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이었다. 우연찮게 오후 늦게 어딜 좀 나가야 했던지라, 아내와 함께 나간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오기로 했다. 동네의 아끼는 식당중 세손가락 안에 드는 샤브샤브집에 앉아 주문을 했었더랬다. 아으, 역시 여름엔 시원한 집이 제일 좋은집이지 -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한접시 가득 야채며 고기들이 올라온다. 배도 고팠더랬지. 육수를 팔팔 끓여서 야채를 집어넣고, 고기를 담궈 휘휘 저어 꺼내어 먹고. 주말의 만찬인데 술 한잔이 빠질 수 있나. 신나게 먹고 마시던 참이었다. 워낙 먹는데 열중하느라 주위에 누가 앉아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었더랬는데 옆 테이블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대략 짜증이 가득한 - 목소리가 울리는걸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쯤 되어보이는 부부와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보이는 어린 소녀가 옆 자리에 앉아있었다. 약간 하이톤으로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엄마로 추측되는 여자분,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종업원 아주머니.
뭐 남이 클레임 걸고 그러는걸 듣고 싶어 듣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워낙 조용한 식당에 목소리가 뾰족하게 울리기에 절로 귀로 날아들어오는 내용을 들어보니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샤브샤브 집이지만 삼겹살 등의 구운 고기 메뉴가 있었고, 구운 고기 메뉴를 시키면 후식 냉면을 주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샤브샤브를 먹고 나서 후식 냉면을 주문했더니 고기를 먹은 테이블에만 가능하다 - 해서 그런게 어딨냐 어쩌냐 하고 있었던것. 나중에 들어보니 요즘 하도 덥고 해서 고기 주문 손님도 없기에 일시적으로 냉면 메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식 냉면이건 그냥 냉면이건. 그렇다고 굉장히 진상 손님마냥 목청 높여가며 아줌마야 아줌마야 냉면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어 먹으리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니 그냥 냉면이라도 안돼요? 어떻게 안돼요? 이렇게 간헐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는데 그 텀이 좀 짧았더라는 것이다. 첨에야 뭐 상황을 잘 모르니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더랬지. 아니 여기 뭔 냉면 맛집인가 어째 그리 냉면에 매달릴꼬. 게다가 이미 남자분도 여자분도 먹을만치 먹은듯, 아우 배불러 하는 소리를 조금 전에도 들은 것 같았었는데 말이다. 허 뭐, 남이사 냉면을 먹건 말건 내것이나 마저 신나게 먹자 하고 건더기들이 슬슬 사라져가는 육수에 칼국수를 쓱삭 밀어넣는 순간 들린는, 조금 전보다 조금은 더 날카로워진 여자분의 목소리.
"글쎄 안된다잖아! 오늘 냉면이 없대! 떼를 써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야! 그렇게 먹고 싶어? 그럼 이따가 나가서 가는 길에 냉면집에 들려서 사준다잖아!"
허허, 그제야 상황을 좀 짐작할 수 있었으니, 이미 그 즈음부터 눈시울이 벌개지기 시작한 어린 소녀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실망한 표정을 머금고는, 조금 아까처럼 다그치다가, 또 부드러운 말로 살살 어르며 달래다가, 이것저것 음식을 떠서 입가에 가져다주기도 하다가, 도로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는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고 달래기에도 지친 엄마가 맘대로 해, 먹지 마! 라고 하고는 등을 돌리자 인제는 아주 벽쪽으로 돌아앉아서 고개를 떨구고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터무니없는 떼를 쓰는 딸네미를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빠는 그제서야 우물쭈물하며 울지 말라고 달래기에 거들고 나섰다. 인제는 많이 언성이 낮아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울지 마, 이따 가면서 냉면 먹자. 아니 이런걸로 울면 어떻게 하니, 울 일도 아닌데... 한참을 그렇게 달랬을까,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다시 상가로 앉은 소녀다. 또 잠시 지나자 좀 전까지 언제 그렇게 서럽게 울었냐는듯 방긋방긋 웃으며 아빠가 먹여주는 죽을 맛있게 삼키고 있다. 어쩐지 그제야 나도 좀 마음이 좋아져 다시 내 접시며 술잔에 집중한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쯔음으로 이제는 확연히 풀린 엄마의, 차분한 훈계가 들려온다.
"아무리 그래도, 너 오늘처럼 떼쓰고 그러면 안돼. 식당 아주머니도 안된다는데 떼를 쓴다고 그게 되는게 아니잖아. 그리고 이런걸로 울고 그러는 것도 나빠. 다음부터 그러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고 있던 아이였다. 잠시 후 먼저 자리를 일어나는 가족들의 얼굴에는 그래도 웃음이 가득하다. 내 앉은키만은 할까 한 어린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식당 밖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남아있는 술잔에 동동 떠다닌다. 무엇하나 포기하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나 어린 날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포기가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어째서 내가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가에 대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면 괜스레 심통이 먼저 치밀고, 그 때문에 한마디 혼이라도 나고 나면 삽시간에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어찌되었거나 누군가의 어르고 달램 - 을 받고, 그리고 마지못해 포기해야 함을 깨닫고 수용하게 되면 참으로 다행이다. 운 나쁘게도, 어떤 어린이들은 갖기도 전에 빼앗기고, 아예 가져본 경험조차 없이 자라나곤 한다. 포기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들은 많은 경우 고스란히 결핍으로 남고, 폭력 따위의 굉장히 불유쾌한 강압에 의한 강제된 포기는 가벼운 할큄이든 깊은 자상이든 상처로 남게 마련이다. 포기하는 방법을 잘 배워야 하는게 중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각박해지고, 사회는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떠나 아이들에게 '양질의 포기법'을 가르쳐주는데 나날이 인색해진다. 더러는 스스로도 그렇게 포기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 것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더러는 스스로의 서럽고 괴로웠던 포기의 경험들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에게 적절히 포기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게을러지게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결정장애에 시달리게 되거나, 더러는 포기를 모르는 불꽃남자(혹은 여자)로 자라나서 내것이 되지 못할 바에야 모조리 불타버려라 하는 식의 극단적 행동을 보이는 괴물로 자라기도 한다. 반대로 포기하면 편해 하지마가 어린 시절부터 아주 깊숙히 배어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것들까지도 쉽사리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게다. 어떤 쪽이든 좋지 못하다는것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배움 중에서도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인생의 어떤 순간에 배우지 못하면 평생을 걸쳐 그 배우지 못함이 두고 두고 삶을 괴롭히는. 포기하는 방법이란게 바로 그런 배움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잘 가르치려면? 뭔 매뉴얼이 있겠나, 교본이 있겠나. 포기의 영재로 키웁시다 따위의 자기개발서가 있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방법은 하나다. 아이들의 인생에 걸친 현명한 포기(?)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 어른들의 인내다. 무작정 다그치지도, 몽둥이를 휘두르지도 말고, 무조건 오냐오냐 우쭈쭈쭈 잘한다 잘한다 내새끼 하지도 말고. 때론 단호하되 냉정하지만은 않게. 끈덕지게 설득하고, 바른 선을 그어주는 인내. 아마도 그 어린 소녀는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샤브샤브 끝에 나오는 죽까지 남김없이 먹고 배부른 숨을 몰아쉬던 부모는 집에 가다가 들리는 냉면집이 내킬 리가 없었겠지만, 부모에게 떼를 써가며샤브샤브를 먹지 않고 버티면서까지 바라던 시원한 냉면 면빨을 호로록 호로록 빨아들이던 그 날에 자신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결국 떼를 써서 쟁취해낸 냉면이 아닌, 그렇게나 끈질긴 부모의 인내와 그에 못지 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설령 깨닫지 못하더라도, 귀여운 소녀가 어여쁜 아가씨가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가는 먼 훗날까지 무수히 부딪치게 될 무수한 버림과 취함의 순간에 따뜻한 등불이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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