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1 - (여는 글)


사랑. 

사실은 이 조용한 블로그에 은근슬쩍 이 카테고리를 열적에 처음 쓰고자 했던 글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 어느정도는 나도 사랑이란 것을 말할 수 있을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 나이보다는 그 뭣이냐, 그래도 너무 가볍지도 너무 죽죽 쳐지지도 않게, 나의 사랑, 사람들의 사랑, 그 모든 사랑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은 죽죽 써볼 수 있지 않을까 - 라는 생각에 기인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냥 별 것 없는 단상에 가까운 글 세개만 달랑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역시 무모한 자신감이었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 라는 이문세씨의 노래를 다시 흥얼거리지 않더라도 여전히 나는 그 사랑이라는 녀석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낼 적이면 알 수 없군... 이란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혓바닥 위로 단어를 도르륵 굴리면 마냥 달콤하기만 한, 하지만 입을 오물거리며 곱씹어 보다 보면 왠지 모를 쓴물이 한켠으로 번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그 사랑이라는 녀석. 녀석의 실체라는 것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른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서야 어렵게 어렵게 이렇게 첫 이야기를 시작해보는 이유는 별거 없다. 날씨탓이다. 맑은 햇살, 서늘한 바람, 한없이 푸르고 높은 하늘. 그 모든것이 그저 마음을 가만히 두드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나 멋대가리 없는, 소프트웨어 기업의 미래와 현재와 같은 딱딱하고 복잡스러운 레퍼런스들만을 잔뜩 읽어대며 오만가지 서비스,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으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한대 태우러 나가 바라본 하늘이, 날씨가 어느핸가 세상의 모든것들이 사랑으로만 충만했던 어느 가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는 이유 하나 뿐이다. 역시나 멋대가리는 없지만 흥미롭고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있고, 듣도보도 못한 나라로 잠시 떠나게 될 지도 모르니 어쩌면 이 글들 역시 계획들과는 반대로 조루처럼 찍 싸버린채 끝나버리는 글이거나, 전설속에서만 연재가 유지되고 있다는 모 만화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쯔음에만 하나씩 남겨지는 글들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들 어떠랴. 뚜렷한 사계절이란말이 무색하게 동남아틱한 날씨들로 변해가는 한해한해를 겪고 있으나 최소한 앞으로 내가 눈을 감을 적까지는 이런 가을 날씨는 매해 하루쯤은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이 늙으면 느는건 여유밖에 없는 거다 원래. 느긋해지는건지 게을러지는건지는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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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기억들 하시는지? 처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게 언제쯤이었는지? 혹자는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5학년때 우리반 부반장 아이스케키하고 도망치다 담임선생님께 잡혀 신나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눈이 빨갛게 물든채 훌쩍이고 있는 그 아이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왠지 모를 미안함과 왠지 모를 심술을 동시에 느끼며 괜한 심박수 증가를 감지했을 적에 사랑의 도를 깨우쳤노라 -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흔치 않은 경우겠지마는. 마침 날도 좋겠다 한번쯤 떠올려보는 것은 어떤가? 뭐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랑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이 '남녀간의 애정과 호르몬 분비에 대한 진지한 고찰' 따위일 리는 없으니 제법 달달한 기분, 명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못하더라도 꽤나 좋은 기분, 훗... 그땐 참 그랬더랬지 하는 막연한 풋풋함들이 먼저 일어나지 않는가. 그랬다면 그것은 이 철없는 삼촌이 그대들에게 보내는 가을날의 선물이다. 하하. 이런걸 공 안들이고 생색내기라고 하지. 

그런데, 그러나, 아쉽게도 나의 경우에 - 처음 사랑이란 것에 대해 고민했던 순간은 그렇게 썩 달콤하고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아 내 소시적 풋사랑(개인적으로 풋사랑과 첫사랑은 좀 구별해서 불러주고 싶은 편이다. 이유는 나중에) 이 굉장히 슬프고 괴롭고 구질구질한 기억들로 점철되어있었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내가 얘기하는건 그러니까 생애 최초로, '대체 사랑이란게 뭐길래?'라고 의문을 품었던 순간을 얘기하는 거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는 그런 의문을 품었던것이 풋사랑에 빠진 타이밍보다 빨랐다는 것이랄까. 사실 뭐 당연한거 아닌가. 요즘에야 더 빨라졌겠지만 에지간히 TV도 보고 책도 읽고 할 수 있을 적이면 얼마나 사랑이란 말이 넘쳐 흐르는가. 그것도 또 굉장히 미화된 채로 말이다. 사랑이란건 좋은거야. 환상적인거지. 마법이지. 끝내주는거지. 마치 술이란놈만 마시면 미칠듯한 흥겨움에 돌입하는 어른들을 보며 저건 무슨 매지컬 포션이냐... 라고 어린이들이 궁금해하게 되는 것처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건갑다. 아빠랑 엄마랑 사랑하면 내가 뿅 생기는거구나. 뭐 그런 막연하고 막연하고 또 막연한 '개념'을 잡게 되는게 먼저지 않던가. 뭐 밋밋하게 그냥 단어장에서 보고 외울수도 있고. 

그러니까 내가 진지하게 '사랑이란 놈은 뭘까?' 라고 고민을 시작하게 된건 저렇게 미디어를 통해 일단 개념은 잡고 그런갑지 - 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근데 진짜 뭘까 하게 된다는 건데...아, 본격적으로 내가 '사랑이란게 뭘까?'라는 진지한 고민을 품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밝힐 것은 아마도 이 이야기들에는 나란 사람의 옛 이야기들은 많이 나오게 되겠지만 나란 사람이 사랑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거-의, 단편적인 에피소드 외에는 찾을 수 없을 거란걸 먼저 쓰고 넘어가야겠다. 항상 주변인들에게 얘기하듯, 난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썩 좋아하지 않는다. 막말로 뭐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어떻게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 사람이 그 기억들을 그저 둘만의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은건지 어쩔런지는 알래야 알 수도 없지 않은가. 이를테면 예의란거지. 음음. 아 갑자기 흐름이 끊겨 미안한데 어쨌든 이런 부분들은 스스로 좀 어느 시점 이후로 민감해하고 있는 부분들이라 말이다. 자, 그럼 이야기를 이어가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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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번째로 사랑이란놈이 뭔가 하며 머리를 쥐어뜯게 된 계기가 그렇게 달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 덕분이다. 나를 아는 지인들은 잘 알겠지만 난 어린시절중 '꽤 오랜 시간'을 재래시장에서 보냈더랬다. 뭐 학교를 안다니고 그런건 아닌데 일단 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유년기 교육은 아버지의 하드코어 학습법(...) 으로 대체, 초등학교(국민학교였지) 입학 후에 꽤 많은 방학기간들을 재래시장, 그것도 새벽시장에서 부모님 일을 거들었더랬다. 대-충 중학교 저학년때까지는 꾸준히 했던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 이후에도 가끔, 공부 안하고 탱자탱자거리는걸 보고 아버지께서 분기탱천하셔서 넌 닥치고 가업이나 이어라 하며 시장으로 끌고나가실적이면 가끔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했던 것은 그때까지 정도. 

근데 이게 - 우선, 이게 절대 뭐 재래시장에서 일하는 분들을 비하하려거나 그러는건 결코 아니라는 것 먼저 밝혀두고 - 뜬금없이 사랑이라는 녀석과는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 그게 어린 시절의 그 좁은 시각으로 바라본 '시장 사람들'의 특징이라는게 그렇게 잡히는거다. 아니 새벽시장 일이라는게 워낙 쉽지가 않다. 힘들고 어렵지. 그리고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일하면서도 참 근사하게 멋지게 바람직하게 사시는 분들이 당연히 대부분이지. 근데 그게 그렇잖나. 그냥 다 좋고 좋은건 눈에 잘 안잡혀도 좀 튀고 나쁘고 그런건 눈에 잘 들어오잖나. 그게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내 눈에 딱딱 잡히기 시작하는거다. 아니 보니까, 아주머니들은 세상에 그렇게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진짜 고생해가며 자식들 두어너덧명 다 대학 보내고... 깔린게 그런 분들인거야. 얼마나 순하시고 착하시고 꼬맹이가 부모 일 거들러 나왔다고 기특하다고 뭐라도 하나 주고 먹이고 하시려 그러시고... 근데 음, 그당시에 꽤나 많은 그런 참 이야 대단하신 분들이다 - 라고 어린시절에도 존경심이 막 일어나던 아주머니들의 남편분들께선, 음, 꽤나 많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거다. 쓰다 보니 이거 내가 운이 없었던건가?(웃음) 

아니 왜 막 그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80년대형 나쁜 남자들 코드 있잖나. 부인이 애써 돈벌어오면 술, 노름, 친구 빚 보증 후 사기 뭐 이런걸로 탕진하고 그러면서도 잘났다고 마누라 쥐어 패고 왠갖 중독을 주렁주렁 달고다니고 결국 말년에 좋은 꼴 못보고 비명횡사하는 그런 코드. 그게 어린 눈으로 보고 듣고 했을때 또 에지간한 숫자였어야지 말이다. 그쯤 되니까 이게 뭐라고 해야하나, 어리둥절? 대충 그런 기분이 드는거야. 아니 저렇게 좋은 아주머니들이 왜 저런 썅늠(;) 들을 만나서 고생을 하시는걸까. 원래 저랬던걸까 사람이 저렇게 바뀐걸까 뭐 이런 어린시절에 할법한 고민이 아닌 고민들을 막 하게 되는거야. 뭐 조숙했더랬지. 그렇게 궁금증과 의아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까 그런 근원적인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는거다. 남녀가 사랑하면 결혼한다며, 저분들은 사랑해서 결혼한건가? 그럼 대체 그 사랑이란놈이 뭔데. 아니 멀쩡한 사람 평생을 저렇게 개고생에 쩔어주게 만드는놈이 사랑이란거야? 뭐지 이 빨간약을 먹은 기분은? 이렇게 무서운거였어? 아냐 아냐 나의 사랑은 그러치 않아 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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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는 오버였겠지. 그당시에 거기까지 생각했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정말로 꽤나 어렸던 시절에 나는 저런 이유로 그러한 의문을 품었더랬다. 사랑이란놈이 뭘까. 이게 꽤 중요한거다. 정말로, 나중에 수십년이 지난 후에야 퍼뜩 깨달았지만 바로 저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저 의문들이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어떤 '틀'을 다져버린거다. 그러니까 애들은 좋은것만 보고 자라야한다...는 결론은 아니고, 물론 나이를 이만치나 먹어버린 지금에 와서도 어째서 멀쩡한 사람들이 누가 봐도 참 개 아드님 두 여자님(...이해 못하면 패스하시라) 같은 사람들을 만나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인생의 고뇌를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딱 몇가지의 어떤 생각들이 건물 기초공사하듯 딱딱 깔려버렸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것들.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같은것은 하면 안된다. 사랑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거다. 사랑은 행복하고, 예쁘고, 달콤하고, 환상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다(이건 물론 바램). 예전에 이글루에 글을 쓰면서 Life & Love 라는 글에 이런 '사랑관'이 담긴 글을 썼더랬는데 바로 그 근간이 저 시기에 형성된거다. 왜.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거잖나. 스스로의 삶을 현저히 망가뜨린다고 생각되는 사랑을, 굳이 아둥바둥거려가며 끌고 갈 이유나 필요가 있나. 어찌 보면 굉장히 현실적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씁쓸한 기분마저 드는, 어떤 사랑에 대한, 최초의 고민과 최초의 생각. 

사실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야기들에도, 꼭 의도한바가 아니더라도 이 생각은 곳곳에서 묻어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생각들에 절대 동의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나의 이 글들은 피하는게 좋다. '헹 - 행복하기만한 사랑이 무슨 맛이여! 사랑이란건 모름지기 개고생과 피눈물과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이 있어야 제맛인 법이제!' 이러는 분들이 있다면 말이다(...과연 있을까? -_-;) 어쨌든, 그래서 그, 아주 오래전에 시작된 그 의문, 그 출발점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이 쓸데없고 기나길 것이 예상될 글의 시작을 열어본다. 아, 어쩐지 용두사미가 막 머리속에 그려지는 기분이다마느으으으은....

어떤가 뭐. 좋지 아니한가. 사랑이란건 무엇일까 - 따위의 되도 않은 고민으로 끙끙대며 벤치에 앉아 고독한 도시의 가을 남자가 되어보기에 충분한 날이 아니던가.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