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미스터 탱탱탱.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 시절엔 그랬다. 왜 다들 그런 경험들은 한번씩들 있지 않은가? 그럭저럭 먹고 사는 문제 없이 살아가다가, 정확히 그것이 어떤 일인지 인지할 수는 없는 나이때 쯔음에 갑자기 먹고사니즘 혹은 생활의 여유에 큰 트러블이 발생하는 일 말이다. 흔한 원인으로는 채무 보장이라거나, 가족 중 누군가의 큰 병이라거나 혹은 가족 중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사고라거나, 부모님 중 누군가가 지인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가정 경제의 핵심 인물이 갑작스런 실직을 당하거나. 뭐 결론적으로 그런 저런 이유들로, 살짝 일반적이진 않아도 있을 법 한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집은 한 번 망했다.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 약 5억 가량 - 부동산 포함 - 이 허공으로 증발하는 걸 보며 나는 지금 생각해도 꽤나 한가롭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우리집 제법 잘 살았구나' 따위의 독백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대학 졸업반이었으니 당장 등록금이 없어서 졸업을 못 하고 그럴 상황은 아니었고, 애초에 대학 졸업하고 나서도 부모님께 손 벌려가며 어쩌고 해보려는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환경이건 정신세계건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가 없다. 번듯했던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반지하 빌라 생활을 시작한거야 뭐 지금 생각해도 별로 대단스레 불편치는 않았다. 넓고 책상도 침대도 알차게 들어와 있었던 바에서 쭉 뻗고 누우면 딱 몸 길이만한 크기의 방으로 바뀐건 좀 불편하긴 했어도 워낙 집에 붙어 있질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용돈이 끊긴건 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며 그래도 밥은 굶지 않고 다녔더랬고, 또 딱히 집이 망해서 돈이 없다는 것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끼니는 챙겨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다만 그 시절에 무척이나 나를 괴롭혔던 것들은 대충 다음 같은 것들이다. 졸업반쯤 해서 일년정도 휴학하고 어쩌고 하려던 모든 계획들이 다 먼지로 변해버려서 모든 계획들을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짜나가야 했던 것 - 심지어 졸업 후 취업하면 바로 결혼하려던 계획까지 포함 -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증가로 트러블이 잦아진 당시의 연애문제, 그리고 결정적으로 볓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 집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부모님의 슬픔과 분노들이었다. 집을 나서서는 엉켜버린 계획들을 수정하고 수습해나가는데 진이 빠졌고, 집에 들어와서는 집안을 내리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절망의 공기에 답답해서 좀처럼 쉬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던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술과 친구가 있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친해졌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제각각 다른 가정의 문제들 두어 너덧개쯤은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그 공통분모로 인해 친해졌던 녀석들이었다. 뭐랄까, 워낙 제각각의 문제들을, 그것도 남들이 들으면 꽤나 심각한 문제들을 품고 있었던 녀석들이라 녀석들 앞에서 딱히 이런저런 상황을 이야기해도 그게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 개그 포인트다. 우리가 처음 친해지고 친구란 이름으로 지내온 어떤 날들에는 반드시 그 중 누군가가 본인이 처한 그 상황으로 인해 술을 퍼먹건 맨정신이건 무언가 사건을 일으켰고, 그게 다시 안주거리가 되어 술자리를 부르고, 우리들이 '고통의 희화화' 혹은 '극도의 허무에서 나오는 초절정 저질 플레이'라고 부르던 그 사건들을 그 시기에 가장 많이 일으킨게 바로 나 - 정도의 일이 되어버린 거다. 마치 무슨 만화처럼 '난 부모님의 별거 카드를 꺼내고 턴을 마치겠다' '그럼 난 패가망신 카드로...' 같은 그런 느낌이었달까. 그래, 어쨌든 그 시기의 주인공은 나였다. 내가 가장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지금도 술자리 3차쯤 되면 최고급 안주처럼 등장하는 무수한 에피소드를 만들었던 시기인 거다. 어쩌면 그렇게 그 시절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거다.
바로 그 시기의 에피소드 중에 단연 최고로 꼽는 이야기다. 발단은 어느 저녁이었다. 언제나처럼 집안 공기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아버지의 분노가 또 한번 터졌더랬다. 그리고 그날따라 그 분노의 화살은 나를 향했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치밀어오는 억울함은 가슴에 꾹꾹 내리누른채 집을 나왔다. 당연한 수순처럼 당시 자취하던 S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앞뒤 자르고 '좀 재워다오 -_-' 라고 했고, 급하게 나오느라 입고 나온 츄리닝에 쓰레빠 차림 그대로 서울의 반대편에 있던 녀석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녀석의 집에 뒹굴다가, 저녁때쯤에 또 어디선가에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 집으로 향했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중간중간 필름이 끊길정도로 퍼마신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끌고 거의 새벽이 다 되어 집에 들어가서 뻗었더랬고, 다음날의 우환이 두려워서 몇시간이나 잤을까, 눈이 떠지자마자 아픈 속과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학교로 갔었더랬다. 다행히 날씨가 이른 아침이어도 밖에서 잔다고 입 돌아가고 할 정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던 지라 학과 건물 밖 야외 벤치에 드러누워서 모자란 잠을 청하다가 친구놈에게 전화를 걸어 몇시에 깨워달라고 얘기를 하고서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더랬다. 그리고 두어시간인가 지났나, 도착한 친구놈이 발로 툭툭 차며 나를 깨웠고, 겨우겨우 몸을 추슬러서 아지트 역활을 했던 S녀석의 자취방에 다시 찾아가 널브러져 있던 중에.
얼마나 또 지났을까, 다시 또 깨우는 S녀석의 발짓(?)에 눈을 떠보니 그놈들이 다 모여있었다. 그리고 잠이 덜 깨어 녀석들을 하나씩 쳐다보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이미 얼굴들에 다 사악한 웃음들이 가득. 불길한 예감이 가시기도 전에 앙숙처럼 으르렁대고 지내던 S2녀석이 자자, 이제 그럼 다같이 들어볼 시간이다 하고 컴퓨터에 가서 앉는거다. 상황 파악이 안되어 뭐여 - 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내게 돌아온건 닥치고 들으라는 말 뿐. 그리고 이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건 바로 만취한 나의 목소리였다. 사연인즉슨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S2녀석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 내용이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그러나 빵빵 터지는 내용이라 녀석이 통화내용을 녹음해서 MP3로 떠 온 거다. 마귀같은 색휘... 라고 느끼기도 전에 흘러나오고 있는 내 말들에, 정말이지 나도 미친듯이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통화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기엔 너무 육두문자가 많고, 일부만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S2 : 여보세요?
나 : 이런 개에에에에에에에에에 XXX ABCDEFGHIJKLMNom, 카아아아악 퉤
S2 : 크푸푸풉 뭐여. 또 어디서 술이라도 처먹은 거냐.
나 : 이런 씨부랄 탱탱부랄같은 놈, 개에에에에에에 XXX ABCDEFGHIJKLMNom 카악 퉤.
S2 : 크푸푸풉 아 미친X, 너 이거 녹음한다?
나 : 음? (급 정상 목소리로) 근데 넌 누구냐? 장사(다른 친구 이름)야?
S2 : 뭔소리여 나 S2잖아.
나 : 이런 씨부랄 탱탱부랄같은 놈, 개에에에에에에 XXX ABCDEFGHIJKLMNom 카악 퉤.
(이후 약 3분간 넌 누구냐? - 나야 - 개에에에 반복)
S2 : 아 근데 이 미친X가 크푸푸풉(이미 미친듯 웃고 있음) 어딘데?
나 : 어딘지는 알아서 뭐하냐? 이런 개에에에 (생략) 퉤
S2 : 아 지랄, 빨리 집에 기어들어가서 자~
나 : ...
S2 : ...여보세요?
나 : 집?
S2 : ?
나 : 후... 집에 들어간다고... 내 몸 하나 눞힐 곳이나 있겠냐이...
S2 : (잠깐 숙연해짐)
나 : 음? 근데 넌 누구냐? 장사야?
(이후 약 3분간 넌 누구냐? - 나야 - 개에에에 반복)
S2 : 푸푸푸푸푸풉 야 암턴 닥치고 빨리 들어가. 이거 낼 학교에 들고 간다.
나 : 후... 야, 내가 있잖냐... 하도 빡이 쳐서...
S2 : 그래서?
나 : 지나가는 차를 발로 깔까 하다가!!!!!!!!!!!!!!!!!!!!!!!
S2 : 야야야 워워워
나 : 돈이 없어서~~~~~~~~~~~~~~~~~~~~~~~~~~~~~~~~~~~~
나 : 차지도 못하고~~~~~~~~~~~~~~~~~~~~~~~~~~~~~~~~~~
나 : 참고, 참고, 또 참고~~~~~~~~~~~~~~~~~~~~~~~~~~~~
S2 : 크푸푸푸푸푸푸푸푸푸풒푸푸푸푸풉 (숨 넘어가는 중)
글로 쓰니까 느낌이 안 살긴 하는데...이쯤에서 녹음은 끝나 있었다. 방 안은 다들 거의 눈물을 질질 흘려 가며 쓰러지던 지경. 물론 나도 정말 미친듯이 웃었더랬다. 아니, 처음엔 그랬다. 근데 정말 웃기게도, 민망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미친듯이 웃다가 그냥 막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솔직히 울었더랬다. 근데 다행스럽게도, 다들 너무 웃다가 눈물을 질질 흘려가며 웃고 있었던 통에 눈물 나는게 티가 안났어. 결국 그렇게 웃음 반 눈물 반으로 청취를 마무리하고는, 고기나 구워먹자며 없는 돈을 끌어모아 삼겹살을 사러 갔다(자취방이 옥탑방). 그리고 고기를 먹는 내내 내가 한점 먹어볼라치면 '넌 고기나 구워 이뇬아 -_-' 라고 갈굼을 당했더랬지. 뭐 굴하지 않고 먹긴 했지만.
이 에피소드가 최고였던건 이게 딱 그 시절의 상징과 같은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건간에 한없이 괴롭고 슬프고, 근데 다함께 모여서 같이 웃고 떠들다보면 그게 그렇게 웃으며 지나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던 시절. 마치 상처 위에 밴드를 붙이듯, 괴롭고 힘든 기억에 빵빵 터지는 웃긴 에피소드들을 살포시 덮어놓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던 시절. 그 시절의 상징과도 같은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지금도 술자리에서 가끔 누군가가 선창을 하곤 한다. 지나가는 차를 발로 깔까 하다가~ -o- 그럼 나머지가 일제히 따라하지. 돈이 없어서~~~~~~~ -o- -o- -o- 남들이 보면 저 저 아저씨들 저거 술 취해서 뭐하는 짓들이야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만이 공유하는 그 시절의 기억. 아마도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삶이라는게 끝없는 굴곡 아닌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을 만날 적 마다 과거의 상처가 욱씬거리는 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묵은 상처들이 아파올 쯔음이면 마치 셋트메뉴처럼 따라붙어 올라오는 괴이한 에피소드들 때문에, 그렇게 마냥 아프지만은 않아도 되는 것. 어쩌면 그게 그 시절의 바보짓들이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마무리로는 저 에피소드의 '여파'로 인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끝내련다. 저 사건이 있고 한달인가 지났을까. 갑자기 S2 녀석이 말을 꺼낸다.
S2 : 야야, 내가 그 녹음파일을 뜨느라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놨거든.
나 : 에이 미친(...) 내가 지우라고 했냐 안했냐
S2 : 근데, 내 여동생이 그걸 들어버렸다
... 그 이후로, 나는 녀석네 동생에게, 이름을 말하면 몰라도 야 왜 그 탱탱탱... 하면 '아! 그 탱탱탱 아저씨!' 라고 알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로 마무리. 망할놈아 결혼식때 부를 생각도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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