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에게


To. K

지금쯤은 퇴근을 했겠지. 팀을 옮긴 이후에 가끔씩 얼굴은 보았어도 한번 제대로 술잔 나누며 얘기 한마디 못해서 새 팀의 일은 어떤지, 그래도 우리 팀에 있을 때보다는 좀 편한지, 퇴근은 제때 제때 하는지, 연애는 다시 시작 했는지(웃음) 알 길이 없구나. 분명히 얘기하지만 그건 부족한 이 선배 탓이다. 너야 이런 얘길 하면 아니라고, 자신도 연락 못했는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원래 그게 그런 법이다. 떠난 사람이 떠나기 전의 무언가에 손을 내미는 것은 그만치 어려운 일이지. 차인 놈은 찬 사람에게 연락하는데 거리낌이 없어도 찬 사람은 차인 사람에게 다시 연락하기 쉽지 않은 것 아니더냐. 하하. 비유가 좀 괴상하다마는. 일단은 언제나처럼 말로만이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보며.

아, 나는 좀 어떠냐고. 나는 별로 달라진것이 없다. 여전히 일에 치여 살고, 여전히 바쁘다. 주말에도 나와서 저녁까지 제안서를 쓰고 들어갔고, 오늘도 자정이 다 되어가는 이 시간까지 여전히 제안룸에서 사람들과 함께 대낮같은 사무실에서 제안서 쓰는데 정신이 없다. 올해 들어 제안만 벌써 세번째다. 부산에 갔다 올라와서, 구정 지나고서는 꼭 술 한잔 하자고 얘기하고는 그만 또 연락할 엄두도 못내고 넘어간것에 대한 소소한 변명쯤은 될까. 뭐 일 외의 것들도 사실 크게 변한것이 없다. 너와 함께 대전에서 고생하던 그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치 안정적으로, 오랜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빼고는. 하하. 아, 물론 상대는 네가 아는 그분이 맞다. 그 외에야 뭐. 여전히 술도 잘 마시고, 여전히 이런저런 욕심도 많고, 여전히 가끔은 허세도 잘 부리고, 여전히 일들이, 나름대로 재미있다. 뭐, 가끔 소식을 나눈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알겠지마는.

그저, 뜬금없는, 부치지도 않을 메일의 이유는, 그냥, 그저, 그냥 이런거다. 하하.

L에게 소식을 들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우리 팀에 신입사원이 5명이나 들어왔다. 작년 말에 입사한 C씨를 포함하면 신입사원이 6명이다. 세상에나 이런 날이 오다니. 기대가 되기도, 걱정이 되기도 한다. 기대야 뭐 오죽 오랫만에 신입사원을 받았어야 말이다(웃음). 파릇한 아가들이 한꺼번에 다섯이나 들어와서 병아리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냥 그것만으로도 무럭무럭 자라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걱정은 뭐 대충 짐작할 만 할게다. 너도 알다시피, 내 이후로 입사한 사람 중 아직 이 팀에 남아있는 사람은 대학시절부터 내 친구놈이었던 H밖에 없지 않던. 뭐 그래봐야 셋이었다만. 글쎄 신입사원들을 처음 본날이 언제인줄 아냐. 나 과장 진급 심사 앞두고 팀에서 심사 PT 리허설 한다고 해서 제안쓰던 와중에 내려왔던 때였다. 인사하며 내가 바로 위 선배니까 뭔 일 있으면 얘기하라고 - 해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잔뜩이더라. 그러니 자연스레 걱정이지. 가뜩이나 그나마 있는 나는 또 얼마나 바쁘게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인간이더냐.

그게 그리하여 그렇게 걱정이 왈칵 이는지라 요즘은 제안쓰는 와중에 선배 노릇좀 해보겠답시고 나름 갖은 애를 쓰고 있다. 또 걱정인건 전공자가 아닌지라, 너만치 처음부터 팍팍 잘 따라올 수가 없는지라, 당장 교육부터 무사히 들여보내려면 사전 시험부터 통과시켜야 할텐데 1차 시험 결과를 보니 어이쿠야 싶길래 이래 저래 잔뜩 신경을 쓰는 중이다. 주말에 나와 제안서 쓰면서 발로 코딩해가며 시험문제 만들고, 틈나는대로 내려가서 물어보는거 답변해주고, 커피 먹이고 밥 먹이고 해 가면서. 그게 우습게도, 나름 또 스스로 뿌듯한게다. 야, 애쓴다. 우리팀 누구도 지금껏 입사 후에 이런 대접 못받아 봤을게다 음껄껄껄 하면서, 그러면서 갑자기 생각이 퍼뜩 드는것이.

참으로 네겐, 많이 부족한 선배였구나.

바쁘다 뭐다 해도, 마음만 있었으면 충분히 지금만큼은 할 수 있었을 것을. 참으로 무심한 선배였구나. 오히려 걱정 안시키고 너무 잘한다고, 그만 그것만 믿고는 알아서 잘 하겠지. 그리도 참으로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더랬구나. 작년에 네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놀라서 이야기를 걸어 봤지만 그때는 이미 민망할 따름인지라. 게다가 뻔히 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고, 어렵게 어렵게 힘든 상황들을 버텨냈는지 오며가며 들었으니 잡을만한 명분조차 마땅치 않았음에 뒤늦게 땅이나 쳤을 뿐이었다. 뒤늦게 팀장님 및 팀 윗분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는 꼭 네 얘기를 꺼내며 그리 보낼 놈이 아니었다고, 아쉬운 사람 놓쳤다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은 자식 불알 더듬기에 다름 아닌게 아니더냐. 그게 요즘에 와서야 그렇게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신입사원들이 삐약삐약 짹짹 하는 걸 볼때면 외려 더 그렇다. 너는 내 첫 후배다. 그리고 가장 좋은 후배일게다. 아마도 말이다.

조금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실은 요즘 K차장님이 네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을 건네고 있다고 들었다. 솔직히 그 얘길 듣자마자 이참에 확실히 다시 데려와야겠다, 당장 술이라도 한잔 하며 꼬드겨야겠다 말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했는데 그게 참 또 그쯤에서 걸린다. 어찌되었건 네가 이 팀을 등진 가장 큰 이유는 지쳐서일게다. 헌데 아직은, 특히나 올해는 여전히 팀에 과부하가 예상되는 게다. 그래, 꿈이나 비전이나 뭣이나 이런것들은 우선은 다 접어두자. 그런건 스스로 찾아서 가는 법이니까. 그래도 최소한, 이곳을 등졌을때보다는 조금은 나아져야 부를때 낯이 서는것이 아니겠냐. 그 마음에 슬몃 말을 걸어 이야기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은데 차마 그게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어쩌면 그냥 오랫만에 술이나 먹자고 해서 술을 먹다 보면 절로 입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만. 아니, 아마 그럴 것 같다만. 그래도 아닌건 아닌게다. 네가 분명히 이 팀에서 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고, 같은 비전을 바라보고 싶다고 다시 받아달라고 얘기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야 이제 좀 살만하다, 이제 좀 발뻗고 같이 여유롭게 일도 하고 그래야지? 할 자신이 아직은 없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 기회가 없을 지 몰라도.

그래서 못난 선배는,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부치지도 못할 편지만 끄적대는게다. 다만, 글을 읽지 못해도, 말을 듣지 못해도 마음만은 전해지기를. 뜨거운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는게 내 신념중 하나 아니더냐. 그저 그런 마음으로 남겨보는 글이다. 부디, 다시 한번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그때 못다한 선배 구실좀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만약 그럴 기회가 다시 오지 않더라도, 어디에서건 네가 가진 능력대로 다 발휘해서 쭉쭉 잘 나가기를. 너야 워낙에 성실한 녀석이라 걱정같은것은 애초에 할 일이 없었지만 말이다(웃음). 그렇게 바래본다. 진심으로. 참 고마운 후배다 너는. 부족한 선배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따뜻한 봄날 되기를.

못난 선배.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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