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5 - (그때가 아닌 지금)


매번 본방사수까진 아니어도 이렇게든 저렇게든 챙겨보는 TV프로그램은 거의 손에 꼽는다. 그리고 올해 그렇게 챙겨보기 시작한 프로그램은 다름아닌 나가수다. 사실 초반보다 많이 긴장감이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이 한 자리들을 차지하고 매주 그들의 색깔로 기억속에만 머무르던 노래들을 불러주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법 하다. 그리고 그 가수들중의 하나가 김경호씨다. 요즘은 락하는 언니 컨셉으로 화제가 된다고 하지만 벌써 대학교시절부터 한참을 좋아해왔던 가수다. 한때는 노래방에 가면 반드시 부르는 애창곡에 꼭 들어가 있었더랬지. 금지된 사랑이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과 같은 노래들 말이다.

헌데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노래 말고도, 김경호씨 노래중에 유난스럽게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다. 전혀 히트곡은 아니었으나 지금도 가사 안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그만치 혼자 많이 듣고, 흥얼거리고, 떠올렸었던 노래 말이다. 그래서, 그 노래의 한 소절을 소개해보며 오늘의 사랑타령을 시작해본다. 사랑. 아아. 그래 사랑.

'가끔 이런 생각 했죠. 만일 우리가 그때가 아닌 지금 서로를 만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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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이 시작도 끝도 깔끔하게, 시원하게, 그냥 그렇게 쿨하게 끝이 나고 그렇게 남겨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지금까지의 사랑이 그렇게 깔끔하고, 시원하고, 쿨했던 기억만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복된 삶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어떤 사랑들은 오래오래 기억속에 머무르며 어느 날에건 슬몃슬몃 치밀어 올라 마음을 괴롭게 하곤 한다. 또 당연스럽게도 그렇게 마음을 괴롭게 하는 사랑에 대한 기억들조차 좋지 못한 기억들로만 점철되어 있지는 않겠지마는 말이다.

헌데 사람 마음이란것이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어, 그게 또 그런거다. 스스로 어떤 사랑을 할적에 고되고 힘들기만 했었고, 지금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더라도 이가 바득바득 다시 갈려올것같이 슬프고 화가 치미는 어떤 사랑을 했었더라면 그게 또 시간이 흘러가매 그렇게 어느정도는 누그러지기도, 스러지기도, 적당히 마모되고 적당히 미화되기도 하는 법이다. 다시 떠올릴바에야 내 머리통을 스스로 부수고 말겠다 하는 정도의 분노만이 가득했던 어떤 기억조차 시간 앞에서는 에휴, 그래 뭐 그래도 그런 건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더랬지 하게 되더라는 말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 화가 나고 그 순간만큼 슬프고 괴롭지만은 않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같은것은 있게 마련 아닌가.

그런 이유로 외려 우리를, 가장 보통의 존재들을 오랫동안 괴롭게 하는것은 내가 다 퍼주고 내가 많이 손해보았다 싶은 사랑이 아니라 내가 많이 받았고 그만치 다 주지 못했던 사랑이다. 내가 모지라고 부족해서, 뭘 제대로 몰라서, 혹은 너무 어려서 내가 받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온전히 깨치지 못하고 함부로 한 기억들, 손 안에 한가득 쥐고서도 욕심에 욕심을 부리다 놓쳐버린 어떤것들, 의도하진 않았으나 나의 모남이, 나의 부족함이 그래도 참으로 나란 사람을 아끼고 사랑해주었던 고마운 이에게 심하다싶으리만치 생채기를 내고, 그렇게 생채기를 내고서도 미안한줄도 모르고 시건방을 떨었던 기억들. 오히려 나이를 먹어가며 떠올릴적에 오랫동안 부끄럽고 오랫동안 마음의 짐처럼 남는 것은 그런 사랑의 기억들이란 얘기다. 또 물론, 개인적인 차이야 있겠지마는.

그리고 저 위의 노래는 그런 날들에 문득문득 입에서 가만히 흥얼거리며 어쩐지 쓰디쓴 입맛을 다시게 하는 노래인 것이다. 문득, 받은것보다 너무 모자라게 주었다 싶어 참으로 떠올려볼수록 미안하고 미안한 어떤 이의 얼굴이 떠올라서 괴로운 마음이 들 적에. 차라리 지금이라면, 그래도 그때보다 조금은 자라고, 조금은 더 많이 그때 그 사람의 마음들을 이해할 수도 있고, 조금은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조금은 더 둥글둥글해진 지금이라면. 차라리 지금 그대들을 만났다면 그렇게나 미안함만 가득 남기지는 않았을텐데. 그런 마음이 일어날 적에 말이다. 또 한대목 소개해보자면 저 노래의 2절 시작부분은 이렇다. 정말로 그런 날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가사기에, 더 잊을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만.

'내 곁에 있을 때 보다 그대의 삶이 만일 불행하다면 어떻하나요 나의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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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에게도,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다. 너무 어려서, 스스로의 삶에 너무 치여서, 스스로 상처입고 상처입은 끝에 날을 곤두세우고 있던 시절이라서, 뭐 기타 등등의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내세워봐도 그게 변명이 될 수 없음은 매번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그런 기억들 말이다. 뭐 혼자 실수하고, 혼자 삽질하고 망가지고 무너지고 쑈하고 죽쑤고 했으면 그냥 이불속에서 하이킥이나 몇번 하고 말 일이지만 하필이면 그런 순간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나 오래토록 마음의 채무를 가득 끌어안게 된 기억들, 그리고 그 사람들. 물론 비단 남녀간의 사랑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단 한번 그런 사랑의 기억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태어나서 한번쯤은 누구나 느끼게 될 감정일지도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런 대상이 존재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감히 그 은혜에 비해 스스로 갚은것을 어떻게 내세울 수도 없는, 언젠가의 시절에는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는, 부모라는 커다란 존재들이.

사실 우리는 또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머리속에서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괴로워해봐도, 부질없이 혼자 들리지도 않을 노래들을 중얼거리며 궁상을 떨어봐도 이미 지난 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것을. 무정한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고,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것을. 청춘남녀의 경우엔 그러다가 뭐 정말 믿지 못할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되고 다시 인연을 이어나가며 그 미안함들을 갚아나갈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할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한해 두해 먹어가면서 그런 가능성은 점점 기적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오히려 그런 마음들에 부질없이 후회하고 후회하며 시간을 허비하는게 스스로에게, 그리고 지금 그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지 못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얘기 아닌가.

그래서 사실은, 저 흘러간 노래를 끄집어내놓고 괜스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어떤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자극하는 이유는 그냥 이런 뻔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시간을 도로 돌려 그때가 아닌 지금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 미안함들은 이렇게 가끔 끄집어내보며 스스로를 다듬어가는 정도로 멈추는 것이 족하다는 얘기다. 노래 한곡에 얼추 4분. 4분의 시간동안 저 절절한 가사들을 곱씹어가며,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만치 더 행복하길,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삶들에 내 바램만큼의 행복들이 더 얹어지길 빌어봅니다 하는 마음으로 넘기고 다시 앞으로는, 또 어느날 또 이 노래를 떠올렸을적에 마음을 더 짓누르게될 누군가들은 만들지 않겠다 하는 마음을 다지는 정도로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인연들을 한번 더 돌아보고, 더 꼼꼼히 챙겨보고 하는 것으로.

그게 그러니까, 그렇지 않던가. 어떤 날 정말로 뜻대로 되지 않는 어떤 사랑을 하며 눈물 콧물 질질 흘릴적에는, 내가 과거에 아프게 했던 어떤 이들을 떠올리며 아 내가 그때 참으로 사람을 아프게 하였구나, 그 사람도 지금 나처럼 이렇게나 아팠겠구나, 내가 그때 그리 못되게 굴어 이제 벌을 받는구나, 이런 생각들 한번쯤은 해보고 살게 되지 않던가. 그렇지 않던가. 아파본 놈만 아픔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는데 그래도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것은 비슷한 아픔을 경험해보는 것.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던가. 허나, 정작 그 마음들을 돌려줄 이들은 이미 과거속에 머무는데 지금 내 마음 헤집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 미안함에 더 공을 들인다 한들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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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타이밍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사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연이란 것의 절반을 담당하는 하늘의 몫이고 이미 어긋나버린 타이밍 앞에서 아무리 후회하고 괴로워해본들 한번 어긋난 타이밍은 도로 제자리로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그렇게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그 시간들로 인해 스스로를 더 키워낼, 스스로에게 또 다른 어떤 가능성이 될 타이밍들을 놓쳐버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일지라도.

잊으라는 것도 아니다, 괴로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지난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진부한 충고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미안해하고 충분히 괴로워하되,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앞으로 걸어가야함을 잊지는 말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를 완성시켜 나가는것이야말로, 어느 시절에 나란 사람을 그렇게 사랑해주었던 누군가에 대한 생에서의 마지막 예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다. 흘러간 노래의 마지막 대목을 남겨보며 오늘의 사랑타령을 매듭짓는다. 사랑. 아아, 사랑.

'용서해요 날, 그것밖에는 안됐었던 나를. 다시 산다면 원하셨던 그대 삶 내가 돌려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