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패션 시대

어릴적부터 옷 입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소시적엔 가정형편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고, 어린 자식 패션까지 신경쓰기에 부모님은 너무 바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일년에 십센치씩 미친듯이 자라던 중학교 이전, 그러니까 초등학교까지는 누나 옷을 물려받아 입거나 어머니가 간간히 사다주시던 옷들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었다. 어쩌면 터무니없이 철이 일찍 들었던게다. 멋진 운동화나 이쁜 옷같은 것을 사달라고 떼쓰는건 상상도 못했으니. 그저 그런걸로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속 썩이면 안되지 - 라고 하고 덤덤하게 그 시절을 지나간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노릇. 


중고등학교때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단지 위에 썼듯 일년에 십센치씩 막 폭풍처럼 자라던 시기였기에 중2무렵부터 누나 옷보다는 아버지 옷을 입고 다녔다는 차이 정도다. 덕분에 친구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기도 했고 질풍 노도의 시기였으니 당시 유행하던 청바지니 농구화니 같은것에 은근 욕심도 났었더랬지만 여전히 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더랬다(이렇게 쓰면 되게 착한 아들이었던것 같지만, 그런 투정 대신에 어디서 사고치고 다치고 똑딱똑딱 부러지고 하는 걸로 충분히 속을 썩였으니 그건 아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빨래만 되어 있고 몸에만 맞으면 아무거나 주워 입던 시절이다. 사실 미친 성장판 전격 개방 때문에 길어져버린 몸뚱이에 걸칠 만한 것들이 드물어서 몸에 맞는 것 찾기에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고등학교 후반쯤과 대학교땐 그나마 상황이 조금 개선되었는데, 몸에 맞는 옷 하나 건졌다 싶으면 아주 그냥 너덜너덜하게 될때까지 입고 다니던 동생을 어릴적부터 불쌍히 녀긴(-_-;;) 누님께서 본인 옷 사고 그러면서 하나씩 둘씩 옷을 사다주는 일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친구들과 부대끼다보니 같이 옷을 사러 가는 일이 일년에 한 두번 정도씩은 있었더랬고. 게다가 뭐 고3때부터 연애 전선에 뛰어들다보니... 아주 막 그지꼴로 살 수야 없는 노릇 아니냐.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패션에 대한 관심은 개미 눈물 정도였다. 십수년간 굳어진 습성이 쉽게 바뀔리 만무하고 빼빼로 체형의 몸뚱이는 패션을 추구하기엔 너무 제약이 많았다. 


이쁜 옷을 보면 뭐해. 다 짧은데. 게다가 사람 많은 백화점이며 뭣이며를 돌아다니는건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무려 찾기도 힘든 긴 옷을 찾기 위한 쇼핑이라니. 그 시절에 쇼핑을 다닐때의 나를 떠올리면, 뭐 이건 그냥 한마리 하이에나였다. 대충 훑다가 어 저거 좀 길어보인다 하면 입어보고 사고 바로 쇼핑타운 탈출(-_-;;) 그러니 뭐 자연스레 '의존적인 패션(걍 사다주면 입음)'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과거 사진 속의 나를 보면 그야말로... 갓뎀어메이징 너 연애는 어떻게 하고 살았던거냐. oTL 이 수준이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건, 우습게도 나이 서른을 먹고부터였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변할 일이 뭐가 있겠어. 사랑뿐이지. 나이 서른쯔음에 눈을 멀게 만든 열애는, 어처구니없이 빨리 끝나버렸지만 참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30년간 같은 머리스타일을 고집해온 나를 이끌고 찾아간 미용실에서 처음으로 짧은 머리에 왁스를 바른 스타일링을 하게 만들었고, 30년동안 물어뜯어서 멀쩡할 날 없던 손톱에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서 하루아침에 습관을 고쳐놨더랬다. 당시에도 정장 이외의 옷들은 꽤나 엉성 처참한 상태였을텐데 그것들을 '지적'하기보다는 '이 옷 좋아'라는 말들로 명확하게 본인의 취향을 말해줬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노릇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 그리고 가장 크게 받은것은 역시 스스로의 처참한 상태를 돌아보게 하고, 꾸미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것이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무슨 날이었는지 그날따라 '오늘은 멋있게 하고 나와야해'라는 말을 해서 정말이지 잔뜩 긴장을 하고 준비를 했더랬다. 근데 그게 참 그렇잖나. 차라리 그냥 보통 입던것처럼 정장이나 차려 입고 멀끔하게 나갔으면 마이너스라도 안되었던 것인데, 머리부터 시작해서 평소엔 5초 이상 들여다볼 일 없는 옷장을 다 헤집어가며 온갖 옷들을 꺼내 입다가... 결국 약속시간이 다 되어 뛰어나갔는데 그때 길가다 우연히 쇼윈도를 통해 본 내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 그 자체였다. 그걸 옷이라고 입고 나간건가 싶은 처참한, 난 멋부려본 적이 없는 남자 하지만 오늘은 애써 신경써봤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엉성한 언발란스에 그로테스크(-_-?;;) 한 패션의 완성. 물론 그 몰골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웃어주던 배려를 아낌없이 받았지만 적어도 그날 확실히 자각한 것이다. 야 너 상태가 좀 심각하다 라는 것을.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스스로 옷을 사는 시대가 열렸다.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에게 뭔가 쓰는데는 인색한데, 마치 지나왔던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땐 가차없이 뭔가 질렀다. 하루는 정장, 셔츠, 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방에 지른 날도 있었더랬지. 물론 브랜드 같은 것은 여전히 관심이 없어서 한참 재미를 붙이게 된게 인터넷 쇼핑이었다. 이게 익숙해지니 편하더라고.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클릭질 하다 빡치는 경우는 많지만 어쨌든 길이에 맞는 옷들도 어딘가에는 널려 있고, 저렴하게 다양한 아이템을 구비할 수도 있는거였다. 이 패턴도 그때 굳어져서 지금도 내 옷의 8할은 인터넷 구매다. 


또 두드러졌던 변화는 무채색 30년 인생 탈피였지. 그게 되게 재미있는 노릇이다. 시작은 위에 얘기했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 뽑은 날이었는데 원래 정장만 사려고 갔던 거였다. 그러다 쇼윈도에 전시되어 있던 빨간 셔츠가 왠일인지 눈에 빡 꽂혀서 입어봤는데 왠걸. 점원이야 뭐 당연히 판매를 위해 겁나게 잘 어울린다고 막 호들갑을 떨어주시는데 그걸 배체하고 스스로 봐도 나쁘지 않은게다. 이전까지 나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색깔이라 고민고민 끝에 뭐에 씌인 듯 같이 들고 왔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엄청나게 좋아하게 되었더랬다. 사람들 반응도 폭발적이었지. 원색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평. 물론 지금도 난 기본적으로는 무채색이 좋다. 분명한 변화는 잘 맞고 괜찮은 것 같은데 원색이란 이유로 피하는 일은 없어진거지. 


아직도 그렇게 그날 뽑은 풀셋을 입고 머리까지 미용실 머리 해서 힘을 뽝 주고 사람 많은 강남대로에서 그 사람을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 사람은 보자마자 와 - 를 연발했고, 그게 그렇게 머쓱하면서도 기쁠 수가 없었다. 길을 가느 와중에도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시선이 막 엄청 쏟아지던 수준이었지. 과장 아니고 정말로. 근데 그게 싫지가 않았어. 그날은. 평소에도 키 크다고 흘끔흘끔을 많이 시전당하는 편이라 그 시선들이 싫어서 사람들 많은 데를 피하게 되기까지 한건데 그날을 기점으로 달라진거다. 시선들에 덤덤, 조금 보태면 당당해진 거다. 어쩌면 패션이야 어찌되었건 그만큼 놀라운 기적도 없는거지. 허허. 


결국 그 열애 이후로 인생에 새로운 재미가 생긴거다. 옷을 사려고 쇼핑하는 재미, 그리고 마음에 드는 녀석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 거기에 두근거리며 옷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즐거움, 도착한 옷이 기대 이상으로 꼭 맞고 마음에 쏙 들때의 빅 기쁨. 신경 좀 쓰고 나간 날에 사람들이 오오 - 하면 느끼는 으쓱함.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이것저것 챙겨입고 나왔는데 쇼윈도에 비춰진 모습이 생각보다 쓸만할때 느끼는 만족감. 하하.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서른 다섯까진 꾸미고 다녀야해' 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그 사람의 말처럼, 서른 다섯까지는 이것저것 사모으며 30년 넘게 이어진 의존 패션 성향에서 완벽하게 탈피했더랬다. 


그리고 또, 그렇게 예기치않게 변화의 날은 찾아왔지.


물론 언제부턴가 연애때나 결혼때나 별 차이 없이 너무 늘어지진 말아야 한다 - 라고 생각을 하긴 해도 이게 결혼을 하니 확실히 달라지는 건 있는거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막 불꽃 클릭질 해 가며 옷을 사고, 막 힘줘서 꾸미고 그런 것들은 슬슬 귀찮아지는거지. 게다가 아무리 뭐 사고 이러는 것에 대해 얘기만 하면 별 얘기 없이 오케이 하는 아내님이라 하더라도, 용돈 받아 쓰는 유부남으로써 막 그렇게 얘전처럼 속시원히 지르기도 애매하고. 그러다보니 서른 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슬슬 옷 쇼핑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그저 계절에 맞게 구비해야 할 옷들을 충실하게 구비해두는 시즌 준비 정도가 되는거지. 한때는 머리도 짤은 스타일을 유지하며 아침에 어떻게든 조물조물 만지고 나갔었는데 이젠 그도 귀찮아서 그냥 적당한 길이를 유지하는 스타일로 돌아가고.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연애 시절부터 내가 이것저것 알아서 챙겨입고 다니는 것을 봐왔던 아내님이었기에 연애할적엔, 그리고 결혼 후에도 1년 정도는 가끔 기념일 때 선물을 옷을 고르는 경우는 있어도 평소 입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여가 없었더랬다. 근데 해가 넘어가며 내가 직접 옷을 사는 경우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본인도 본인 취향에 따라 입혀보고 싶은 옷들이 있는거라. 어느 날 부터인가 아무 이벤트가 없는 날임에도 '이거 입어봐' 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또 그러다보니... 편해! 일단 사이즈를 완벽히 간파하고 계시어 사오는 녀석들이 몸에 잘 맞을 뿐더러 내 취향에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 거기에 더해 일단 길이만 잘 맞으면 정말 정말 내 취향이 극단적으로 아니고서야 어떻게든 잘 입고 다니는 스스로의 패턴에도 적합하고. 그렇게 입을 것들이 늘어나니 굳이 내가 분노의 클릭질을 하며 쇼핑을 하는 횟수는 더 줄어들고. 이제 지금은 5:5정도까지 다시 조정된 것 같다. 뭔가 생각해보면, 본격 유부남의 아내님 의존 패션시대가 열린 것 같기도 하고. 


망년회의 여파로 아침에 간신히 눈을 떠서,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왔는데 문득 보니 전신에 걸친 모든것들이 Gift by 아내님 인것을 느끼고 왠지 모를 감회에 써본 글이다. 그렇게 대 패션 시대는 저물었으되 예전처럼 그지꼴로 살지는 않습니다 - 라는 기묘한 결론으로 매듭지어본다. 그래, 뭐, 서른 다섯까진 열심히 꾸몄잖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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