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치 돋는 금요 만담


바람이 차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들인지라 오후쯤에 건물을 나와 명동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내려다보이는 커피숍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뜻한걸 마실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계절이 올해도 어느새 흘러갔구나 하는 아쉬움에 주문한 얼음 동동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서 말이다. 가만히 담배를 피워 무는데 창밖에서 밀려든 바람에 소름이 쭈뼛 돋는다. 어쩐지 말도 안되었던 이 묘한 가을도 슬슬 지나가는건가 하는 생각에 한숨이 흘러나온다. 물끄러미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어느 해 빛을 끌어안고 있었던 버스 정류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끔은 슬픔보다 눈물이 먼저 나는 날이 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런 날 말이다. 늙으면 죽어야해 하며 괜히 키득키득 웃어본다. 뭐, 이런 날들에만 느낄 수 있는 센치함이니. 귀하게 여겨야지 이 또한. 

*

5일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업무상 필요한 메일을 주고 받는 것 이외에는.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이렇게 뭔가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황 - 이란게 나같은 계획형 인간한테는 꽤나 쥐약이다. 마음의 준비를 다지고 들어왔던 프로젝트가 뭔가 붕 - 떠있는 분위기인데다가 이것저것 뭐 하나 좋은 상황인것같지 않아 맥이 탁 풀린것도 풀린것이고, 영 내키지 않던 콜롬비아행을 드랍하겠다고 팀장님께 컨펌을 받은 다음 날 바로 비자 준비하라는 메일이 날아와 곤혹스러운 상황도 그렇고, 내년에 일어날 대격변에 대한 생각들로 무지하게 생각들만 늘어난 덕분도 있고, 개인적으로 아쉽고 속상한 일도 있었더랬고, 나만 가을 타는건 아닌 모양인지 이래저래 술먹자는 사내들이 많은 덕분이기도 하다. 충격과 공포의 건강검진 후 당분간은 자제해야겠다는 건 안드로메다로. 하악. 속이 시끄러우니 잠자리도 영 편치 못하고, 꿈자리도 사납고. 

어찌되었건 내일부터는 짧은 연휴인데 이게 꽤 다행이다 싶어 한숨을 내쉬어본다. 이번주는 쉬어야해. 주말에 다음달 결혼하는 친구놈이 청첩장 돌린다고 술먹자는 문자도 왔었더랬는데 과감히 씹어주었다. 친구야 미안 -_- 나도 좀 살자. 뭐 물론 일정 생각도 안하고 대책없이 놀았던건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이번주에 푸-욱 놀아버린 연유로 다음주는 좀 손으로 일도 해야 하고 하니 이번주는 충전이 필요해. 가급적 조용히, 푸욱, 차분히 쉬자. 흐트러졌던 계획들도 정리하고, 머리속에 밀어내야 할 것들도 좀 쭉쭉 밀어내 가면서. 아, 혼자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데 그건 좀 애매하고나. 아까비. 

*

회사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있다. 

이게 오히려 좀 늦은 감이 있는데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그런 괜한 고집이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사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면 아무래도 일에 이런저런 영향이 가기도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회사 사람들과 친해지게 되면 생활의 축이 너무 회사 중심으로 이동할 것 같아서 말이다. 어차피 나이 들면 그러기 싫어도 그렇게 될텐데 - 라고 생각하며 회사에 있는 시간 외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력했는데 이게 어느순간이 되니 자연스레 기울더라. 물론 회사에 묶여있는 시간이 그만치 더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만은 아닌거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 이 사람은 어떤 사람 확실히 파악이 되기도 하고, 내가 많은 것들을 받고 있다보니 그만치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아랫사람도 늘고 뭐 아무튼 종합적인. 

그리고 관계라는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조금 열면 저도 조금 열고, 그러면서 또 조금 더 끈끈해지고. 그런게지. 어제는 L과장님이 그냥 술먹자 - 는 한마디를 날렸는데 이분이 또 그냥 그렇게 아무 이유없이 술먹자 그러는 분은 아니에요. 그냥 닥치고 옛썰 하고 나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데 참 안좋은 일들이 한방에 휘몰아치는 그런 날이셨던거란. 그냥 이런저런 얘기 들어드리며 한잔 두잔 하다보니 스을쩍 취기도 오르고. 그러다보니 깊은 속내도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니까 참 쿨함을 넘어 뭐랄까 좀 쌔- 하게도 느껴지셨던 분인데 또 뜨끈한 부분도 있고나 이사람의 이런부분은 이리하여 이렇게 된 것이로구나 어허 그렇구나 하며 웃게되기도 하고. 

언제나, 이런 순간이면 느끼는거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참 별 거 없다.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가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여가는가. 그게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가 그런 문제지. 타이밍과 인내와 용기. 그게 결국 관계의 전부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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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스스로를 판단하는데 있어선 굉장히 냉정하고 정확하다는게 장점이라면 장점인데. 

덕분에 사실 포기가 빠르기도 하다.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내것이 될것이 아니로세, 내 분수에는 넘치는 것이로세 하는 판단이 서버리면 주저없이 마음을 비우지. 어린 시절엔 그래도 그 몹쓸 아쉬움과 욕심에 진즉에 포기했어야 하는것을 포기하지 못해 전전긍긍해하던 날들도 있었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성향은 더욱 극대화되어서. 사실 그냥 보통의 성향은 전혀 쿨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인데 그런 어떤 가치판단의 신속함 덕분에 굉장히 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시원시원함으로 작용될때는 참말 좋은것인데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고. 

어쨌든 사랑에 대한 두서없는 주절거림 - 을 조금씩 조금씩 떠오를때마다 쓰고 있자니 지난 사랑들을 어쩔 수 없이 복기해보게 되는데 사실 그부분은 굉장히 쓰린 부분이다. 언제나, 내가 이별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을때는 저 가치판단이 명확히 섰을 때였지. 그때만큼은 주저함이 없었어. 내가 그 사람의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가치판단이 설때면 굉장히 포기가 빨랐더랬지. 다 지난 일이고 그게 정말 현명한 포기였는지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와서 다시 그걸 더듬으며 신중하게 다시 판단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역시 잘했더랬어 혹은 왜그랬을까 그런걸 지금 생각해서 뭐할것이여. 죽은 자식 쌍방울 더듬기지. 

그래도 그저, 그런 의문이 가끔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이기적이고 조금 더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욕심을 부렸더라면'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더 좋을 수 있었을까 - 라고. 그리고 물론 그 의문의 뒤엔 언제나 또 이게 따라붙지. 아서라. 얼마나 지금으로써도 극락왕생은 무리지 않간. 무간지옥은 피해야지. 끌끌. 

*

콜롬비아. 보고타. 

뭐 역시 내키지 않는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언제건간에 한번 가기는 가게 될 모양. 근데 사실 처음 얘기가 나오고 프로젝트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때만큼 압박을 받고 있지는 않다. 아니 접때 팀장님과 C차장님과 술한잔 하는데 그러시더라고. 내년 팀 목표중에 해외 프로젝트 3개 수주가 있다고. 그중 하나는 네가 해야제 이러시는데 뭐 콜롬비아에 안가도 언젠가 어디론가는 또 갈것이고 앞으로는 (물론 사업이 잘 풀려간다는 전제하에) 그럴 상황이 점점 늘어날 것인데 일일이 스트레스받다가는 괜히 명이나 줄것다 하는 생각에 그냥 예끼 모르겠... 하고 그냥 탁 마음을 비워버렸다. 말했잖나 포기할건 빨리 포기해버리는 성격이라고 -_-; 

사실 또 그건 역시나 C차장님의 영향 덕분이기도 한데 이분이야 뭐 회사의 전략인재셔서 이미 많이 돌아다니시는데... 다녀오실때마다 항상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아름 가져오셔서 참 재미있게도 해주신다. 그리고 꼭 한마디씩 덧붙이시지. 너도 기회되면 꼭 가라. 어디건간에 가라. 그렇게 얘길 듣고 있자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거다. 나도, 뭔가 저렇게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거리들을 싸들고 와서 저분과 신나게 이야기하고싶다. 그런것. 음, 역시 생각보다 나한테 영향을 무지 많이 끼치고 계시는 분. 

아 근데 플젝 자료들 보다가 단순 콜롬비아 관련 자료가 있어서 보는데... 보다가 뿜어버렸. 지도에 특정 부분 색깔별로 칠해놓고, 지역별로 특산품이니 뭐니 소개가 있어서 호오 이런 나라로구나 하고 보고 있는데... 특정 지역에 빨간색으로 칠해져있고 소개 문구로 '미인의 도시' 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지역 출신 모델 사진도 붙어있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누가 설마 만든 자료는 아니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엌 미인의 도시가 2군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레알 뿜어버렸. 

*

내년은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지. 정말로 전력을 다해야할. 올해도 남은 기간동안 많은 일을 해야하고. 어쩌면 이 묘한 가을은, 어쩌면 그 어떤것들과 확실히 작별하고 새 페이지를 열라는 계시와도 같은 걸까. 언제나 그랬듯 또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간에 그게 나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었기에, 그렇게 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까'

제대로 걷고 있는지는 언제나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한건 하나. 계속 걸어야 한다는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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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신이시다. 
어마무지하게, 끔찍하게 사랑합니다 어머니. 건강히 오래오래 머물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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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삼청동에 갈 수 있을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가을이 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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