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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이야기 (2)

어쩐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돌아온 휴가였다. 덕분에 쌓인 일거리가 마음을 스물스물 짓눌러 오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어서 오랫만에 블로그를 열어보니 이어 써야지 하다가 그대로 남아있는 이야기만 떡 하니. 언제나 그랬듯이 무언가에 매듭을 짓지 않고서는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는 불편한 성격의 인간인지라 어쨌든 이어가보자 하고 자판을 두드려본다. 


앞의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유래없이 멘탈이 먼지가 되어 있던 시절의 강원도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건 첫번째가 풍경이요, 두번째가 사람이다. 사실은 둘 사이에 선후를 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단지 그것은 내 운이 좋았다는 것을, 적어도 그날들까지는 내 운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절묘하게 두가지가 마치 두 다리처럼 나를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 하나의 다리,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그 시기에 좋은 사람들만 만났던 것은 또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Worst 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 그 시기의 나에게는 어쩐지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 경험들이 이후의 내 일이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니, 어쩌면 그 또한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항상 얘기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는것만 인복이 아니다, 내게 어떤 경험들이 필요할때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것이 복이다. 


어쨌든 우선 Best에 들었던 사람들 얘기를 먼저 해보자. 그곳에서의 사람들 얘기를 하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역시, 강원도에서 나의 생활중 웃음의 8할을 담당했던 J 선배다. 지금은 소식도 끊겨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냥반이 아니었으면 어찌 그 시기를 보냈을까 싶은. 진심으로 아직까지 감사해하고 있는 은인과도 같은, 그리고 내 평생 만난 사람중에 단연 탑에 꼽히는 괴인. J 선배. 


*

강원도에 가기 전에도 J선배를 만나고, 술을 마셨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그는 재미있는, 유쾌한 선배중의 한명일 뿐이었다. 경력으로 이직해서 처음 대기업의 프로세스라는 것을 접하고, 뭔가 어리둥절 멍때릭 있던 내게 처음 술을 사준 선배이기도 하고 말이다. 생김새는 모 만화에 등장하는 무용해 대리(...자타 공인이다)와 흡사했으며 특별히 대단히 수다스럽지 않았음에도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에 위트가 듬뿍 담겨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이야기들이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올릴때면 자동 빵 터짐을 재생하는 것을 볼때 실로 무시무시하리만치 재미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찌 부정할 방법이 없다. 


이를테면 음담패설 같은 것을 놓고 얘기할때 말이다. 


그게 정말 뭐 알 수 없는 기준이긴 하지만 내겐 약간 그런 기준이 있다. 똑같은 욕을 하고 똑같이 음담패설을 해도 뭔가 어떤 사람이 하면 굉장히 눈쌀 찌푸러지고 적당히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싶은 기분이 드는데 어떤 사람이 하면 그게 굉장히 천박하게 흐르지는 않으면서 미묘하게 '찰지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딘가의 식당에서 갑자기 주인이 쌍욕을 하면 멱살잡이를 하겠지만 욕쟁이 할머니 맛집에서는 괜히 빵빵 터지며 욕을 반찬삼아 배부르게 배를 채우고 나오는 그런 감정인게다. 단언컨데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중에 가장 욕을 찰지게 하는 사람이었고, 엄청나게 씨니컬한 음담패설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건 그가 했던 말들을 내가 옮겨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세상에서 그 사람의 그 표정과 그 말투로 해야 제대로 찰진 맛이 나오는 그런 말들인 것. 


워낙 척박한 프로젝트이기도 했었고, 당연히 야근과 스트레스는 숙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술을 마셨다. 어림잡아 생각해보면, 4개월, 얼추 120일. 주말을 제외하고 100여일이라고 본다면 그중 90일 정도는 함께 술을 마셨다. 또 그중 80여일은 둘만 술을 마셨다.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해서 쭈욱 말이다. 패턴도 매번 같았다. 일과시간에 일좀 하다 저녁먹으러 나가서 밥대신 맥주와 술. 먹고 들어와서 야근. 야근 후 밤중에 다시 술. 워낙 뭐 대단한 술집도 없던 동네였던지라 마시던 집은 항상 투다리. J선배의 말을 빌면 '반경 10키로 이내의 최고 미인'인 아주머니께서 운영하던 투다리에서 그렇게나 술을 마셨다. 아직도 그 투다리에서 팽이버섯말이 안주 천개를 먹으면 용이 될 수 있을거라던 그냥반의 말이 선하다. 그렇게 무수한 술자리들 속에서 알게 된 그는 단순히 술 좋아하고 재미있기만 한 그런 선배는 아니었다. 그는 나름 놀라운 스펙과 뚜렷한 주관.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의 재능과 놀랍도록 회전이 빠른 머리, 거기에 부러우리만치 너무도 뚜렷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막힌 구석이 없이 시원시원하고 분방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내가 그렇게나 그 사람을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존중'이었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던 내 습성을 처음에는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동참해서 둘이 함께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하였더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별 것 없었던 사랑 얘기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프로젝트 오픈 시점과 거의 맞물려 실연당하는 통에 멘탈이 먼지가 되어버려서 사실은 일까지도 거의 손에서 놓는 지경이었는데 그 철딱서니 없는 후배의 만행을 군소리 하나 없이 대충 커버해 주었다. 멘탈 붕괴가 정점을 찍었던 시점, 술에 쩔어 거의 반폐인이 되어 있을 적에도 딱히 뭐 잔소리나 충고나 그런 것도 없었더랬다. 그저 옆에서 같이 술을 마셔주고, 씨니컬한 개그를 한마디씩 집어던져서 웃을 일 없었던 날들에 뜬금없이 빵빵 터지게 해줬더랬다. 프로젝트 철수하고 나서 장렬한 마지막 술자리 한번으로 정리할때까지 참 그렇게나 의지가 될 수 없었달까. 


그냥반이 회사 일을 정리하고 자기가 원했던 일을 하고자 떠날 적에도 나는 여전히 일련의 방황을 지속중이었고, 그 와중에 새로운 일들에 적응하고자 분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허나 그렇게, 회사 일을 정리하고 쿨하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던 것도 참으로 그 냥반답다 하는 생각에 정말로 마음속으로는 응원하였더랬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 형님,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언젠가 나중에 우연히라도 한번 만나게 되면 우리 강원도는 아니어도 어디 투다리나 한번 가요. 팽이버섯말이 천개까진 못먹겠지만, 그래도 또 그때 그 날들을 얘기하며 술잔을 기울이면 하룻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것 아니겠습니까. 


*


세상에, 워낙 지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냥반인지라 이만치를 이미 다 써버렸다. 이런게 분량 조절 실패라는 것이구나. 어쨌든 추억에 빠져들다 보니 또 시간이 후딱 지나서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밀린 일거리들이 더이상은 못 기다리겠다 아우성을 치고 있어서 오늘은 이쯤 마무리해본다. 

그래도 뭐랄까. 이렇게 하나 하나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보니, 기분이 묘하네. 하하. 뭔가 아련히 그립기도 하고. 그렇게 찐득했던 슬픔들까지도, 그렇게 격렬하고 뜨거웠던, 그 모든 감정들의 격랑 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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