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이야기 (1)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프로젝트 출장 때문에 사북에서 4개월 동안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 말이다. 이후로 7년동안이나 그 4개월의 기억은, 술마시다 꿀적한 기억들을 떠올릴적에만 상징처럼 와락 일어나곤 했던, 우연찮은 회상씬까지도 그다지 달갑지는 않아 금새 머리를 휘휘 휘둘러 털어내 버리곤 했던 기억이었다. 처음의 2개월은 원치 않았던 롱디와 팡팡 터지는 일거리들 덕분에 힘들었더랬고, 나중의 2개월은 역시나 원치 않았던 실연으로 인해 멘탈이 먼지가 되어서 괴로워했던 때였으니 굳이 끄집어낼 이유가 없었던 기억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근데 작년 쯔음 부터였나, 한번은 그곳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서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더랬다. 어쩌면 그 괴로웠던 기억들조차 이젠 그저 지난 일이라 하며 옅은 미소로 마주대할 수 있을만치의 시간이 흘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위에 썼던 이유로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기도 했었지만, 외려 그 괴롭고 힘들었던 와중에도 정말 깨알같이 즐겁기도, 신기하기도, 다시는 없겠다 싶은 경험들도 존재했던 기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왠지 모르게 자꾸만 글이 쓰고 싶어지고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이제 와서 한번 그 이야기들을 남겨볼까 한다. 뭐 별다른 이야기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저 왠 아저씨가 집 떠나 눈이 펑펑 쏟아지던 강원도에서 인생에 있어서의 희노애락의 정점을 찍던 시절에 대한 회고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자 그럼 뭣부터 얘기해볼까.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자. 때는 바야흐로 2006년 11월. 입사 후 정식으로 투입된 프로젝트로는 첫 프로젝트. 한참 열애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던지라 정말 마뜩치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고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는 강원도행 버스에 탑승. 자, 그리고 어땠더랬지? 뭐가 좋았더랬지? 회상의 흐름을 방해하는 꿀꿀한 기억들의 틈바구니에서 자 떠올려보자구. 뭐가 그렇게 좋았더랬지? 뭐가 신기했더랬지? 뭐가 그렇게, 아마도 살아가며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그런 유니크한 기억들이었지?


그래, 첫번째는 역시 '풍경' 이었다. 4개월동안 머물렀던 사북읍의. 단지 작은 산골 마을의 풍경 뭐 이런게 아니라 겨울. 눈. 밤. 고요.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풍경들.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끔씩 슬픔까지도 잊혀지게 만들던 풍경들 말이다. 


*


제일 좋아하는 계절을 누가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겨울을 꼽는 사람이고, 왜 겨울이 좋아? 라고 묻는다면 역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눈이 오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실 계절과 날씨는 무엇보다 너무도 좋았던거다. 왜, 사람마다 단어를 딱 말할때 연상되는 무언가들이 다 다르지 않은가. 내가 '눈'을 떠올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 시절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그 시절 이후로 눈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조건 반사적으로 그렇게나 눈이 많이 내리던 그 시절 그 어떤 날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다. 정말로 천지사방이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있던. 그렇게 세상을 하얗게 물들여놓고도 멈출 기색도 없이 쏟아져 내리더 눈송이들. 가만히 머리속에 띄워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 그 풍경들. 물론 매년 폭설로 인한 피해도 있고, 강원도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눈때문에 정말 이가 갈릴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어찌되었거나 서울 촌놈으로써는 그렇게나 쏟아지던 함박눈들에 똥강아지마냥 신나서 껑충껑충 뛰어다닐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려, 출장 첫날부터 그랬더랬다. 


새로 연애, 그것도 열애를 시작한지 100일도 안된 시점에서 뜬금없이 지방 출장을 가게 된 참이었으니 기분이 좋았을리가 없다. 꿀꿀한 기분으로 짐을 챙겨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마치 기분만치나 흐렸던 하늘에서 한두송이씩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많이 내리는 눈은 아니었던지라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 눈을 붙였고, 세시간 반정도 지났을까 이내 도착을 알리는 기사님의 목소리에 눈을 떠서 짐을 챙겨 내렸더랬다.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려 가면서 전화로 알려준대로 택시를 타고는 프로젝트 사무실에 도착. 그리고 D 선배를 만났다. 꿀꿀했던 강원도 생활 속에서 빅 재미의 8할 정도를 차지했던 D 선배를. 앞으로 4개월간 일어나게 될 버라이어티한 일들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채 D 선배의 환대를 받고, 프로젝트 PM 님께 인사를 드리고, 짐을 풀고, 이것저것 잡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환영을 겸한 첫날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더랬다. 뭐 워낙 술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D 선배와 함께였으니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이어진건 당연지사. 아마 3차까지 갔었더랬나. 시간은 얼추 새벽 두시쯤 된 것 같은데 기어코 한잔 더 하자는 말에 마지막 집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한시간인가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정말로 얼큰이 술이 올라 밖으로 나왔는데. 


정말로 딱 한시간만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눈이 쌓여 있었더랬지. 


진짜 그때의 기분은 무슨 마법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앞으로 벌어지게 될 꿀꿀한 일들에 대해서 아직 전혀 예측도 못하고 있었지, 첫 날이고 좋아하는 선배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기분도 업된데다 내가 또 사실 그렇게 새로운 환경같은걸 싫어하는 인간이 아니에요. 게다가 술까지 마실 만큼 마셨는데 한밤중의 시골 마을에 술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온통 어둠뿐이었는데 딱 한시간 마시다 나오니 온통 순백으로 물들어 있어. 캬 이거 뭐 신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거다. 야 이거 뭐여. 눈에 막 발이 퍽퍽 들어가네? 겅정겅정 어설프게 뛰어다니다가 몸개그도 저질렀다. 뒤로 벌렁 자빠져서 뒤통수를 제대로 박았는데... 안아프네? 이게 술의 탓이었는지 워낙 삽시간에 푹신하게 쌓였던 눈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러고도 좋다고 한참을 그 아무도 없는 거리를 쏘다니다 숙소로 들어갔더랬다. 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근사한 겨울밤이었는데. 


어쨌거나, 이후에도 그렇게나 쏟아졌던 많은 눈들, 그리고 근사했던 많은 겨울밤들은 그 괴로웠던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더랬다. 주말에 서울에 올라가서 장렬하게 채이고, 거의 이틀을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기차를 타고 내려온 날도 마찬가지였다. 청량리 역에서 막차를 탔었더랬나, 새벽 두어시쯤에 도착한 사북역의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늘상 버스를 타서 몰랐었는데 기차를 타고 내리니 그 작은 마을을 주욱 가로질러 걸어가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더랬지. 정말로 끔찍하게도 비참한 기분이었음에도 무릎까지 푹푹 파묻히는 눈의 감촉들이, 그리고 그 새벽에도 온통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퍼붓고 있던 함박눈들이 굉장히 극적인 풍경을 그려냈고, 그게 그렇게나 끔찍한 기분 속에서도 절반쯤은 허탈하게 웃음이 배어나오게 만들던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한번 눈을 감고 그려보시라. 사랑을 잃고 비참하게 도망친 패잔병, 밤기차에 몸을 싣고 도착한 작은 시골역. 정말로 눈앞을 가릴만치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 잔뜩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불빛 하나 없이 고요한, 그런데 천지사방이 온통 하얗게 눈으로 물들어 있는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는 반쯤 넋이 나가 보이는 듯한 남자. 뭐라 해도 뭔가 짜한 그림 아닌가. 아닌...가?


*


앞서 말한 괴로웠던 기억들 덕분에, 이후로 그곳, 사북을 찾은 적이 없다. 아, 다른 일 때문에 여름에 한번 갔었던 적은 있었더랬는데 그건 패스하고. 아마 그곳도 많이 바뀌었겠지. 내가 갔던 그 해가 K랜드 스키장이 오픈하던 해였으니 아마 지금쯤은 그 영향으로라도 많이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사실 별로 더 가고 싶지 않은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묵었던 숙소의 위치나, 프로젝트를 했던 사무실의 위치도 절묘했더랬다. 읍내에서 살짝 떨어진, 터미널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사실 낮에도 오가는 차는 있어도 사람 구경은 좀처럼 할 일이 없었던(프로젝트 사람들 빼고). 돌이켜 보면 그 시절만큼 원하는 만치 얼마든지 절대고요, 절대고독을 접할 수 있었던 시절도 없었다. 


특히나 실연 후의 2개월은 더 그랬더랬지. 반 폐인 상태로 살면서 거의 매일 술독에 빠져 있었더랬는데, 거의 매일같이 함께 술을 마셔주던 D 선배가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사실 혼자서 많이도 헤매고 다녔었더랬다. 특히나 눈이 내리던 날은 어김없이. 어차피 술을 마셔도 잠도 잘 오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몇 시가 되었건 상관없이 숙소를 나와서, 입술을 꾹 다물고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아가며 천천히 걸었더랬다. 때로는 이리로, 때로는 저리로. 때로는 메마른 개울 위로 쌓이는 눈송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때로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정처없이 걷기도 했었다. 누가 봤으면 어떤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래도 그것들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정신줄 잡고 있기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얘기 운 띄우고 풍경 얘기 하나 했는데 이만치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만치 좋았던 것이리라 하면 될 것 같다. 만약 저런 비슷한 겨울밤의 풍경을 느껴 보지 못한 분이시라면 한번쯤은 꼭 권해주고 싶을 만치 말이다. 세상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너무나 하얗고 너무나 검고 너무나 고요한, 이빨이 딱딱 부딪쳐올 만치, 입김까지 하얗게 얼어서 눈발에 섞이는 착각마저 들 마치 춥고 외롭지만, 그 모든것들이 너무다 멋지게 어우러져서 극적으로 행복해지는 괴이한 경험들을 느껴 보시라고 말이다. 아 물론 굳이 실연까지 당해가며 겪을 필요는 없다. 굳이 그렇게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우울함과 슬픔들이 아니어도 충분히 누구나 사랑할 수 있을 법한 풍경이니 말이다. 일단 풍경 이야기는 이정도로 마무리. 근데 정말 그것도 웃기는 노릇이지 뭐야.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풍경들을 대하던 날들에, 그 흔한 사진 한장을 안찍어뒀어. 어쩌면 그래서 충분히 더 기억 속에서만 미화되고 미화되어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사람 기억이란게 그렇게 간사하잖나. 어쨌든 다음에 또 이어서 써야지. 다음번엔 뭘 쓴다. 아 사람. 당연히 사람 얘기를 해야지. 사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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