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운명애같은것은 아니더라도


스트레스 내재형 인간이다. 스트레스를 외부로 좀처럼 발산하질 못하고 속으로 꾹꾹 눌러 쌓는다는 얘기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내구력이 강해지긴 했는데 이게 장점이 되기도,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에지간히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는 여간 가깝거나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라면 좀처럼 저인간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아닌지 짐작하지도 못한다는 거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과거, 그렇게 스트레스를 꾹꾹 눌러 쌓다가 어느순간 빵 터질적에 스스로 얼마나 바닥을 치는가를 반복 학습한 결과로 이제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방법을 하나 둘씩 터득해가고 있다는 거다. 거의 90도 수직낙하급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곤 했던 예전을 돌아보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것도 나이를 먹어가며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간에 습득하게 되는 패시브 스킬인지도 모르겠으나. 여하튼. 

어쨌건 타의 80%이상으로 콜롬비아발 프로젝트에 몸을 담그게 되었고, 본격적 시작은 추석 지나고나서부터가 되게 되었더랬다. 근데 이게 장냔이 아니네. 대체 뭔 일인지 얘기 듣기 전까지는 그냥 뭐 콜롬비아 그까이꺼 갔다오면 되는게지 뭐 그런 정도였는데 부딪칠 '일'을 얼추 듣고 나니 기가 질린다. 말 그대로 새하얀 백지에 제멋대로 그림을 그리고 그 책임도 그냥 끝까지 져야 하는. 가드도 커버도 백업도 없다. 이쯤되니 워크샵 전후로 해서 머리속에 가득차는건 온통 관련된 일 뿐이다. 하룻밤 자는데 네다섯번을 깨고, 다시 잠들때마다 새로운 장르의 꿈을 꾸고 출근하니 언제는 안그랬냐 그냥 맨땅에 헤딩해보자, 맘 단디 먹고 가보자 생각했음에도 이게 압박이 장난이 아니네. 차라리 당장 해당 플젝 사무실로 뛰쳐들어갈 수 있으면 좀 나을듯도 한데 그럴 상황도 아니고. 으아아아 사지가 오그라든다. 사무실에서 이래저래 프로젝트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째 뭔 정신으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징징징 -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또 그러지 못할 거란건 뻔히 잘 알지. 

결국, 스트레스 내재형 인간의 비애 - 라는 거겠지. 쓰읍. 아니 오죽했으면 한국씨리즈에서 역전패를 당해서 빡치는 꿈을 꾸냐고. 

*

거기다 또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란것도 이럴땐 쥐약. 

속으론 으아아아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아 하고 있음에도 주말 워크샵에 가서는 또 개그를 치며 허세를 부렸더랬다. 돈모아서 총(...) 공동구매 해주신다는 얘기에 총 말고 방탄쪼끼요 하질 않나, 이 모든 상황의 발단이 된 손목 덜렁덜렁 친구놈한테 네놈 손목때문에 내 인생이 말렸다고 개드립을 치질 않나. 근데 그 와중에 먼저 걱정을 해주셨던 분들이 계셨더랬다. 자비없는 팀장님(...) 은 그렇다치고 K차장님, C차장님 모두 '야 너 장가는 가야제, 정 안되면 못한다고 그랴', '진짜 괜찮겠냐? 너 그거 안한다고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해주시고 그러는데 아 이게 제길 그런 얘길 들으면 들을수록 못한다고 얘길 못하겠다고!!!!! 노린건가!!!!!(...) 이 이용당하기 쉬운 성격이라니!!!! 뭐 결국 어떻게든 되겠죠 -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하고 말아버린. 돌아오고 나서야 좀 더 징징거려서 지원이라도 더 받아낼껄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으아아악 아쉬운 소릴 못하겠어!!!!!!!!!!!! 즈에기일!!!!

워크샵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원래 계획은 3호녀석한테 서울까지 실어다 달라고 할 작정이었는데 그래도 한마디 해주고 싶으셨던지 C차장님이 같이 가자고, 데려다 준다고 그러셔서 또 간만에 둘이 음악 빵빵 틀어놓고 신나게 돌아왔더랬다. 중간중간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는데 아 그게 참 고맙고 좋아서. 그러니까 더 엄살을 못부리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C차장님 앞에선 죽어도 징징거릴수 없쓰어어어어어!!!!!!!!!!!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고. 누가 뭐래도. 내 롤 모델, 앞으로 십수년을 더 따라가도 동일한 레벨에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말까 걱정되는 사람 앞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절대. 네버.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생각해보면 내 성격중 최악의 단점일수도 있는 부분이다. 애정도에 따라서 싫은 소리, 아쉬운 소리, 힘들다는 얘기, 그런걸 점점 더 못한다는것. 괜찮아요 - 가 디폴트모드로 탑재되어 있다는것. 아 진짜 불편한 성격. 

뭐 어쩌겠어. 그렇게 생겨먹었는걸(체념). 맨정신으론 좀처럼 아쉬운 티도 못내고, 그렇게 괜찮아요 - 를 남발해 두었으니 이제 괜찮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몰아대는걸. 뭐, 어쩌겠어. 

*

답답함이 넘쳐흘러 쓰는 글인지라 확실히 징징댐이 넘쳐흐르고는 있는데, 사실 조금씩 전투모드로 변환이 되어가고 있긴 하다. '제...제길 간이 탱탱해지는 기분이 드는군?!?!?!' 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해야 할 일들이 머리속에 일렬종대로 헤쳐모여가 되어가고 있는 기분. 

무엇보다 언제나 이런 막막한, 혹은 생뚱맞은 일로 인해 긴장 반 두근거림 반 하면서 스트레스가 늘어나는 상황이 되면 항상 언젠가 스스로 얻은 깨우침들을 주문처럼 반복하게 된다. 그러니까 삶에 한참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던 몇 해 전의 기억들을 더듬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 폭풍들의 끄트머리쯤에서 어느날 그저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며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거였다. 신의 존재도 믿지 않고, 딱히 정해진 운명이란것도 믿지 않지만 그저 뭐랄까, 스스로에게 어떤 경험들이 필요한 어떤 순간에 그러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적절하게 주어졌고 그로 인해 내 삶을 지금껏 잘 끌고 올 수 있었다는, 굴곡쯤이야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되었건 종합적으로 따져볼때 운 좋은 삶이었구나. 앞으로 어떤 갑작스러운 일들이 내게 들이닥쳐도 적어도 그렇게 호들갑만 떨지는 않으며, 이제는 그러한 일들이 내게 필요해진 시점인가보다 -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 어쩌면 고차원적 정신승리의 최종단계?(;;;) 

사실 7월까지 미친 업무의 소용돌이에 혼이 다 빠져서 8월을 너무 맥아리없이 흘려보내기도 했었더랬고, 어쩐지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밀려오니 오만 잡념들과 딱히 떠올리지 않아도 좋을 기억들이 들끓어 마음이 시큰새큰한 덕분에 감정선이 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기도 했었더랬고,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들이 슬슬 압박을 가해옴에 따라 답답한 마음에 어딘가 동굴로 좀 기어들어가고싶다 하는 마음이 가득하기도 했었더랬고. 여러모로 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발판에 살짝 딛고 올라서 공중부양하는 심정이었는데 단숨에 염통이 쫄깃해질 일이 들이닥치는걸 보니 뭐, 이런게 또 팔자구나. 어헣허헣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나니, 만약 이것이 어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따라 내게 주어진 어떤 기회요 시간이다 하는 생각을 하니 그렇다면 그런 경험들을 함에 있어 썩 나쁜것들만 남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급작스러운 일들이 내가 원하는 삶에 기여해 왔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조금은 자자, 힘 딱 주고 가보자 하며 기분좋게 날이 서기도 하고. 

어쩌면 이런게, 딱히 거창한 운명애 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가까운걸지도 모르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신뢰, 모든것이 그냥 우연찮게 일어나서 삶을 갑자기 망가뜨리는 일은 없을거라는 일련의 믿음. 그런것. 

*

여름이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한풀 꺾인듯한 날씨다. 주말의 소요도 지나가고, 날씨가 너무 예뻐서 일이 손에 안잡힐 지경이지만 그래도 시원한 바람이 달아올랐던 뇌세포들을 안정시켜주고 있는 기분. 

어찌되었건, 최종 목표는 '나'로써 세상의 끝까지 살아가기. 잊지 말아야지. 다만 '나'로 끝까지 머무를 수 있기를. 내가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그러니까 기합을 빡 넣고 가보자고. 이매듭 34세!

*

꼬리 : 환절기 감기들 조심하서유. 일교차가 범상치 안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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