤음직한 오래된 화두로 이런 것이 있다. 버리려고 떠나는지, 얻으려고 떠나는지 말이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나'와 만나고 돌아온 여행길이라면 그 모두를 다 얻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스스로가 진심으로 바라는것이, 향하는 길이, 내리는 선택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알고 나면 앞으로 걸어나가는 걸음은 한결 가볍고, 무언가 가득 채워진 마음으로 신나게 한걸음 한걸음을 다시 옮겨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권하곤 한다. 떠나라고, 다녀오라고, 멀리 떠나서, 스스로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어느 공간에서, 자신과 실컷 이야기를 나누다 오라고. 그건, 무조건 남는 장사라고 말이다. 

이성으로써의 매력이란 '힘'에 관하여

현실에서 슈퍼히어로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보는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히어로들의 슈퍼 파워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그런 슈퍼 파워들을 어떤 사람들이 우연히 얻게 되었을때 영화에서처럼 대단히 정의롭고 대단히 이타적인 행위를 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심플하게 말해 그렇다. 어떤 사람이 슈퍼 거미에 물려 거미줄을 타고 날아다니고, 엔간해선 다치지도 않는 강인한 육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악당들과 싸우느라 자신의 삶을 허비하기보다 그 파워를 이용해 무언가 한몫 잡아 편안히 지낼 것이라고 추측하기 더 쉬울 것이란 얘기다. 그 누가 목숨을 걸고 악당들과 싸우다가 직장에서 짤리고 여자친구에게 차일 위기에 놓이겠는가.

그것은 비단 어떤 개개인의 낮은 도덕성이나 정의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슈퍼 파워' 란 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의 속성' 이란 것이다. 그것이 어떤 육체적 힘이건 현실사회에서의 어떤 권력이건간에 어떤 개인에게 종속된 어떤 힘이란 것은 언제나 대단히 이타적으로 사용될 가능성보다는 그 힘의 소유자를 제외한 타인들에게는 재앙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힘의 속성이라고 해야할지 인간의 속성이라고 해야할지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거창하고 엄청나게 대단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여기서는 아주 작은, 사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작지만 사실 꽤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힘의 남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이성으로써의 매력' 이란 것을 '힘' 이라고 따져보는 것은 어떨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이성으로써의 매력이라는 힘을 함부로 사용한결과 타인에게 재앙이 되는 경우 - 그쯤 되면 재미있게도 우리의 머리속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우연한 대화끝에 끄집어내는 농담같지만 농담같지 않은 흔한 말 하나가 동동 떠다니게 된다. '얼굴값을 한다' 거나 '예쁜(멋진) 사람은 좋지만 예쁜(멋진)걸 알고 있는 사람은 싫어' 라는 말을.

그런 말들을 우리가 흔하게 접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자신의 이성적인 매력을 자각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얼마나 커다란 재앙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이도 보고 듣고 느꼈다는 사실의 증거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가 클수록, 곧 그 사람의 매력 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람은 타인에게 재앙이 될 수 있는 요지가 충분하다. 지금 이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어장 속 물고기와 같은 존재들이 어장관리가 애매모호하게 흘려쓴 싸이 글귀 하나로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겠는가. 언젠가 잘나갔던 때를 떠올려보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나는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올라 아쉽기도 다행이기도 한 복잡미묘한 심정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사실 또 따져보면 누구나 자신의 전성기라 할만한, 스스로의 어떤 매력이 정점에 달하는 어떤 시기란것은 있게 마련이고 그런 시기에 그런 것들을 분명히 자각하게 될 경우는 딱히 원하지 않더라도 어떤 충동들에 이기지 못해서 의도치 않은 상처를 누군가에게 남기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들까지야 딱히 네 죄를 참회하라 하며 딱딱한 설교를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어찌 보면 참 별것도 아닌 힘에 도취되어 거리낌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안기는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향후 그 힘이 사라질때 느끼는 공포감이나 그 힘의 그릇된 사용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세금같은것은 당연히 더 커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알기 쉬운 예를 들어 한해 두해 넘어갈수록 이성을 유혹하는것이 어려워짐을 체감하게 되는 바람둥이 남성의 심리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아 옛날이여를 아무리 부르짖어본들 그 마음의 허함이 덜어지겠는가. 그렇다고 흐르는 시간을 거꾸로 돌릴것인가.

이쯤에서 정리해보자면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성으로써의 매력이란,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그 힘을 휘두름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하는 행동은 어느 선에서는 멈추는것이 좋다는 얘기다. 힘의 충만함을 만끽하되, 함부로 타인들을 이용해서 그 힘을 증명해보고자 하는 것은 그만둘것. 현실세계에서의 힘과 권력이란 것이 슈퍼 히어로 무비와 명백하게 다른 것들 중 굉장히 중요한것이 한가지 있는데, 힘을 가진 사람들은 꽤나 많은 경우에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권세는 십년을 가지 못하고 꽃의 붉음은 십일을 넘기기 힘들다는것. 분명히 존재하는 힘을 당연히 사용해야 할 경우에도 사용하지 못하고 지레 겁먹어 주춤대는 것도 문제지만, 별 것도 아닌 힘을 가지고 뭐 대단한 천년 권세라도 얻은듯 거들먹거리는 것도 그만한 꼴불견이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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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성에 관하여


사람은 다면체다.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단면은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단면은 살아가며 겪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어느 순간에 생겨날 수도 있다. 한 사람을 두고 볼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면들을 다 파악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이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단면들에 대해 100% 파악하였소 한다면 나는 그를 달인이나 도인으로 부를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얌전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광적인 키보드 워리어로 변신한다거나 하는 정도의 다면성의 표출은 오히려 상식선의 일이란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저 사람의 내면에, 어떤 무수한 단면들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그저 어림짐작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정도일 뿐.

타인의 다면성은 그렇다 치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히나 전혀 알지 못했던 어떤 단면에 대해 새로이 깨닫게 되는 순간이란건 사실 불행하게도 좋은 상황보다는 달갑지 않은 상황일 경우가 확률적으로 더 많다. 우리가 가끔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지 혹은 하고 있지 하며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상황같은 것들 말이다. 거듭되는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단면일 뿐이라고 종종 말하곤 하는데 적어도 나의 믿음은 그러하다. 스스로의 못난 부분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하나의 모습,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마 스스로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또 하나의 나라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어쨌든 그렇게 의도치 않은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그 전까지는 몰랐던 스스로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부정하려 들지 말라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하나의 단면이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고스란히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당신이 설령 치명적인,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떤 단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엔 놀랍게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단면을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각보다는 굉장히 높은 확률로, 스스로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단면에 대해서 오히려 애정을 가지는 사람을 만날수도 있다. 자신의 못난 부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외면하려 하거나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부족한, 못난 단면들은 당신을 집요하게 괴롭힐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이 잠시라도 그것들에 대해 경계를 늦출때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골치아픈 문제들을 일으킬것이다. 당신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그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어떤 단면을 들킬수도 있다. 그러한 자괴감은 또다시 마이너스적인 에너지로 작용하여 당신의 그 못난,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복잡한 각도로 비틀어놓을 것이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될수록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장점들을 꺼내보일 수 있는 기회들을 점점 놓치게 된다는 것이랄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부족한 면을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나긴 삶의 전체로 보았을때, 지금 이순간에라도 스스로가 가진 그런 부족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각도로 바라보면 오히려 운이 좋은 일이다. 어떤 병이건 늦게 알수록 고치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간단한 예를 들어, 스스로의 술버릇을 명확히 알고 있는 이라면 적어도 미래의 장인 장모님을 뵈러 간 자리에서 술에 취해 노상방뇨를 하거나 식당에서 난동을 피우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 것이다.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무수한 나를 하나 둘씩 알아가는 것은, 지금 당장에야 이따위것 알고 싶지 않았어 하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도 멀리 내다보고 생각한다면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때때로 즐겁고 우습기까지 하지 않던가. 

만약 당신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당신 속에 있는 반짝이거나 거무틔틔한 어떤 단면들에 대해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의 삶은 조금 더 수월하게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은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한 신의 선물이다. 당신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얼마나 무수한 단면들이 존재하건간에, 당신은 스스로 나이고 싶은 나를 선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Default 설정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삶의 굴곡속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단면들이,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며 때때로 스스로 원하지 않은 단면들이 튀어나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나는 어떻게 살아가려 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당신의 내면에 굴러다니고 있는 그 다면체는 어느샌가 제자리를 찾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다. 분명히 말이다.

쉽고 편하게란 가치에 관하여


만약 당신이 삶에서 부딪치는 어떤 선택의 순간에 그 선택을 위한 여러가지 가치판단의 기준들 중에서 '그것은 얼마나 쉽고 편한 것인가?' 라는 기준을 다른 기준보다 뒤로 미뤄둘 수 있다면 확실하게 당신의 삶은 더 다양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매 순간 그런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들의 수도 종류도 다를 것이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말이다.

이것은 단지 누구나 수행자처럼, 고행하는 것처럼 살아야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얻을 수 있다와 같은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다. 늘상 주변인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누구나 지저스, 석가, 소크라테스처럼 살 이유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산속에 움집을 짓고 목탁을 두드리며 살 필요도 없고,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리며 스스로의 몸을 채찍질할 필요도 없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다. '쉽고 편한' 이란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보다 '조금만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좋다는 것이랄까.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것은, 그 '쉽고 편한' 이란 가치가 우리네 인생에서의 그 무수한 선택의 순간들에 완전히 배제되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는 것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람은 쉽고 편한쪽을 선호하게 되어있는 것 아니던가. 좀 과장해서 얘기하자면 생존을 위한 인간의 활동 이외의 나머지 활동들에는 모조리 저 쉽고 편한이라는 가치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어있다. 어떤 선택을 할 적에 스스로는 전혀 쉽고 편한 어떤것을 찾으려는 생각같은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뒤돌아보면 그 순간에 그것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는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생리다.

직업을 선택할때, 사람을 만날때, 공부를 할때, 더 작게는 밥을 먹으러 갈때, 잠을 잘때, 쇼핑몰에서 물건을 살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쉽고 편한' 이란 구호를 외치고 있는가. 한번쯤 스스로의 지난 선택들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것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라. 분명 스스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쉽고 편하게'에 의해 결정된 것들이 있을것이다. 그러면 또 생각해보라. 과연 그 순간에, 조금 불편하거나 어렵더라도 - 를 선택했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모든 가정은 가정일 뿐이겠지만, 다른 결과들, 어쩌면 더 나을수도 있는 결과물들을 분명히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다른 선택들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다른 가치들이, 당신에게 더 나은 가치가 될 수도 있다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쉽고 편한이란 가치를 맹목적으로 쫓는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우선 쉽고 편한에는 절대만족이란것이 없다. 한번 쉽고 편한 것을 위한 선택을 하는것은 바로 다음의, 더 쉽고 더 편한것에 대한 욕구를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더 쉽고 더 편한것, 그보다 더 쉽고 더 편한것... 과장된 예일지도 모르겠지만 몇해전 나왔던 픽사의 애니메이션 월-E에서 그려졌던 미래를 보라. 자리에 앉아서 모든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덕분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게 되는. 그게 꼭 과장이라거나 비약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 아니던가.

더 중요한 문제는 쉽고 편하게가 가치판단의 우선순위에 오를 경우에 우리는 참 '다양한' 가치들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애초에 박탈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움직일 적이면 그만큼의 거리를 걷는 동안 만나게 되는 무수한 것들을 놓치게 된다. 들풀의 노래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고 길냥이의 조심스런 움직임따윈 애초에 의식할 수 조차 없어진다. 과연 그것들은 우리가 그렇게 손쉽게 포기해도 좋을 만한 가치들인가?

한가지 스스로 겪은 이야기를 더 해보자. 언젠가 한번 긴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갈 때였다. 한 커플이 비슷한 곳에서 지하철에 타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손을 잡고 다정하게 자리에 앉은 후에, 각자 노트북과 PMP(로 보이는 것을) 꺼내더니 각자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이어폰까지 낀채로 각자의 세계에 몰입하던 두 사람은 한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 다시 자리를 일어나 열린 문을 향해 손을 잡고 걸어갔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개인적으론 참 낯선 광경이었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던가. 물론 그 최신 IT 기기속에도 각자가 즐길 수 있는 무언가들이 있었겠지만 그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동안 왜 서로의 눈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걸까, 더 다정하게 속삭이고, 함께 있음을 만끽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그 순간에 그들이 서로를 향하지 않은 만큼, 더 나은 가치를 그들은 얻은것일까. 그런 의문이 생겼던 것이랄까.

물론 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분만큼은 꼭 얘기하고 싶은것이다. 인생이라는 길기도 짧기도 한 한정된 시간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가치를 얻고, 어떤 가치는 내려놓으면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기본적으로 그런 다양한 가치들에 대해 폭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좋고 이것만 최고다 이것만 있으면 장땡이다 하는 생각들은 종종 삶에서 '그것'을 얻었을때 길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삶을 가볍게 느끼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 아니던가.

긴 이야기의 끝으로 다시 한번 정리해본다. 만약 지금 당신이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건 좋다. 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꼭 쉽고 편해야만 좋은것은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해보는건 어떨까. 그것은 분명 당신에게 지금껏 당신이 생각해보지 못한, 다양한 가치들로 눈을 돌리게 해줄 것이다. 인생은 길다. 쉽고 편하게가 어쩔 수 없이 최우선 가치로 작용되게 되는 날들도 언젠간 올것이다. 그때까지 조금 뒤로 미뤄둔들, 인생이 뭐 그리 유별나게 어렵고 불편해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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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향적 사고에 관하여

사람이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지 -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와중에 툭툭 던져놓곤 했던 말이다. 대충 그렇게 뭔가 머리속에 들어있던 이야기들을 꺼내게 된것이 고등학교 시절 이후니까 대충 처음 그런 이야기를 했던것도 그쯔음일 것이다. 스스로가 그렇게 미래지향적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노릇이지만 어쨌든 시건방지게도 저 말을 많이도 했었더랬다.

재미있는것은 처음 그런 생각, 그런 말들을 하게 된 이후로 십수년이 지나는동안 그렇게나 많이 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 말을 입에 올렸을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지금 그 말을 할적에 담고 있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무게와 의미가 완전히 다른, 그 말의 근간에 흐르는 어떤 내면의 무언가들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얼마전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로 이렇게 정리해서 남겨본다.

오래전 그 시절들과 현재의 개인적인 미래지향주의가 달라진 부분은 간단히 말해 이런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완전히 달라졌다는것. 어린 시절, 사실 몇 해 전까지의 나는 그랬다. 스스로를 돌아볼적에 부족한 점, 못난 점이 너무도 많았고, 스스로에 대해 아 이정도면 좀 쓸만하지 않음? 과 같은 부분이 전무하다시피 했던것. 지금 돌아봐도 그 시절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겪어온 자존감 부족이었던 것이랄까.

그러니 당연스럽게도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볼적이면 그 시절의 나는 언제나 못나고 부끄럽고 지금도 모자란데 더 모자랐고... 결국 그 시절의 미래지향주의란 것은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수동적 측면의 것이었다는 얘기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제도 부족했고, 오늘도 부족한데,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부족할거라면 살아갈 의미가 없어라는 극단적 생각까지 가지 않았던것이 신기한 노릇이다.

어쨌든 그렇게, 지난 무언가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억지로 앞을 향했던 것이 그렇게 썩 긍정적인 무언가만을 가져다주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앞을 바라보면서도 뒤를 두려워했고, 작고 큰 실패를 할때마다 지난 과거의 부족했던 모습들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것이 아닐까 하는 강박에 가까운 질책을 스스로에게 가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그만큼의 불안정함과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어쩌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을 그림같은것으로 표현한다면 이럴 것이다. 절뚝거리며, 다리를 질질 끌며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달리다 멈추다를 반복하며 기껏 달렸는데 얼마 가지도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 그런것이 아닐까.

어느 시점부터 그런, 과거의 못난 모습들마저 그저 나의 일부, 살아온 과정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는 조금씩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정말로 그저 웃으며 그땐 그랬지, 그래도 그때도 이런건 내가 좀 - 이란 우스개를 할 수 있는, 과거의 일을 얘기하며 짖궂게 놀리는 친구들에게 어쨌든 즐거웠잖아? 라고 능글맞게 넘겨버릴 수 있는. 스스로의 부족함에 집착하기보다는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 것인가에 더 몰두하는 그런 식의 변화들이 삶에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과거에 대해 썩 예쁘게 바라보진 못하고, 가끔 스스로의 부족함에 한심함까지 느끼곤 하지만 예전같지는 않은. 천천히 더 나은 변화를 만들어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급함은 적당히 내려놓을 수 있는 상태.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똑같이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등지고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건지, 어떤 것을 딛고 올라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불확실성의 세계속에서 어느정도는 든든한 기분까지 들게 된다는것.

글을 맺으며 내리는 결론은 그런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는 없고, 모두 스스로가 바라보는 방향이, 겪어온 과정도 다를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진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스스로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일련의 애정들은 가져보는것이 좋을것이다. 그 모든 자신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의 자신또한, 당장 몇분 후면 금새 과거의 나로 남겨질것이다. 가끔은 그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며, 그래도 수고했어 - 하며 어깨라도 툭툭 두들겨주는 것은. 바톤 터치다, 이제 간다 - 라고 외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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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딜레마에 관하여

삶은 행복과 불행이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의 딜레마다. 우리가 어떠한 행복을 느끼건, 그것이 크건 작건 질적으로 훌륭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그것을 느끼는 순간, 그 찰나가 지나고 나면 그것은 곧장 과거형으로 바뀐다. 행복해야 할 순간에 다가올 불행을 걱정하느라 그것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 역시 썩 권장해주고싶은 삶의 태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행복감이 이대로 쭈욱, 앞으로 영원까지도 이어질거란 망상을 한다거나 그러기만을 바라는것도 우스운 일인 것이다. 물론 사람의 욕심이란건 끝이 없고,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이란 것엔 어떤 영구적인 포만감같은것이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상 행복을 갈구하고, 때로는 그것이 행복한 순간에 더 큰 행복감을 원하느라 스스로 느껴야 하는,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행복이란 것의 찰나성은 그래서 결국 다음과 같은,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데 유익한 몇몇가지 깨달음을 남겨주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다. 우선, 우리는 누군가가 행복해보인다고 해서, 누군가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내가 안고 있는 그것보다 커보인다고 해서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다. 아마도 그는 그가 누린, 누리고 있는 행복감과 정확하게 같은 무게의 고난과 어려움을 앞으로 남은 생동안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보유하고 있는 부의 크기와도,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의 수와도, 그가 가진 남들보다 세상살이에 유리한 어떤 장점과도 완벽히 무관하다.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인과다. 높이 나는 새도 반드시 날개를 쉬어야 하는 때가 있고 밀려온 파도는 반드시 물러가야 하는 때가 있는 것과 같은. 물론 스스로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그런 불행이나 어려움들을 혹자는 수월하게 받아들이거나 감내하고 혹자는 실제보다 더 부풀려 크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누구건간에 그런 행복과 불행의 교차에서 벗어날 도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평범하고도 단순한, 하지만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한다면.

큰 행복을 느낀 사람일수록, 그것도 삶이라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들 중 유난히 두드러지는, 마치 저 하늘에 유난히 반짝이고 있는 별처럼 반짝이는 행복을 느낀 사람이라면, 지금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생으로 내딛는 걸음은 조금 더 단단히, 굳세게 내딛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 느끼고 있는 그 행복감들은, 앞으로 내딛는 그 걸음들을 자꾸만 뒤로 잡아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어 삶을 정체시키는, 썩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삶을 소모하는 어떤 무거움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시간은 앞으로만 흐름을, 그리고 사람 또한 생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계속 앞으로 앞으로 이어나가야 함을 분명히 깨닫고 더 힘차게, 굳세게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그 행복들의 소중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 에너지를 두 다리에 가득 모아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제 아무리 떠나고 싶지 않은 행복이라 한들, 어느 순간엔 그것을 등뒤로 하고 걸어가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는것. 그것이 참으로 달갑지 않은 행복의 딜레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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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정주의에 관하여

기죽지 마라. 조급해하지 마라. 지금 당장 미래에 대한 밑그림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다고 해서, 목표가 무언지, 아니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해서 미리 겁먹고 초조해하지 마라.

옆집 개똥이는 난 지상최강의 요리사가 될거야!(스티븐 시걸이라거나) 하고 뒷집 말똥이는 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될거야! 라고 하는데 나는 특별히 재주도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루하루 산소만 축내는 산소벌레일 뿐이지라는 괜한 생각 하지 마라. 목표의 원대함이 그 삶을 반드시 빛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꿈의 크기가 그 사람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삶이 그 목표와 함께 종료되는 것도 아니다. 시대의 대표적 먼치킨인 김연아도 이제 다시 목표를 세워야한다. 삶은 크고 작은 목표들을 이루고 이루려 노력하는 끊임없는 반복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어떤 확고함 역시 마찬가지다. 청춘에는 더더욱 그런것이 자연스럽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결심하고, 다시 그림을 수정하고, 부딪치고 겪으면서 계속 흔들리고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이다. 누구나 그렇다. 지상 최강의 요리사를 꿈꾸는 누군가도 때론 재능을 살려 특공대로 갈까 고민할 수도 있다. 난 결혼 안하고 혼자 살것같아란 모든 확고해보였던 생각들이 현실로 이뤄졌다면 지금쯤 인류는 이미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췄을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순간의 그 모든 불안정성을 가지고 그대 삶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어떤 분명함도 없는 상태에서조차, 존재하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이 빌어먹을놈의 삶이란 것을 끝까지 살아내어 '나만의 삶' 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목표다. 다행스럽게도 이 목표는 당신의 삶이 다하는 순간 이전엔 이룰 수 없다. 삶의 모든 순간은, 이 거대한 목표 앞에서는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 나는 가장 안정적인 인생과정주의의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거다.

삶에서의 모든 괴롭고 힘든 순간에, 당신은 인생과정주의를 사용할 수 있다. 애인에게 차였을때, 오래 준비해왔던 시험에서 실패했을때, 집이 망했을때, 믿었던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았을때... 그 모든 순간에 당신은 매우 유용한, 고통을 줄여주고 숨을 고를 여유를 안겨주는 매직 워드를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순간도 지나가리라, 혹은 단지 과정일 뿐이야 - 라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것은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면서도 공짜다. 놀랍지 않은가! 마인드컨트롤의 최종 비기라고 본다해도 좋을것이다. 인생과정주의란것은 말이다.

무엇을 향해 가는 과정이냐고? 그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저 위의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정리한다. 삶은 기나긴 여정이다. 당신이 눈을 감는 순간에 시민 A로써의 삶으로 마무리하건 슈퍼히어로로써의 삶으로 마무리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삶의 전 과정이 완벽하게 동일한 삶 같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삶을 더 빛나게, 나의 의지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당신의 그 기나긴 삶 전반에 걸쳐 당신의 의지가 끊이지 않아야 함을 의미하겠지만 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후의 최후까지 나만의 삶을 완성시켜나가는것. 그 거대한 여정 속에, 지금 당신이 처해있는 어려움이나 괴로움들은 그저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기껏해야 별빛속의 새똥정도 말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라. 초조해하지 마라. 그저 묵묵히, 인내를 가지고 끈질기게 걸어가라.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아 물론 그 인생의 길이가 당신의 나태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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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관하여 - 1 -

사람으로 나서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 사람으로 나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업과도 같은 외로움을 마냥 달갑게 맞을 수 있는 사람은 또 어디 있겠는가. 외로움이란 그런것이다. 피하려 한다해도 피할 수 없고, 채우려 한다해도 다 채울 수는 없으며, 도망치려 한다해도 어느새 뒷덜미에 달라붙어 있고, 그저 그러려니 받아들이려 해도 순간순간 오싹한 소름처럼 일어나는것. 주변에 사람이 많으냐 적냐를 떠나 누구나 어느정도는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것,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도 조금이나마 덜 - 이란 바램으로 몸부림치게 되는 것.

개개인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외로움을 조금 덜 느끼고, 혹은 조금 더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때론 그게 무엇인지도 까먹은채 지낼 수 있는 운좋은 날도 있을것이다. 스스로가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아도 그렇다. 때론 그렇게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몸부림치던 날들도 있었고 때론 앞으로의 삶들에 더이상 그런것들은 없을거란 희망에 들떠있기도 했었다. 그렇게 들떠있다가도 또 어느 순간엔 한순간에 세상에 홀로 던져진듯한 외로움이 치를 떨기도 했었고, 어떤 날들에는 그 모든것들이 우습고 바보같아서 멍하니 쓴웃음만 흘려대던 날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웃고 울고, 때론 오기를 부리며 이겨내려고 발버둥치고 때론 근근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때론 모조리 잊어버렸다가 때론 해일처럼 일어나는 외로움에 휩쓸려 난파당하기도 했던, 그 시간들을 거쳐 이제야 조금, 그, 사람의 삶에 있어 평생의 골칫거리인 그 외로움이란 녀석에 대해 아주 약간의 깨달음이 있어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녀석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이다.

골치아픈것, 나를 괴롭게 만드는것, 제거해버려야 마땅한것, 고쳐내야 하는 질병, 극복할 수 있는 어떤것으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외로움이란 녀석은 심술궂은 작은 마귀라도 되는듯 더 집요하게 달라붙고, 그대의 마음 속에 스스로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을 넓히려고 버둥거릴 것이다. 자꾸만 그대를 조급하게 만들어 애초에 그대가 바라지 않았던, 그대의 삶을 어지럽힐 좋지 못한 인연들을 맺게 유도할 수도 있고, 자괴감과 절망감들을 키워 누구에게나 당연한 그런것들이 나 자신에게만 유난히 더 나쁘고 더 좋지 못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들을 키워낼 수도 있다. 단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치 않는 관계를 맺고, 관계속에서 또 외로움을 느끼고, 관계가 파괴됨에 따라 좌절을 경험하고, 그러면서도 또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스스로에게 유익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악순환속에서 스스로의 귀중한 청춘의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들을 또 얼마나 많이 보게 되던가.

그런, 지리한 악순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아주 작은 관점의 변화로 피할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외로움이란 녀석을 다시 바라보라고. 그것은 앞서 말한것처럼 흉측한, 나쁜, 제거해야할, 극복해야할 어떤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자연스러운것,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를 가지는것, 밥을 먹으면 똥이 매려운 것처럼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이라고.

어떻게 그 괴롭고 힘든것을 그렇게 무던히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또 왜 그리 어렵기만 하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는것은 어떨까. 만약 어느날, 하루 아침에 내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 이란 녀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치자. 혼자 있건 둘이 있건, 연애를 하건 말건 결혼을 하건 말건 친구가 있건 없건 그런것들과 완전히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나 내가 죽을때까지 외로움을 느낄 일이 없다고 가정을 해보잔 얘기다.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기적과 같은, 환희만이 존재하는 경험일까? 불행 끝 행복 시작마냥 그 순간부터 나는 행복의 완전체가 되어, 평생을 눈물 한방울 흘릴 일 없이 살아가게 될까?

아닐 것이다. 완전히 외로움이 사라진 세상에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찾지 않는 것. 물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단지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외로움이 없더라도 너를 만나고 그를 만나고 그녀를 만나면서 또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간절함이다. 우리는 더이상 간절해지지 않을것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사람에 대해 욕심을 내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서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서로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삶은 절반쯤 밋밋해지고 심심해질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렇다. 외로움이란 것은, 사람이 사람을 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라는 것이다. 사람의 무수하고도 복잡 다단한 그 무수한 욕구들중에서도 가장 바닥에 깔려있는, 사람이 사람을 찾고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게 만들어주는 가장 기본이 되는 힘이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외로움에 힘겨운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렇게 외로워하고 있는 스스로를, 그 고독감까지도 조금 더 소중히 여기길. 바로 그 마음이 그대를 끊임없이 사람을 향하게 만들어 더 나은 관계속에서, 더 나은 인연들 속에서 조금 더 충만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그대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리라고. 지금 겪고 있는 그 가슴 시림과 괴로움들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단지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그렇게 사람들을 향해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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