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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회사 회식자리에서 꽤 기묘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이건 심각한 오버일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그게 뭐랄까, 신나게 웃고 떠들고 흥에 겨워 들뜬 듯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그게 그냥 그렇게 기쁘고 즐겁고 신명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뭐랄까, 전반적으로는 그런데 언뜻언뜻, 정말로 언뜻언뜻 느껴지는 슬픔들이 있다는 것이랄까. 아니 아니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단 음... 그래, 서글픔이다. 누구도 자유로워질 수 없는 삶의 무게감, 그 무게감에 짓눌려 비어져 나오는 서글픔. 웃는게 웃는게 아닌 웃음. 아,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 역시도, 입에서는 속사포 랩처럼 이런저런얘기들을 줄줄 쏟아놓으며 웃고 떠들고 하는 와중에서, 스스로 그런 서글픔들이 슬며시 일어나는 듯한 기분들을 억누르곤 하니까. 아니, 어쩌면 나만 그런가. 하하.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별로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한다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드물것이다. 그런데 직장에서의 회식자리란것은 그렇게 억지 웃음을 자아내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던가. 나같이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조차 '종종'그럴진데 술자리 자체가 곤욕스러운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걸 감당해내는지 신기하기까지 한 요즘이다. 그게 또 보면, 윗 사람일수록 속이 편하고 좋기만 할 것 같은데 그게 또 그런것도 아니더란 얘기다. 눈치야 그나마 덜 보겠지만 어디 그게 그렇기만 하던가. 좋은 상사, 좋은 선배 구실 하려면 때때로는 아랫사람들 기분도 맞춰주고 살펴주고 어르고 달래고 해야 하는 거다. 그게 아랫사람들이 하나 둘이나 되면 모를까. 아, 글을 쓰다보니 팀장님이 되신 이후부터 급속도로 새치 증가와 탈모(...)에 시달리고 계신 팀장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굇수'라 항상 묘사하는 C차장님은 또 어떤가. 오늘은 일때문에 새벽까지 날을 새우고,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나오면 개떼같은 후배놈들이 술한잔 사달라고 징징징. 또 그걸 마다하지 못해 신나게 하루 퍼마시면 내일은 또 동기며 선배가 꿀꿀하다고 뭐라뭐라. 아아 어쩌면 세계 8대 미스테리가 존재한다면 그건 한국 직장인의 간 해독능력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알려진 연구 결과보다 열배는 더 강력한 작용을 하고 있지 않을까. 아이쿠 삼천포야. 다시 돌아오면.

아주 어렸을적부터,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 하는 미덕으로 '관대함'을 꼽았더랬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건 뭐 워낙 좁았어야지(웃음). 천만다행으로, 적어도 지난 시간들을 아주 항문으로만 소모한것은 아니었는지 최소한 과거보다 조금은 그, 관대함의 폭이 넓어졌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회식자리에서, 저런 은근한 서글픔같은 것들을 감지하게 된것도 그런 덕분일거다. 예전에야 어디 그랬나. 피곤하고 가기 싫어 죽을것같은 회식자리에 질질 끌려가면 세상에서 나만 제일 기분 나쁜 놈마냥 구석에 앉아 술이나 푸고 그랬지. 꼴보기 싫은 상사가 술잔 건네면 차마 마다하지는 못하고 웃고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에잉 퉤 하고 그랬더랬지. 근데 이제 그러질 못하겠더란 것이다. 저 사람이 참말 속이 상할 일이 있을텐데 저리 웃고 떠드는걸 보면 에효, 거 참 욕보십니다 생각이 들고, 일하면서 얼굴 붉혀가며 버럭버럭 했던 사람도 그냥 술자리에서 술한잔 건네는걸 보면 에효, 당신이시라고 속이 좋고 맘이 편하기만 해서 술한잔 건네겠소 하는 마음에 기꺼이 받아들게 되더라는것. 이쯤 되면 대인배는 못되더라도 중인배(?) 정도는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으려나. 암만 생각해봐도 대인배로 살아가기는 너무나 멀고. 낄낄.

그래서 뭐, 그런 맥락으루다가.

진급자 회식날이었다. 앞에 밀린 선배들이 많아 너무나 당연히 예상했던대로 올해는 물을 먹었는지라 별로 사실 특별히 상심하거나 한 것도 없었더랬고, 그래서 뭐 좋은 마음으로 축하해 드려야지 하며 회식자리에 갔었더랬다. 근데 아니 이게 왠걸. 워낙 진급 정체가 심한지라 나말고도 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인데 어째 다들 코빼기도 안뵈는게야. 원래는 일때문에 잠깐 가서 저녁 먹고 술이나 한잔씩들 따라드리고 오려고 했는데 이게 떨어진놈중에 혼자 갔더니 또 빠지기도 뭐한 것인지라. 그바람인지 진급자 회식 답잖게 또 분위기도 쎼 - 한거야. 별 수 있나. 왕년에씨가 된 기분으로 그냥 좀 떠들어줬더니 분위기가 캬 - 내가 또 왕년엔 어마어마했거든(...) 멘트 한번 날려주니 웃음바다가 므하하하. 화끈하게 분위기좀 띄워주고, 일부러 오버질도 좀 해주고 그러니 또 그래도 사람들이 좋다고 받아주고. 이게 또 분위기가 묘한게 혼자 떨어진놈이다 보니 은근히 바라지도 않던 위로가 쏟아지는데 아 참 이분들. 괜찮대두요. 잠깐 자리에서 빠져나와 애인님한테 전화 한통 할라치면 괜히 서글픔이 뭉클하니 올라오는데 또 그냥 자리에 돌아가면 그렇게 잘 떠들수가 없어요. 아무튼 그렇게 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새벽까지 신나게 떠들어주고, 신입사원들까지 얼러 가며 회식을 마무리하고 나니.

녹초가 된건 된건데, 그냥 그날은 그렇더라. 원래 그런 날이면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골목길에선 아주 그냥 서글픔만 가득 차서, 아 어무이 먹고 살기 더럽게 힘들구만요. 그런 말만 중얼중얼하며 돌아오게 되는게 대부분이었는데 그날은 좀 다르더라고. 거, 속 편하게만 사는 놈은 아무도 없고나. 모두 애쓰십니다 참말로. 술도 잘 못마시는데 막차까지 남아 계셨던 R대리님도, 집이 하남인데 그시간까지 버팅겼던 친구놈도, 진급했다고 시원허니 회식비 날려주셨던 선배들도, 우르르 선배들 사이에 낑겨서 회식자리에선 마지막까지 정신 차리고 버티는놈이 이기는거에요 - 라는 말 하나 믿고 악착같이 버티던 독수리 오형제도. 할일도 뭣도 많은데 내일 힘들꺼 뻔히 알면서도 자리 지켜주셨던 위엣분들도, 그냥 다들, 욕들 보십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게다. 아 물론 스스로에게도 그랬더랬지. 야 - 매듭 너 오늘 고생했다. 애썼다. 제법이었어. 아 젠장 근데 내일 어떻게 일어나냐. 어떻게던 되것지. 므햐햐햐.

그냥, 그런거 있잖나. 대인배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더니, 조금은, 아주 조금은 대인배스러워진 것 같은 느낌에 우쌰 하는 기분이 들기도, 그러면서도 조금 서글프기도. 사실 또, 살면서 그렇게 조금 슬프고 서글픈 날이 없으면 또 그게 무슨 재미겠소. 뭐 그런 이야기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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