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7 - (Just because it's Christmas!)


드디어, 눈이 내렸다. 내가 보는 올해의 첫눈이다. 작년은 겨울의 피크를 부산에서 보내느라 눈이란건 제대로 뭐 구경도 못하고 지나간 것 같은데 그래도 올해 겨울에 몇 번쯤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꽤나 소심하게 내린 눈이라, 그것도 출근길에만 잠깐 보고 곧장 사무실에 들어와야 했던지라 여전히 첫눈으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어찌되었거나 눈은 눈 아닌가. 그래 그러니 뭐, 눈오는 날엔 사랑타령이 제맛이지. 마침 크리스마스도 코앞이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에 얽힌 기억들이나 더듬어보며 사랑타령을 시작해보련다.

사랑, 아아 그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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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까지는 매년 꼭, 한번씩은 찾아보는 영화들이 있었다. 첫번째가 멜로영화의 탑으로 꼽는 If only 요, 두번째가 이터널 썬샤인이요, 세번째가 러브 어페어다. 정말로 한해에 한번은 일부러라도, 혼자 쉬는 날 틀어놓고 주책맞게 훌쩍거려가며 꼬박꼬박 챙겨보곤 하였는데 이제 그 정도까진 아니고 어디서 우연히 연상작용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들을 만나면 한번씩 찾아보고, OST를 들어보고는 하는 정도. 그리고 그렇게 일부러 찾아서, 챙겨서 보지 않지만 거의 매년에 한번씩은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러브 액츄얼리. 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용 영화로 최고로 꼽는. 크리스마스 영화라고 하면 나홀로 집에를 떠올리는 분들이 아마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겠지만... 케빈은 좀 그냥 냅둬라. 애가 큰지가 언젠데. 아무튼 처음 본 이후로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시즌 쯤이 되면 어딘가의 방송에서 꼭 한번씩은 나오는 영화이기도 하고, 그게 또 봐도 봐도 재미있기에, 또 한번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꼭 끝까지 보고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탓에 매년 한번씩은 꼬박꼬박 보게 된다는거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요 영화의 매력은 영화속에 등장하는 여러 커플들의 사랑에 그때그때 다른 커플들에게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도 역시 메인 커플이라고 해야하나 - 무수한 패러디를 남기고 골백번도 넘게 어디 무슨 하이라이트 같은거에 꼬박꼬박 등장한 커플, 그리고 그 사랑, 그리고 그 명장면만큼은 인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게다. 그, 왜, 사실 따져보면 되게 불쌍하긴 한데 불쌍해서 더 극적이고 뭔가 간지나는 스케치북 프로포즈의 주인공들. 친구랑 결혼한 여자한테 찾아가서 스케치북 한장씩 넘겨가며 정말 담백하게, 덤덤하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그 장면. 캬 - 그야말로 명장면이다. 아마 그거 따라 프로포즈해서 혹해 결혼한 사람들도 많을거야. 꼬꼬마 연인들 100일 200일 이런거 챙길때도 많이 사용되었을 게고. 역시 좋은 영환데?

많은 이들이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장면에서 내가 제일 감동했던 부분은 바로 스케치북의 그 페이지였다. 크리스마스엔 거짓말을 하면 안되잖아요 - 라는 부분. 스스로의 입장도, 상대의 입장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뭐 지금에 와서 당신과 뭐 어쩌겠다는 얘기도 아니다. 이게 생각해보면 굉장히 미친 짓이란것도 알고 있다. 또는 내가 이 짓을 함으로써 당신과의 관계가 굉장히 서먹스러워지거나, 아 뭔가 친구 보기 민망해지거나 할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정말로, 무엇을 바라고, 당신의 어떤 리액션을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내가 그냥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사랑해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갈건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크리스마스라는 좋은 핑계를 통해. 그 모든 마음들이 고스란히 그 페이지 안에 담겨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캬 이거 진짜 대박이구나. 간디 작살이구나. 그런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러니까 뭐, 무수한 이들이 크리스마스는 예수를 만드는 날이 아니라 예수가 태어난 날이여! 를 외치며 닝기리 도심의 러브호텔들만 특수를 누리는 요즘의 크리스마스를 목소리 높여 비난하고는 하지만 그냥 내 생각은 그런거다. 저렇게 솔직하고 담백하게 스스로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크리스마스란 좋은 핑계가 존재한다면 그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게 아니냐 하는. 아니 그러니까 뭐, 요지는 인생 너무 빡빡하게 살 필요는 없잖수, 그런 얘기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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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썰을 붙여보자면.

사랑때문에 울고 불고 난리를 겪는 이들을 대할적마다 날마다 하는 생각이 있다. 정말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운명의 빨간실같은게 있어서 딱 짝이 정해지고, 그 짝은 반드시 만나게 되고, 그 짝과 함께하게 되기 때문에 사랑함으로써 아픔도 슬픔도 겪지 않는 그런 세상이면 어떨까 하는. 뭐 망상일 뿐이다. 어찌되었거나 살아가고, 사랑하는 과정에서는 참 많은 그런저런 사랑들이 남겨지게 마련이다. 사랑했었으나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사랑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면서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흐엌엌 추임새나 넣으며 괴로워하는 사랑도 있고, 잦은 다툼과 오해들이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어가며 그 빛이 옅어져가고 있는 그런 사랑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데 용기가 없거나 해서 말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사람도 있고, 선의의 거짓말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는 있지만 어떤 부분을 감추고 숨기는 통에 영 찝찝하고 괴로운 사랑도 있고, 내가 저 사람이 정말 좋긴 한데 행여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하면 저 좋은 사람을 그냥 잃게될까봐 겁나서 엄두도 못내는 경우도 있고... 사랑한다고 할말 못할말 다 하는거 아니잖은가. 얼마나 무수한 말, 말, 말들이 사랑의 과정에서 그대로 묻혀가는가.

물론 어떤 말들은 그것이 그대로 스스로의 기억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게 좋은 경우도 많다. 크리스마스라고 삘받아서 술마시고 멀쩡히 새 사람 만나 잘 살고 있는 전 애인 집에 찾아가 문 두드리며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엉엉 하고 난리치면 그건 그것대로 식어빠진 설렁탕 국물맛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이 사회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들을 바라본 경험에 따르면 적어도 그렇다. 굳이 감출, 굳이 참을, 굳이 못할 이야기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꿀꺽꿀꺽 삼켜낸다는 얘기다. 사랑한다는 표현, 좋아한다는 표현, 미안하고 고맙다는 표현,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표현... 그 많은 표현들을 너무 많이 아낀다는 얘기다. 표현에 대해서만큼은 지극히 쫀쫀하고 인색하다. 그리고 용기들도 부족하다. 큰일 나는 얘기도 아닌데, 말하고 나면 굉장히 시원할텐데, 그럴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건 어떨까. 한때 꽤나 많은 연애상담들을 받고 있을 적에, 내가 가장 많이 반복했던 이야기는 바로 이 얘기였다. '지금 내게 하고 있는 이야기를, 당신의 연인에게 가서 차분히 들려주라고. 화내지 말고, 차분히, 진심을 담아서' 그것들이 어떤 이야기건간에. 솔직한 마음을 담아서. 예를 들어 고백을 망설이고 있다면 이런 얘기를 해줄 수 밖에 없는거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믿으라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이 진심을 담아 건넨 얘기에 무례하게, 가볍게, 진지하지 못하게, 혹은 반대로 정말 무겁게, 공포에 질린(;;), 공황에 빠진(;;) 그런 반응을 보일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고. 만약 정말 그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거라고. 그렇지 않은가?

솔직하게, 진심을 담아. 거짓없이. 왜냐면, 크리스마스니까! 라고, 해주고 싶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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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여보 미안해 고마워 - 건, 아빠 죄송해요 사랑해요 - 건, 그냥 당신이 너무너무 좋아요 - 건,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용서해주세요 - 건간에. 무엇이건 좋지 않을까. 일년에 한번, 솔직해져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는것도 좋겠지. 연말이고, 한해를 저물어가는 과정에서는 더더욱 그런 말들이 많이 가슴속에 쌓여 있을테니까.

그냥, 이렇게 솔직하게, 정직하게, 진심을 담아 - 를 강조해대는 이유는. 어쩌면.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사실 크리스마스때 꽤 곤혹스러운 일들도 많이 겪었더랬다. 시트콤같은 기억들만 한가득 남겨진 크리스마스도 많았더랬지. 헌데 그게 다 소시적 추억의 한페이지요 청춘의 흔적이요 뭐 대부분은 그런것으로 남겨져 있는데 꽤나 후회스러웠던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있다. 간단히만 얘기하면, 그저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에 솔직하지 못했더랬고, 덕분에 꽤나 쓰린 기억들이 남겨졌다. 그게 정말 그것 때문은 아니란걸 잘 알면서도, 내게 있어 원망할건 크리스마스에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밖에 없었기에, 꽤나 오랜기간동안 그것이 후회로 남겨졌던 것이다. 그때 솔직했더라면, 용기를 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조금은 많은것이 달라져있지 않았을까. 물론 후회는 언제 해봐도 때가 늦었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나쁠 것 없지 않은가. 그저 마음일 뿐인데. 아니 뭐 어떻게 하자는건 아니고, 그냥 당신이 굉장히 좋아요 - 그 한마디라도. 크리스마스엔, 거짓말을 하면 안되니까 말이야. 그렇게, 조금은 조용하고 담백하지만, 부끄럽고 조심스럽지만, 그 마음들이 담은 열기는 도심을 활활 불태울 러브호텔들의 열기따위에 밀리지 않는 그런 뜨끈한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라며. 오늘의 사랑타령은 여기까지. 눈도 멎었고, 햇살이 비치는고나. 어헣허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