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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12 낡음에 관하여 8

낡음에 관하여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철학 세미나를 해주신, '대형'이라고 불리는 선배가 계셨더랬다. 워낙 공굴리기(?)를 많이 하였던 시절인지라 형님과도 종종 당구장에서 큐를 맞대곤 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당구장 구석에 있던 TV에서 가요 프로그램같은 것이 하는데 자우림의 김윤아씨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근데 형님께서 자기 차례가 돌아와도 넋을 잃고 보고 계시는게 아닌가. 그랬다. 틈만 나면 김윤아씨의 매력에 대해 극찬을 하곤 하셨는데 그게 재미있는것이, 내가 그당시엔 그 매력을 몰랐더랬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예쁜 걸로만 따지면 더 예쁜, 어린 가수들이 넘쳐나던 때 아니던가. 그당시의 김윤아씨는 그저 매력적인 음색을 가진 여가수 - 정도로만 뇌리에 남아있었더라는 것.

그러던것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풍파 좀 겪고, 이래저래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맹렬한 감정의 소모를 겪고 있던 그 시절에 다시금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 이런 매력이었구나. 이래서 그 형님이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하셨던 것이었구나 하는.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것이 과연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야기일까, 행여 지나던 김윤아씨 팬이라도 우연찮게 이 글을 읽게 되면 무슨 망발이냐고 펄쩍 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긴 하는데 어찌되었건 그 당시에 내가 눈을 뜬 그녀의 매력이라는 것은 바로 일련의 '낡음'에 대한 매력이었다. 조금 낡은, 빛 바랜, 닳고 닳은. 이유없이 나른하게 느껴지는 권태 속에 순간 순간 반짝이는 빛을 품고 있는, 그런 느낌. 그냥 간단히 얘기하자면, 아무리 예쁘고 몸매좋고 어리고 노래 잘부르는 가수가 나온다 해도 애송이로써는 흉내내고 싶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런 매력이었달까.

그것은 아마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나 또한 그만치 어느정도는 '낡았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신체 기능의 저하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참 어쩌면 그랬을까 싶은 우여곡절 속에서 한계까지 울기도, 웃기도 하며 조금씩 마모된 감정의 모서리에 관한 얘기다. 그저 어느 순간, 이제 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순간만큼 많이 눈물을 흘릴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때 나오는 반쯤은 씁쓸한 조소. 삶이란게 그런 것인가 - 라는 어떤 나름의 깨달음들 속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약간의 권태와 그렇게 늘어지는 권태의 와중에서 찰나의 순간 반짝거리며 스스로를 일으켜세우는 즐거움과 행복. '세상 좀 살만큼 살고 풍파좀 겪을만치 겪어봤다' 라고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그런 분위기. 그런 어떤 감정의 마모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기에 다시금 그녀의 노래를 들을적에 또 감탄하고 감탄하게 되는것이다(일례로 나는 오지 오스본의 'Goodbye to romance'가 원곡보다 그녀가 부른 버전이 더 마음에 든다)

말이 나온 김에 그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낡음의 매력'에 대해 조금 덧붙여보자. 개인적으로 여성을 크리스마스 케익에 비유하는것을 무척이나 끔찍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원숙한 여성의 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소리임에 불과하다. 적당히 삶에 닳고 닳은, 사랑도 해볼만치 해본, 조금은 시니컬하고 냉소적이거나 권태스럽지만 적어도 남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 줄 아는 그런 매력은 풋사랑에 울고불고하는 어린 여성들로써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매력인것이다. 물론 경험에 따라, 삶의 과정에 따라 나이를 먹고서도 여전히 풋사과(?) 같은 순진무구함을 가졌다거나 하는것도 나름의 매력이 될 수 있을것이고, 그런 저런 부분들에 대해 누군가들이 느끼는 매력들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어찌되었건 단지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매력이 없어지고 한다는건 터무니없는 얘기란 말이다. 김윤아씨를 봐라! 무려 애엄마다!(...물론 그녀는 연예인이긴 하지만)

어쩌다보니 김윤아 예찬론과도 같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예로 든 것 뿐이지 날이 갈수록 그런 어떤 '낡음'에 대한 애정이 커져가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노릇이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특히나 선배나 직장 상사들을 대하는것이 어쩐지 어려웠더랬다. 아무래도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부대끼는것이, 뭔가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리프레쉬되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얘기하기도 편하고 너무 격식을 차리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쩐지 윗 분들을 대할적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다가 예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그분들의 어떤 인간적인 매력이나 관록에서 묻어나는 어떤 매력들이 참 좋고 멋드러져 보인다. 나도 저 나이를 먹으면 저런 매력들을 가지게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또 한없이 부끄럽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무언가 오래됨으로 인해 빚어지는 어떤 은은함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것이다. 그러다보면 이제 삼십대 중반으로 진입할랑말랑 하고 있는 나이에 너무 늙은이가 되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이 슬몃 들 정도로.

언젠가 석모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며, 인생의 황혼이 저만치 아름다울 수만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나은, 더 은은한 낡음의 빛을 띌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물론, 곱게 나이먹는 것은 세상 누구나에게 주어진 숙제, 그리고 좀처럼 쉽지 않은 숙제지만 말이다. 새로 지은 삐까뻔쩍한 건물의 새 사무실에서 낡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니 어쩐지 어색스럽다. 점심 먹고 앞에 있는 서울 역사박물관이라도 한바퀴 둘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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