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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2 무변화 인간 4

무변화 인간


어쩐지 어색한 저녁의 바람이었다. 싱거운 여름이었다. 마치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심지가 젖어버리기라도 한듯, 한여름의 무더위는 단 한번 맹렬하게 폭발하지도 못한채 스물스물 사라져가는 모양새다. 불면의 밤도, 만물이 타들어갈 듯 내리쬐던 햇살도 없었다. 이쯤되면 정말 '싱거운' 여름이었다 할만 하다. 더위에 약한 탓에 여름이 사계중 가장 못마땅한 계절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데 어쩐지 이렇게 지나가버리는 여름은 달갑지 아니하다. 그것은 온전한 성격의 문제다. 나는 어쩐지 제자리에서 제모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뻔질나게 들리던 단골 가게들이 사라질 때마다, 즐겨 먹던 군것질거리들이 단종이란 최후를 맞이할 때마다 그 왠지 모를 허전함에 매번 그것들을 되새길 적마다 씁쓸한 입맛을 쩝쩝 다시는 인간인 것이다. 

이쯤되면 인터넷에서 어느날 찾아낸 나의 탄생화인 아스파라거스 - 사실 채소따위가 탄생화란 말이냐! 라고 꽤나 투덜거렸었지만 - 가 가진 꽃말인 '무변화, 불변'이 나만치 어울리는 인간도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3월 18일 생들이 그런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허나 적어도 나는 그렇다. 또, 그렇게 변화 없음을 일련의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기도 하다. 가끔은 그것이 고민이다. 눈알이 휙휙 돌아갈정도로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그중에서도 더더욱 미칠듯한 스피드의 변화가 일어나는 IT업계라는게 과연 나한테 어울리는 바닥인가 하는 고민. 사실 기계치 공돌이란 아이러니를 품고 이바닥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어떨때는 제법 신기하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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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이런 성품이 가진 고약스러운 부분에 대해 짚어본다면 이런 것이다. 가끔 애인님과 밥을 먹을적이면 좀 부끄러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최초의 상차림에 손을 대질 않는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적에도 그렇고 가끔 애인님이 상을 차려주실 적에도 그렇다. 뭔가 처음에 상이 내 손으로 셋팅된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 셋팅이 되어 있으면 그 차림새를 스스로에 맞게, 편하게 바꾸려고 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국그릇이 왼쪽에 가있거나 술잔이 멀찌감치 있거나, 반찬이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자리에 있거나 물통이 반찬 앞을 가로막고 있거나 말거나 고대로 둔다. 이게 혼자서 먹거나 친구들과 먹거나 할 적에는 의식조차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가끔 그렇게 굉장히 불편스러워 보이는 모양새로 수저를 놀리고 있는 나를 보고서는 애인님께서 이래저래 그릇 자리들을 조정해주고는 한다. 가끔은 이게 애가 된 기분인지라 부끄럽고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사실 또 그만치 항상 나를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니 그저 허허 웃으며 고마워하고는 한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어느정도야 스스로도 그냥 에이 별로 불편치도 않은데 - 라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스스로 생각해도 야 이 미련 곰탱아... 라고 생각할정도로 괴악한 포메이션의 상차림에서도 위화감없이 잘도 집어먹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끄적대며 생각해보면 내 주된 성격의 대부분의 것들이 모조리 그렇게 딱히 변화하는데는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다. 이를테면 또 권태에는 남달리 강하다. 같은 것을 반복함에도 쉬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낡고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번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있으면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거다. 이를테면 순두부찌개를 두달 내리 먹고 나서도 좀 지나고 나면 다시 먹을 수 있고, 계란 후라이 하나에 양념장만 있으면 천년만년이고 맛있게 밥을 먹을 자신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번 좋아라하며 마음 준 이들에게 먼저 마음을 홱 돌리는 경우가 '거의'없다. 정말 제대로 이건 정말로 아닌듯하다 하며 홱 돌아선 이들에게는 다시 눈돌린 적이 없으면서도 또 종국에 가서는 그냥 저냥 좋았던 기억들만을 가지고 있으려 노력하고 그래도 덕분에 이런것들은 배웠더랬지 하며 말고는 한다. 이래저래 삶에 치여 잊고 살던 이에게 연락이라도 한번 오면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고, 오랫만에 만난 이에게서 이전과 같은 익숙함이 느껴지면 그게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다른 이에게서 가장 듣고싶지 않아하는 말로 '변했네'를 꼽고 심지어 좀처럼 외향도 변함이 없다!!!!! 지난주에도 우연히 올라탄 택시에서 '아직 학생이죠?' 란 말을 들었다고! 와하하하하!?!?(...묘하게 기뻐하는 듯 한 이유는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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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조금은 두렵고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특히나 권태로움 같은것이 굉장히 독이 되는 관계 - 연인관계 - 라거나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사실 가끔 걱정이다. 나는 당신이 여전히 좋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자주 섹시한데 당신은 그렇지 않으면 어쩌지와 같은 고민이다. 천만다행스럽게도 애인님 역시 나 못지 않게 권태에 강한 성격이신지라 전혀 그런게 없다고 하시니 그저 가끔 가슴을 쓸어내릴 따름이지만 그래도 말이다. 사실 예전에 한번 그 '변하지 않음'에 상처받은 기억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그게 또 이해가 가는 것이, 가끔은 나도 타인의 어떤 좋지 못한 부분이 변하지 않음에, 혹은 답이 없는 고민들을 여전히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보습에 갑갑스러움을 느끼곤 하니 말이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스스로의 삶에 대한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변화 없음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꾸준한 계획들이 있고, 느릿하긴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어찌되었건간에 '앞으로' 걸어나가야 한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하니 말이다. 늘상 입에 달고 살지 않던가. 미래지향적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하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 느릿한 속도가 타인의 시선으로는 아예 제자리걸음 - 으로 비춰져서 고루하고 지루하고 답답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질까봐 걱정이 되곤 한다. 딱히 그런것은 아님에도. 

이를테면, 사실 스스로의 바램으로는 그렇게 썩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나는 타인이 변하는것에는 굳이 이래저래 토를 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그랬더랬다. 괜히 스스로 어떤 사람들에 대한 어떤 틀을 만들어놓고는 거기에서 어긋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변했네 혼자 실망하고 혼자 가슴앓이하고. 뭐 소시적엔 누구나 다 그런것 아니겠는가. 허나 나이를 먹어가니 그게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것이다. 좋게 좋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그게 보기 좋고 가끔 부럽기도 하고. 특히나 어린 이들의 놀라운 성정같은것을 볼때면 - 사족을 더하면, 아가씨들은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곤 하더라 - 그게 막 무슨 삶의 오묘함을 관찰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스스로가 조금 이건 아닌데 - 싶은 방향으로 변한 모습을 봐도 그래도 그것도 그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만 할 까닭이 있나보다 하며 적당히 수긍하게 되고. 나이를 먹어가며 둥글어진다는건 이런 부분까지도 포함하게 되는거다. 나의, 타인의, 세상의 변화도 같이 뒹굴뒹굴 굴러가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쓸데없이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일을 무의식중에라도 피하게 되는것. 

아 근데, 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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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어느날 들었더랬다. 삶이 요동치던 날들에서 멀어진지 몇 해가 지났다. 결국 나는 가장 스스로다운 모습이라 생각하는 모습을 선택했고,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얼마전 탱자탱자 놀다가 이글루 블로그의 글을 역주행하고 있었더랬다. 몇 번이나 그럴 적이면 대부분은 그 덧글들에 눈이 가고 그 마음들을 느끼고 느끼며 즐거워하는데 그쳤었는데 그날은 우연히 스스로가 남겨놓은 어떤 말이 눈에 확 들어와 박히더라. 아직 아무것도 잊지 못하였습니다 라는 말. 지금에 와서 다시 돌아본다. 여전히 그대로다. 물론 어떤 과거들과는 빠르게 멀어져왔다. 그것이 의미없어서 그런게 아니라, 내가 앞으로 걸어가는데 장애가 될만한 것들과는 가끔은 좀 놀랍게도 말끔하게 안녕을 고하고 멀어져온것들도 있다. 헌데 어떠한 것들은 그냥 그렇게 둘러매고 간다. 그게 괴롭고 힘든 날들도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없다. 덕분에 조금 느릿하게 걷게 되더라도 뭐 어떠랴. 어찌되었건 내 두 다리로 끝까지 걸어내기만 하면 되는것인데.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의 완성인데. 

얼마 전의 어떤 밤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들을 했었더랬다. 만약 그것이 마지막이었음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더 힘있게 포옹하고, 그 작은 손으로 가슴을 투닥투닥 두드려 맞는 한이 있더라도, 어거지로라도 입맞춤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뜨겁게, 뜨겁게 안녕하고 싶지 않았더랬을까. 그리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나는 그럴 그릇이 아니었더랬지. 하하. 그냥 이 마음들은 또 어딘가에 남겨놓고 싶었더랬다. 가을바람이 불지 않나. 응. 가을바람 때문이다. 난데없는 가을바람 때문에, 괜히 머리속에 바람이 들어와서 괜히 쎼-한 기분이 드는거지. 어젯밤 나가수 재방송을 보다가 자우림이 부르는 뜨거운 안녕에 지잉-하고 울린 덕분이기도 하고. 다시 또 좀, 변화가 필요해진 시기이기도 하고. 

한량짓도 한 2주 남았나. 얼른 새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한량짓은 체질이 아냐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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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보자고. 넌덜머리날만치 미련하고, 당최 변하질 않는 아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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