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이야, 좋아보인다

오랫만이야. 좋아보이네. 


히에에엑 생각만 해도 손발, 아니 사지가 오그라들어 죽을 것 같은 말이지만 뭐 살다 보면 꼭 본인이 아닌 주변에서라도 한번씩은 하거나 듣게 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일단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주구장창 나오고, 친구며 지인이며 지인의 친구며 친구의 지인이며... 요즘은 웃찾사인가? 개그 프로그램도 있더라. 다행스럽게도 나는 저 멘트를 해볼 기회가 없었더랬지만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는 대학교 친구 녀석의 사연 하나가 있다. 말복 기념으로(?) 잠깐 읊어본다면. 


오랜 연애를 한 친구 녀석이 있었다. 그리고 무수한 연인들이 그러하듯, 군대를 제대할 쯔음에 자연스럽게 이별을 했었더랬다. 뭐 한쪽의 바람이라거나, 진절머리나는 다툼의 결과였다거나, 집안의 반대였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으니 담백한 이별이었다고 얘기해도 좋지 않을까. 친구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정받았던 존재였다. 여러모로 친구에게 헌신적이기도 했었더랬고, 덕분에 철없던 우리들까지도 많은 배려를 받았더랬으니. 술자리에서 종종 농담처럼 얘기가 나올 적이면 '그분은 명예의 전당에 올려드려야 하지' 이런 이야기에 모두들 끄덕끄덕 수긍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기에 친구녀석이 이별을 선택했을때 여론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뭐 어쩌랴. 게다가 워낙 서로 간섭하는건 죽어라고 싫어하는 친구놈들의 특징도 있었으니 그저 그렇게 넘어갔었더랬는데. 


그만치의 비중을 차지하고 계셨던 분이니 이별 후에도 가끔 술자리마다 절반쯤은 친구를 골리려고, 절반쯤은 우연히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헤어진지 몇해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학교 뒤편의 술집에 다들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잔을 기울이던 중에 또 얘기가 나오게 되었더랬다. 그날은 술이 다들 좀 되었을까, 한참 이얘기 저얘기 하다가 어떤 놈 하나가 그놈의 휴대폰을 가져가서 한다는 얘기. '야, 나 네놈이 하도 떠들어대고 그래서 아직 전화번호도 외우고 있어. 내가 한번 전화 해 줘?' 라고. 지랄을 한다 해볼테면 해봐라 옥식각식 왁자지껄 떠들던 놈들을 바라보던 내가. 바로 내가. '뭘 그렇게 옥신각신대고만 있느냐아 -o-' 와 동시에 통화 버튼을 꾸욱. 설마 정말 누를 줄은 몰랐는지 모두가 순간 긴장속에 전화기를 바라보았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유난히 크게 울리던 전화벨 소리는 곧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와 함께 끊어졌다. 뭐 그런거지, 와하하하 차단당한건가 이러면서 언제 그랬냐는듯 까맣게 잊고 다시 화제를 돌려 술자리를 이어가던 중에 한시간쯤 지났나...


그놈의 전화벨이.울.렸.다.


그리고 그렇게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모두가 약속이나 한듯 순식간에 정적. 생각해보면 아니 뭐 아주 늦은 밤도 아니었던지라 다른 전화가 충분히 올 수 있었을 법도 한데 정말 거짓말처럼 모두가 '그녀다' '그녀야?' '그녀구나!' 를 직감한게다. 그리고 삽시간에 굳어지는 녀석의 표정.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는 녀석을 보고 나머지 모두는 놈이 폭발할것이 두려워서였는지 이런 중요한 대화를 방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는지 일제히 테이블에서 일어나 구석자리로 대피. 그리고 사람이 없던지라 조용했던 술집에서, 나즈막하지만 그렇게나 술을 다들 퍼마신 와중에서도 또렷이 들리던 녀석의 말. 


'어 오랫만이야. 우리 참 어색하다'


...그리고 그 말은 전설이 되어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깊어지는 술자리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멘트가 되었으니. 마치 추억의 화룡점정이요 인생의 한페이지에 남겨진 굵은 마침표요 대연애시대의 새로운 시작과 종말을 알리는 빵빠레와 같은 멘트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아 근데 어쩌지. 오랫만에 떠올린 말인데 타자 치고 있는 손가락이 부끄러워서 오글오글. 아 저게 맨정신에 떠올려보니 사지가 오그라드는 기분이 두배로구나. 그땐 또 나름 간지 났었더랬는데 지금 와서 떠올리니 뭐 이 중2도 아니...


너무 강렬하게 남아있던 사연, 멘트라 썰이 좀 길어졌지만 이어가보면 그렇다. 앞서 얘기했듯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저런 멘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게 될 일이 없길 바란다. 그렇다고 내가 뭐 사랑했던 사람들과 다시는 얼굴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끝에 끝을 보고 헤어진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어쩌면 이별 후에 꽤 오래 나를 미워하기도 했었겠지만 그런 경우는 제껴두고라도. 배에 붙어 가는 나이살들에 슬슬 골이 아파지는, 정말로 아저씨가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도 가끔 센치해지거나 감상에 빠지는 날들이 되면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생각이 나는 이들은 있다. 가끔씩은 정말로 거짓말같은 우연처럼 한번이라도 스쳐가며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건 정말 찰나다. 그런 마음이 일어났다가도 금새 도리도리하게 되는거다. 그건 단순히 우연히 마주쳤을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스스로 손발과 사지를 오그라들게 만들 어떤 멘트들을 하게 될까봐 그래서가 아니다. 그건 그냥, 나름의 어떤 주관과 고집의 산물인데 이를테면 이런것. 


과거는 과거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 어느 시절엔가 그렇게 전력으로 사랑했던 나는 그 시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거다. 지금의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나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서 아쉬움, 미련 같은것들 한점 없이 쿨하게 맺고 끊어지는 관계가 어디 그렇게 많겠나. 공을 들이고 마음을 다했던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무얼 어쩌겠는가. 그렇게 드라마같은 우연으로 마주치게 되어, 충분히 '좋아보인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좋아보이면 어떨까. 다행이겠지. 다행이라서 뭘 어쩌겠는가. 다행이야 그때 내가 이별하길 잘했지 하며 웃기지도 않는 자위라도 할건가. 날 버리고 가더니 잘먹고 잘사는구나 하며 잔디라도 한움큼 뜯어먹은 기분으로 입맛이라도 다실건가. 그게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도, 설령 순수한 기쁨만 있다 하더라도 남는건 없다. 그리고 장담컨데, 그 사랑이 뜨겁고 강렬했을 수록 그런 우연한 재회에서 남겨지는 감정의 찌꺼기들이란건 8할이 마이너스쪽이겠지. 


게다가 행여라도, 차마 인사치레라도 좋아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떻겠는가. 세월의 흔적이 조금 더해진 정도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예 과거의 모습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게끔 변해버린 모습이라면 그 말도 못할 씁쓸함들은 어쩌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끊임없는 기억 속에서의 미화 버프를 받아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던 그 모습들의 잔재가 개미 눈물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면 어쩌겠는가. 꿈꾸던 미청년이 연신 식은땀을 훔쳐가며 기름진 배를 뒤뚱거리면서 걸어가는 아저씨가 되어 있다면 어떻겠는가. 꿈 속의 여신같았던 그녀가 애들한테 신경질 부리는 뚱뚱한 뽀글이 파마의 중년 아줌마가 되어 있다면 어떻겠는가. 이미 무수하게도 많은,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행(까진 아니어도)의 결과로 '괜한 짓을 했다'는 증언들이 사방에 가득하다.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이 먹을수록 삭막해져가는 세상살이에서, 삶의 어느 순간 문득 떠올리면 그리운 마음이 일어나는 사람 하나 마음에 담아둘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얻기 힘든 축복일 지도 모른다. 그저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추억은 추억 대로 사랑은 사랑 대로 그대로 두고 걸어가는 것이 좋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if (그때 내가 이러저러요로그러 했더라면)  같은 의미없는 조건문들을 띄워보며 마음을 괴롭게 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것도,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충분히 그리운 마음이 들 만치 좋은 사람이었던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의 증명이다. 살아서 나와 마주치는 우연이 없다 해도 분명히 그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스스로 꿈꾸던 일들을 이뤄가며, 밝게 빛나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막연하지만 굳은 믿음. 누군가에게 그런 믿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또 얼마나 복된 일인가. 설령 그걸 알 수야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쓸데없이 길게 늘어졌지만 뭐 결론은 그렇다. 지나간 것들은 그저 가끔 그리워할 수 있는 그것들로 남겨두자. 괜히 상투적 표현들로 손발 오그라들어가며 어버버버 할 일은 바라지도 만들지도 말자.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연찮게 마주쳐서, 그것도 어디 길가다가 모른척하고 폭풍처럼 스쳐지나갈 수도 없게 딱 마주쳐서 무언가 한마디라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이런건 어떨까. 표정도 대사도 어디 드라마에서 많이 본듯한 그런 것 말고, 깜짝 놀랄만치 솔직해진 한마디를 해보는건 말이다.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두어번 뛴 다음에 어마무지하게 환하게 웃으며, 아니 이게 누구야! 진짜 진짜 보고 싶었더랬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이런거 말이다. 적어도 씁쓸함보다는 누군가 나를 오랫동안 그리워했었구나 하는 마음에 서로 잠시잠깐 행복해지기라도 하게 말이다. 아 아냐. 무엇을 상상하고 설령 무엇을 연습해 놓는다 하더라도 정작 그 순간이면 대뇌의 전두엽이 작동을 멈출 수도 있겠지. 그러니 역시 이런건 그냥 상상만으로 그만두자. 마무리로 노래 한곡 띄워 드립니다(진짜 띄우는건 아니고). 버벌진트가 부릅니다. 좋아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