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이야기(기나긴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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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이야기. 라는 제목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겨울은 맞지만 지금은 밤이 아니다. 제안서를 붙들고 끙끙대다가 잠깐정도 숨을 고를 수 있겠다 싶어 한숨 돌리는 순간에, 문득 그냥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더랬다. 그런거 있지 않은가. 창밖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창문 틈으로 싸늘한 공기는 비집고 들어오는데 방바닥엔 뜨끈하게 불을 올려놓고 아끼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모두 다리만 이불 속에 집어넣고는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정말로 별 것 아닌, 그렇지만 그냥 살아가고 살아내는 이야기들.

가끔은 작당이라도 한 듯 웃음이 터지고, 또 어느 대목에선 모두 입맛을 쩝 쩝 다시며 말없이 화자의 술잔을 채워주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 아, 그러고보니 그렇게 논 것이 참으로 오래 되었다. 친구 집이건 MT 때 즐겨 찾던 펜션이건 말이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채 웃고 떠들다가 한명 두명씩 있던 자리에 그대로 벌렁 누워 코를 골아버리기 시작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창문을 두들겨대는 칼바람이 거짓말같이 느껴지는. 한없이 따스한. 그런 이야기.

그렇게 오랫만의, 긴 수다를 떨기엔 역시 블로그가 좋지 아니한가. 트위터로는 무리다. 하하. 그래, 자네 수다로는 어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 아니었던가. 술한잔 마시며 쓰면 더 좋겠구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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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말 나온김에 얘기하자면 트위터는 역시 취향이 아니다. 음 뭐랄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 없을까. 그러니까 뭐 작년에 일폭풍이 휘몰아칠 적 부터, 일 때문에 처음 쓰기 시작하기도 했고, 나름 블로그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 이런 저런 수다용으로 사실 잘 쓰고 있는데 그렇게 잘 쓰고 있으면서도 매번 역시 취향이 아니다란 느낌만은 확실하게 받곤 한다. 이게 참 표현하기 어렵네. 그러니까 역시 너무 빠르고, 정신없고, 편하고, 쉽다. 신속하고 편하고 쉬운것은 사실 장점으로 꼽는것인데 저것때문에 취향이 아니다 하니 쓰면서도 좀 난감스럽긴 하네. 하지만 사실이다. 정확시 저런 이유로, 빠르고, 정신없고, 편하고, 쉽다는 이유로 매번 역시 이건 취향이 아니로구나 하게 되니, 뭐 어찌할까.

예를 들면 이런거다. 일단 짧은 이야기들이 주루룩죽죽 올라가는걸 보고 있자면 가끔은 덜컥 겁이 난다. 어떤 이야기를 보고 무언가 생각을 이야기해볼까 하는데 갑자기 이게 이게 내가 올바로 이 짧은 이야기 안에 담아놓은 생각을 이해하곤 있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멈칫 하게 된다는 거다. 그게 블로그 쓸 때도 그러잖수. 제길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다 하는 심정으로 미칠듯한 장문의 포스팅을 써도 그것조차 스스로 담고 싶어했던 의도와는 완전히 무관한 의도로 전달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그것도 제법 많이! 내가 그렇게 글을 못쓰는 인간이었나,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글인가 하는 자괴감이 틈만 나면 일어날 정도로. 근데 고작해야 세네줄 되는 고 글에 담아놓은 생각들을 내가 100% 정확히 이해한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쏘냐. 반대의 경우도, 나의 생각들을 그렇게 짧게 담아낸다고 할때, 나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정확히 담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조금씩 주춤거리게 되는거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보내는 것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것도.

아, 쓰다보니 좀 정리가 되고 있는데 그런거다. 멀쩡히 쓰면서도 이건 영 아니군 생각하게 되는게 바로 그런거. 트위터건 블로그건 내가 온라인을 활용하는 목적중의 하나는 분명히 '소통'이고, 특히나 트위터를 쓰는 주 목적은 나의 경우엔 '소통'을 위해서인데 바로 그 트위터를 통한 '소통'이 내가 좋아라 하는 '소통'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 진정한 소통의 강화는 서로의 생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고, 그 서로의 생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조금 더 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 심플하네. 뭐 그렇다. 갑자기 걱정이 드는데 이걸 무슨 트위터 까는 글이라거나 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겠지. 혹시라도 몰라 강조하지만 그런거 아니다. 일 때문에라도 난 트위터는 앞으로도 계속 어떤 식으로든 쓰게 될테고, 그 장점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그저 진짜 내 취향인 -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 뿐. 단지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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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득한 애정.

그냥 뜬금없이 꺼낸 첫 수다부터 저모양으로 길어져버렸기에 -_-; 좀 걱정이 되지만 작정하고 시작한거니 계속 풀어보자. 그러니까 - 난 '블로그에 달린 장문의 덧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 물론 짧은 덧글로도 뭔가 순간적으로 격하게 사랑스럽거나 와락 기뻐지는 그런 덧글이 있긴 한데 뭐랄까, 감동의 쓰나미 - 는 거의 장문의 그런 덧글이었던 것 같다. 막 그런거 있잖나. 읽으면서 괜히 뭉클해지고, 아 눈알에 땀이 나네(...) 뭐 그런 느낌 드는 것. 근데 그것도 좀 의아스럽더라. 사실 메일이랑 비슷하잖아? 특히나 비공개 덧글은. 근데 또 재미있는것이, 메일에는 에지간히 내용이 짜한 메일이 아니면 그런 느낌이 들지를 않아요. 아, 물론 메일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있긴 하다. 내가 예전에 손으로 편지 미친듯 보내던 시절에 답장으로 메일 받고 굉장히 기분 쌔-해진 경험이 있어서. 음음. 그건 그렇다 치고.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다 보니 그게 왜 그런지 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덧글이라는건, 짧게 쓰라고 해놓은 거 아니냐. 원래 목적이. 블로그의 경우 긴 피드백을 위해 트랙백같은 기능이 있는거고. 짧은 피드백을 위해 마련해놓은 그 공간에, 그렇게나 넘치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면 그만큼의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는거다. 아 진짜 뭔가, 할 얘기는 넘치는데 어떻게 전할 방법이 없네(...) 뭐 이런 기분이랄까. 그냥 아 뭔가 좀 이게 제대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데,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다보니 자꾸 막 이야기가 길어지는거야. 떠올려 보니 나도 장문의 덧글 남기고 그럴땐 그렇더라고 -_-; 진짜 할 말 많은데, 뭔가 이 사람을 마주보고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은 안되고, 이걸 남겨놓으면 이 사람이 이걸 언제 보게 될지 그런 기약도 사실 없는데 그냥 스스로 그만큼 절실해서 그렇게 길-게 늘어지는 이야기를 남기게 되는것. 그런 느낌 때문인 것 같다. 요약하면 딱 그 단어. '절실함' 그리고 그 절실함에서 묻어나오는, 끈적한 애정.

이거 예전에도 한번 트위터에서 떠든 적 있는데 이글루에 남겨놓고 떠난 그 공간을 매번 처리하려다가도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덧글 때문이라고. 특히나 최후의 만담에 주르륵 남겨진 비공개 덧글들은 그야말로 보물이다 보물. 아으어어. 그리고 지금 이 공간에 가끔씩 남겨지는 덧글들은 하나같이 다. 사실 잊혀진다는건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잖은가. 반대로 기억된다는것은(나쁜쪽으로 말고) 기쁜 일이고. 그것만으로도 사실 고맙고 고마운데, 이제는 가끔씩 그렇게 선물처럼 그런 절실함이 느껴지는 덧글들을 읽으면, 그냥 마냥 기운이 불끈불끈 난다. 아, 힘내야지. 진짜 이번달 제안만 마무리되면, 어떤 이야기건간에 좀 부지런히 써야지. 부지런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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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편한 인간.

가끔 스스로, 아 진짜 나란 인간 진짜 이해하기 쉽고 편한 인간 -_-; 이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그런 부분 때문. 호감을 감추질 못해(...) 남자건 여자건간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냥 배 까고 드러눕는 개 단순함. 말 그대로 개 단순이로구나... oTL 이러니 연애도 맨날 그렇게 폭풍직구(...) 밖에 못하지. 얼마 전 업무 복귀 후 첫 회식을 하며 사람들이랑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음, 3차쯤 되어 술 좀 거나하게 들어간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었더랬다. 내 목표는 로맨스그레입니다! 전 솔까말 우리나라 유부남들이 왜그리 재미대가리 없이 사는지 모르겠어요!(...윗 분들 뫼시고 망발을 -_-;)

근데 하필 그 얘기 하고 있는데 애인님께 전화가 온게야. 평소에도 회사에서 일 때문에 만난 분들 앞에서 애인님과 통화하면 절반은 손발이 오그라들어 죽으려 하시고 절반은 니가 그런 사람일줄은 상상도 못했다 -_-;; 하는데 그날은 술까지 거나하게 올랐으니 아주 제대로. 교태 풀 업그레이드?;;;;; 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아주 그냥 모두 다 쓰러지심. 몇일 지났는데도 아직도 작년 말에 입사한 신입사원 모 군의 그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 대리님 로맨스 그레이로 사실 수 있을 것 같아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 웃었어(...) 잊지 않겠... -┏

오늘은 또 점심에 격하게 존경하고 애정하는 C 차장느님과 우연히 밥먹고 커피마시고 돌아다닐 일이 있었는데, 차장느님이 사실 올해 결혼을 하신다. 그래서 한참 결혼준비중이신데 스트레스가 많으셨나봐. 너도 장가 가야지? 하면서 결혼 준비하는 그런 이야기를 한참 들려주시고 그간의 스트레스 상황에 대해 알려주시면서 너도 그런거 조심해라 막 그런 얘기를 하시는데 아니 막 내가 화가 나는거야. 차장님이 어디가 어때서 그 고생을!!!!! 아 나이야 좀 차셨지만 진짜 레알 나중에 딸낳았는데 차장님 같은 남자 데리고 와봐. 내가 그냥 사위느님으로 모시고 살지. 뭐 얘기는 안했지만 막 배우자 되실 분께 은근 비호감마저 일어날정도 ㅋㅋㅋㅋ

근데 이거, 사실, 은근 조심하는 부분도 있다. 특히 사회생활 하면서는. 개인적으로 신경써서 포커페이스 유지하지 않으면,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무의식중에 상대에 대한 호의가 팍팍 튀어나와 버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는 의식적으로 조심하게 되는거다. 그렇잖은가. 누런 소가 일을 잘한다고 귓속말을 해야 하는 농부의 마음?(...그건 뭐냐) 아무튼 -_-; 차장님 가시고 혼자 또 사무실에 올라와서 생각해보니 스스로 화가 날 정도로 올라왔던게 또 막 웃겨서. 아 뭐 어쩌냐. 천성이 그런것을. 팔자려니 해야지. 뭐 좋지 아니한가. 그냥 단순해서 이해하기 편한 인간이. 나이를 먹으니까 더 더 더 더 그렇더라. 스스로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래. 나를 복잡하게, 머리 굴리게 만드는 사람은 피하게되더라. 아우 세상살이가 얼마나 피곤한데. 그래서 나이먹으면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지는 거구나. 음. 모두 깨달았어. 범인은 이 안에 있...(!?!?!?!)

아 물론, 내가 판단하기에 '내가 저 사람에게 느끼는 호감을 키워선 곤란하겠다' 라고 판단이 서는 사람에게는, 또 지극히 사무적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니까 사내연애같은건 안하고 못하고 그렇게 살아온게지.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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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고독.

영동지방에 폭설이 온다는데 떠오른건 딱 하나. 혼자 여행 가고 싶다 - 는 것이었다. 작년 1월 1일에, 바닷가에서 폭설올때 을마나 행복했던지 ㅠㅠㅠㅠ 아 레알 예술이었는데. 음, 굳이 혼자 - 라고 표현한건 좀 필요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인것같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다. 구정때 오랫만에,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며 푸욱 쉰건 참 좋았는데, 그리고 고만치 애인님이랑 떨어져 있어서 돌아오신 후에 더 우아앙 하고 좋은건 좋은건데, 결국 동굴타임이 제대로 없었어...oTL 아 맞아. 요새 계속 뭐가 부족하다고 alert 가 뜨는게 아마 이거인듯. 딱 그게 부족하다. 양질의 고독감이. 눈 펑펑 내린 겨울 바다, 밤 바다 앞에 앉아서 사정없이 철썩철썩 밀려드는 파도소릴 들으면서 조용-히. 조용-히 혼자 밀어낼것은 밀어내고 정리할것은 정리할 시간. 아 이게 부족했어. 음. 그려. 이것이여 바로.

사실 3주간의 휴가가 너무 달콤하기도 했고, 보라카이행이 기대보다 훨씬 더 꿈같이 좋아서, 읭? 이상허다 충전은 만땅 된것같은데 - 하는 생각에 뭣이여, 뭔가 셀프 모니터링이 장애가 생겼나 하고 있었는데 이게 글로 밀어내다보니 대충 감이 오네. 딱 증상도 그래. 바로 그게 부족할때 일으키는 증상. 실수가 늘고, 술을 마시면 생각지도 못하게 필름이 날아가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괜히 좀 답답하고 좀 전체적으로 인간이 불안정해지고. 에으 안되것다. 3월에 개인적으로 건곤일척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한 살떨리는 빅 이벤트가 하나 있는데, 고 전에 애인님께 양해를 구하고 하루라도 어디 좀 다녀와야지. 후우. 기왕이면 눈 좀 펑펑 오는 날이면 좋겠는데. 아니 어떻게 올해처럼 폭설이네 뭐네 내린날도 기가 막히게 눈오는 것만 피해가냐 ㅋㅋㅋㅋ 본격 눈이 피해다니는 남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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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길게 수다를 떨었는데, 아 좀 기쁘다. 역시 뭐라도 써야 좀 정리가 되는구나. 이제 일해야지. 훈누난나. 간만에 좀 개운해진 기분이네. 아 사랑해요 블로그(...진정해) 긴 수다를 읽으신 모든 분들, 즐거운 주말,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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