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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16 헬로 미스터 탱탱탱. 10
  2. 2015.01.07 강원도 이야기 (3) 2
  3. 2014.12.12 대 패션 시대 3
  4. 2014.10.27 강원도 이야기 (2) 4
  5. 2014.08.20 강원도 이야기 (1) 6
  6. 2014.07.24 네 이웃의 공로를 탐하지 말라 4
  7. 2014.07.22 맛있는 인생 4
  8. 2014.07.21 냉면 2
  9. 2013.03.06 그저 잡담 2
  10. 2013.02.25 1년만의 우울 7

헬로 미스터 탱탱탱.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 시절엔 그랬다. 왜 다들 그런  경험들은 한번씩들 있지 않은가? 그럭저럭 먹고 사는 문제 없이 살아가다가, 정확히 그것이 어떤 일인지 인지할 수는 없는 나이때 쯔음에 갑자기 먹고사니즘 혹은 생활의 여유에 큰 트러블이 발생하는 일 말이다. 흔한 원인으로는 채무 보장이라거나, 가족 중 누군가의 큰 병이라거나 혹은 가족 중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사고라거나, 부모님 중 누군가가 지인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가정 경제의 핵심 인물이 갑작스런 실직을 당하거나. 뭐 결론적으로 그런 저런 이유들로, 살짝 일반적이진 않아도 있을 법 한 그런 이유로 인해 우리집은 한 번 망했다.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 약 5억 가량 - 부동산 포함 - 이 허공으로 증발하는 걸 보며 나는 지금 생각해도 꽤나 한가롭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우리집 제법 잘 살았구나' 따위의 독백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대학 졸업반이었으니 당장 등록금이 없어서 졸업을 못 하고 그럴 상황은 아니었고, 애초에 대학 졸업하고 나서도 부모님께 손 벌려가며 어쩌고 해보려는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환경이건 정신세계건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가 없다. 번듯했던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반지하 빌라 생활을 시작한거야 뭐 지금 생각해도 별로 대단스레 불편치는 않았다. 넓고 책상도 침대도 알차게 들어와 있었던 바에서 쭉 뻗고 누우면 딱 몸 길이만한 크기의 방으로 바뀐건 좀 불편하긴 했어도 워낙 집에 붙어 있질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용돈이 끊긴건 졸업 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며 그래도 밥은 굶지 않고 다녔더랬고, 또 딱히 집이 망해서 돈이 없다는 것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끼니는 챙겨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다만 그 시절에 무척이나 나를 괴롭혔던 것들은 대충 다음 같은 것들이다. 졸업반쯤 해서 일년정도 휴학하고 어쩌고 하려던 모든 계획들이 다 먼지로 변해버려서 모든 계획들을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짜나가야 했던 것 - 심지어 졸업 후 취업하면 바로 결혼하려던 계획까지 포함 -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증가로 트러블이 잦아진 당시의 연애문제, 그리고 결정적으로 볓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 집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부모님의 슬픔과 분노들이었다. 집을 나서서는 엉켜버린 계획들을 수정하고 수습해나가는데 진이 빠졌고, 집에 들어와서는 집안을 내리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절망의 공기에 답답해서 좀처럼 쉬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던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술과 친구가 있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친해졌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제각각 다른 가정의 문제들 두어 너덧개쯤은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그 공통분모로 인해 친해졌던 녀석들이었다. 뭐랄까, 워낙 제각각의 문제들을, 그것도 남들이 들으면 꽤나 심각한 문제들을 품고 있었던 녀석들이라 녀석들 앞에서 딱히 이런저런 상황을 이야기해도 그게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 개그 포인트다. 우리가 처음 친해지고 친구란 이름으로 지내온 어떤 날들에는 반드시 그 중 누군가가 본인이 처한 그 상황으로 인해 술을 퍼먹건 맨정신이건 무언가 사건을 일으켰고, 그게 다시 안주거리가 되어 술자리를 부르고, 우리들이 '고통의 희화화' 혹은 '극도의 허무에서 나오는 초절정 저질 플레이'라고 부르던 그 사건들을 그 시기에 가장 많이 일으킨게 바로 나 - 정도의 일이 되어버린 거다. 마치 무슨 만화처럼 '난 부모님의 별거 카드를 꺼내고 턴을 마치겠다' '그럼 난 패가망신 카드로...' 같은 그런 느낌이었달까. 그래, 어쨌든 그 시기의 주인공은 나였다. 내가 가장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지금도 술자리 3차쯤 되면 최고급 안주처럼 등장하는 무수한 에피소드를 만들었던 시기인 거다. 어쩌면 그렇게 그 시절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거다.

바로 그 시기의 에피소드 중에 단연 최고로 꼽는 이야기다. 발단은 어느 저녁이었다. 언제나처럼 집안 공기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던 아버지의 분노가 또 한번 터졌더랬다. 그리고 그날따라 그 분노의 화살은 나를 향했다.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치밀어오는 억울함은 가슴에 꾹꾹 내리누른채 집을 나왔다. 당연한 수순처럼 당시 자취하던 S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앞뒤 자르고 '좀 재워다오 -_-' 라고 했고, 급하게 나오느라 입고 나온 츄리닝에 쓰레빠 차림 그대로 서울의 반대편에 있던 녀석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녀석의 집에 뒹굴다가, 저녁때쯤에 또 어디선가에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 집으로 향했는데 그게 시작이었다. 중간중간 필름이 끊길정도로 퍼마신 상태에서 억지로 몸을 끌고 거의 새벽이 다 되어 집에 들어가서 뻗었더랬고, 다음날의 우환이 두려워서 몇시간이나 잤을까, 눈이 떠지자마자 아픈 속과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학교로 갔었더랬다. 다행히 날씨가 이른 아침이어도 밖에서 잔다고 입 돌아가고 할 정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던 지라 학과 건물 밖 야외 벤치에 드러누워서 모자란 잠을 청하다가 친구놈에게 전화를 걸어 몇시에 깨워달라고 얘기를 하고서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더랬다. 그리고 두어시간인가 지났나, 도착한 친구놈이 발로 툭툭 차며 나를 깨웠고, 겨우겨우 몸을 추슬러서 아지트 역활을 했던 S녀석의 자취방에 다시 찾아가 널브러져 있던 중에.

얼마나 또 지났을까, 다시 또 깨우는 S녀석의 발짓(?)에 눈을 떠보니 그놈들이 다 모여있었다. 그리고 잠이 덜 깨어 녀석들을 하나씩 쳐다보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이미 얼굴들에 다 사악한 웃음들이 가득. 불길한 예감이 가시기도 전에 앙숙처럼 으르렁대고 지내던 S2녀석이 자자, 이제 그럼 다같이 들어볼 시간이다 하고 컴퓨터에 가서 앉는거다. 상황 파악이 안되어 뭐여 - 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내게 돌아온건 닥치고 들으라는 말 뿐. 그리고 이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건 바로 만취한 나의 목소리였다. 사연인즉슨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S2녀석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 내용이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그러나 빵빵 터지는 내용이라 녀석이 통화내용을 녹음해서 MP3로 떠 온 거다. 마귀같은 색휘... 라고 느끼기도 전에 흘러나오고 있는 내 말들에, 정말이지 나도 미친듯이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통화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기엔 너무 육두문자가 많고, 일부만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S2 : 여보세요?
나 : 이런 개에에에에에에에에에 XXX ABCDEFGHIJKLMNom, 카아아아악 퉤
S2 : 크푸푸풉 뭐여. 또 어디서 술이라도 처먹은 거냐.
나 : 이런 씨부랄 탱탱부랄같은 놈, 개에에에에에에 XXX ABCDEFGHIJKLMNom 카악 퉤.
S2 : 크푸푸풉 아 미친X, 너 이거 녹음한다?
나 : 음? (급 정상 목소리로) 근데 넌 누구냐? 장사(다른 친구 이름)야?
S2 : 뭔소리여 나 S2잖아.
나 : 이런 씨부랄 탱탱부랄같은 놈, 개에에에에에에 XXX ABCDEFGHIJKLMNom 카악 퉤.

(이후 약 3분간 넌 누구냐? - 나야 - 개에에에 반복)

S2 : 아 근데 이 미친X가 크푸푸풉(이미 미친듯 웃고 있음) 어딘데?
나 : 어딘지는 알아서 뭐하냐? 이런 개에에에 (생략) 퉤
S2 : 아 지랄, 빨리 집에 기어들어가서 자~
나 : ...
S2 : ...여보세요?
나 : 집?
S2 : ?
나 : 후... 집에 들어간다고... 내 몸 하나 눞힐 곳이나 있겠냐이...
S2 : (잠깐 숙연해짐)
나 : 음? 근데 넌 누구냐? 장사야?

(이후 약 3분간 넌 누구냐? - 나야 - 개에에에 반복)

S2 : 푸푸푸푸푸풉 야 암턴 닥치고 빨리 들어가. 이거 낼 학교에 들고 간다.
나 : 후... 야, 내가 있잖냐... 하도 빡이 쳐서...
S2 : 그래서?
나 : 지나가는 차를 발로 깔까 하다가!!!!!!!!!!!!!!!!!!!!!!!
S2 : 야야야 워워워
나 : 돈이 없어서~~~~~~~~~~~~~~~~~~~~~~~~~~~~~~~~~~~~
나 : 차지도 못하고~~~~~~~~~~~~~~~~~~~~~~~~~~~~~~~~~~
나 : 참고, 참고, 또 참고~~~~~~~~~~~~~~~~~~~~~~~~~~~~
S2 : 크푸푸푸푸푸푸푸푸푸풒푸푸푸푸풉 (숨 넘어가는 중)

글로 쓰니까 느낌이 안 살긴 하는데...이쯤에서 녹음은 끝나 있었다. 방 안은 다들 거의 눈물을 질질 흘려 가며 쓰러지던 지경. 물론 나도 정말 미친듯이 웃었더랬다. 아니, 처음엔 그랬다. 근데 정말 웃기게도, 민망함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미친듯이 웃다가 그냥 막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솔직히 울었더랬다. 근데 다행스럽게도, 다들 너무 웃다가 눈물을 질질 흘려가며 웃고 있었던 통에 눈물 나는게 티가 안났어. 결국 그렇게 웃음 반 눈물 반으로 청취를 마무리하고는, 고기나 구워먹자며 없는 돈을 끌어모아 삼겹살을 사러 갔다(자취방이 옥탑방). 그리고 고기를 먹는 내내 내가 한점 먹어볼라치면 '넌 고기나 구워 이뇬아 -_-' 라고 갈굼을 당했더랬지. 뭐 굴하지 않고 먹긴 했지만.

이 에피소드가 최고였던건 이게 딱 그 시절의 상징과 같은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에서건간에 한없이 괴롭고 슬프고, 근데 다함께 모여서 같이 웃고 떠들다보면 그게 그렇게 웃으며 지나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던 시절. 마치 상처 위에 밴드를 붙이듯, 괴롭고 힘든 기억에 빵빵 터지는 웃긴 에피소드들을 살포시 덮어놓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던 시절. 그 시절의 상징과도 같은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지금도 술자리에서 가끔 누군가가 선창을 하곤 한다. 지나가는 차를 발로 깔까 하다가~ -o- 그럼 나머지가 일제히 따라하지. 돈이 없어서~~~~~~~ -o- -o- -o- 남들이 보면 저 저 아저씨들 저거 술 취해서 뭐하는 짓들이야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만이 공유하는 그 시절의 기억. 아마도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삶이라는게 끝없는 굴곡 아닌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을 만날 적 마다 과거의 상처가 욱씬거리는 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묵은 상처들이 아파올 쯔음이면 마치 셋트메뉴처럼 따라붙어 올라오는 괴이한 에피소드들 때문에, 그렇게 마냥 아프지만은 않아도 되는 것. 어쩌면 그게 그 시절의 바보짓들이 내게 남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마무리로는 저 에피소드의 '여파'로 인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끝내련다. 저 사건이 있고 한달인가 지났을까. 갑자기 S2 녀석이 말을 꺼낸다.

S2 : 야야, 내가 그 녹음파일을 뜨느라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놨거든.
나 : 에이 미친(...) 내가 지우라고 했냐 안했냐
S2 : 근데, 내 여동생이 그걸 들어버렸다

... 그 이후로, 나는 녀석네 동생에게, 이름을 말하면 몰라도 야 왜 그 탱탱탱... 하면 '아! 그 탱탱탱 아저씨!' 라고 알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로 마무리. 망할놈아 결혼식때 부를 생각도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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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이야기 (3)

세시까지 딱 55분 남았으니 오늘은 딱 그만큼만 글을 써 볼까 - 라고 생각을 하고 써야지만 뭐라도 쓸 수 있게 되는 하루하루다. 남들은 연말 연시 연휴다 뭐다 쉬고 있을 적에도 그냥 매일같은 하루처럼 출근했던지라 해가 바뀐 느낌이 실감도 나지 않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 어쨌든 겨울이 가기 전에 강원도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시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감흥이 살아날 것 같지 않아서 황급히 이어 써본다. 처음 쓰려고 마음 먹었을때는 그 시절의 모든 기억들을 다 끄집어내 보려고 했었는데 그건 역시 쉽지 않을 듯. 용두사미격으로 마무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잠깐 생각을 해 보면서. 


강원도에서 함께 부대꼈던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Best & Worst 로 나눠 쓰려고 하다가 J선배 얘기로 글 하나를 통째로 할애했는데 사실 이전 글에서도 얘기했듯 그 냥반의 비중이 그만치 크긴 했다. 그래서 오늘은 기억나는 순서대로 Best & Worst 였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쭉쭉 해보는걸로. 


Best 2. 친구 H


어쩌다가 다른 회사 다니고 있던 놈을 같은 팀으로 끌어들인 이후 벌써 7년째 같은 팀에서 서로 의지하기도, 아웅다웅하기도 하며 지내고 있는 친구 H. 뭐 녀석이야 말할 나위 없는 개그캐... 니 일일이 다 쓰자면 한도 끝도 없다. 딱 강원도 프로젝트에서 있었던 일만 얘기하고 넘어가는 걸로. 


나는 프로젝트 정식 멤버로 4개월동안 강원도에서 굴렀더랬고, 녀석은 중간에 한달 정도 팀에서 지원 나왔더랬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실연당하기 전에 와서 상태는 양호할 때였는데 제법 바쁠때라 뭐 거하게 놀진 못하고 다만 매일 술이나 마시고 그랬더랬다. 하지만 Best 2로 꼽을 수 있는건 단 하나의 에피소드와 몇마디의 빵빵 터지는 말들이었는데. 


프로젝트 중기, 주중엔 강원도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오던 생활을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일요일날 녀석과 나의 대학시절 같은 모임 선배가 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우리는 상가집에 갔다가 동서울 터미널 근처에서 같이 자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같이 내려가는 걸로 계획을 짰더랬다. 원래 녀석의 지원 계획은 1주였는데 그게 무려 한달로 늘어져버린 통에, 녀석은 처음 챙겨갔던 속옷을 2주째 입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상가집에 들렀다가 나오면서 터미널 근처에서 양말과 속옷을 샀었더랬다. 뭐 술도 신나게 퍼마셨더랬지. 그리고 근처 모텔에서 둘이 방을 잡고 한잔 더 마신 후 잠이 들고... 아침에 어이쿠야 소리와 함께 우당탕탕 준비해서 뛰쳐나와 버스에 오르고... 딱 버스에 오르고 10분 후에 녀석이 하는 말. 


'으... 빤쓰를 놓고 왔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사놨던 양말과 속옷을 모텔방에 내팽개쳐두고 왔던 것. 결과로 녀석은 강원도에 가서 다시 눈물을 흘리며 양말과 속옷을 샀어야 했었다는 슬픈 전설. 그리고 아마, 바지도 단벌로 3주정도까지 버텼더랬지. 


기억에 또 남는거라면, 녀석은 지원이 끝나서 철수하고 나중에 내가 실연당해서 반폐인 되어 있다가 주말에 올라갔을 때였다. 그땐 뭐 눈만 뜨면 술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던지라 터미널 도착 시간에 맞춰 녀석보고 술먹자고 나와 있으라고 불러 놨었는데... 한 일주일 면도도 안하고 밥도 제대로 안먹고 올라온 나를 보더니 녀석이 흠칫 하더니 하는 말. 야 너 그러다 죽어 - 거기까진 그냥 우려섞인 말이었으나 거기에 한마디 덧붙이는데, '야, 근데 너 팀에 복귀해서 팀장님 보러 갈 땐 꼭 그대로 그러고 가라 -_-' ㅠㅠ 그래 뭐.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그랬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철수하자마자 휴가라도 받았을지 모르는 것을 - 뭐 아무튼, 녀석의 얘기는 이정도로 마무리. 문득 생각이 난 건데 나중에 녀석 관련 에피소드의 특집편이라도 써볼까. -_-a


Best 3. 무지막지 화끈했던 개발자 Y 씨


워낙 척박한 바닥인지라 프로젝트 한번 했다 하면 본격 남자 프로젝트(...)가 되어버리기 일쑤고(나만 그런가) 특히 여자 개발자는 상대적으로 귀한 바닥인데 놀랍게도 강원도에서 처음 만난 개발자 Y씨는 바로 그 귀하다는 여자 개발자 분이었다. 뭐 화끈하다고 표현해서 오해가 있을런지 모르겠는데 첫인상이 뭐 섹시 다이너마이트라거나 뭐 그런거 아니다. 첫 인상은 말할때 사투리가 좀 섞였구나 하는 느낌 말고는 그냥 어 그래 그렇구나 싶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그런 인상이었는데. 


이... 이분, 볼수록 매력 포텐이 팍팍 터지더라. 


프로젝트 초반에 다들 모텔방 계약하고 그러고 있을 때 혼자 당당히 사무실 바로 맞은편 사북장 여관에 자리를 떡하니 잡고는 시종일관 여관 시설이 괜찮다면서 홍보하는 통에 거기에 혹한 나와 J 선배도 한달만에 여관으로 방을 옮겼더랬지. 뭐 둘다 별로 예민한 성격은 아닌지라 어 뭐 그럭저럭 괜찮은데 뭐 그리 추천할 정도는? 이라고 의문에 빠질 무렵 그녀가 여관 아주머니께 투숙객을 더 데려오면 방값 할인을 받는 모종의 거래를 (-_-;) 했다는 얘기를 듣고 오왕 님 생활력 강함요 했던 게 시작이었더랬고. 


좀 지나서 술도 몇잔 같이 먹고, 알고 보니 그녀는 시골에서 자란, 무려 7~9 남매 중에 다섯째랬나 여섯째랬나. 강인한 생활력이 이해가 가던 시점이었다. 아 근데 성격이 진짜 화끈 그 자체였다. 한번은 월요일에 주말에 뭐했냐고 물었더니 이번 주말엔 술도 안마시고 그냥 뭐 하고 그랬다는 거야. 근데 조금 더 얘기하다가 우연히 그러고보니 어제 동생이랑 창고 정리하다가 소주 한병 했는데~ 란 얘기를 하길래 아니 술 안마셨다면서요! 라고 추궁하니 오히려 나를 굉장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소주 한병이 술인가예!!!!!


우와 님 좀 짱인듯. 하긴 프로젝트 팀 회식을 하거나 해서 같이 술도 제법 먹은 적도 있었는데 오왕 엄청 잘 놀기만 하고 술버릇도 없이 겁나 깔끔하다. 아 또 그런 적도 있었지. 한번은 금요일에 버스 예매를 못해서 서울 올라오는 길에 다른 개발자 한분이랑 같이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올라오게 되었더랬다. 이래저래 일이 겹쳐서 출발시간이 늦어지다가 거의 야밤에 출발하게 되었는데... 흐미 뭐죠? 이 터프한 드리프트는? 이거 액션영화에서나 나오고 그런거 아니었나요? ㅋㅋㅋㅋ 강원도였으니 눈이 좀 많이 왔었겠나. 다행이 도로는 얼지 않았더래도 이래저래 눈들이 사방에 가득 덮여 있는 그 도로를 겁나게 밟아주시는거야. 난 뒤에서 철없이 오왕 이러고 있었고 앞에 같이 탄 개발자분은 슬슬 표정이 안좋아지고 있었는데 그 타이밍에 딱 터지는 그녀의 한마디. 


아 미안요 제가 야맹증이 좀 있어가지고 ㅎ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에 같이 타고 있던 그냥반이 순간 손잡이를 꾸왁 잡는걸 나는 봤어. 아무튼 그 터프한 운전 덕분에 서울까지 즐겁게 올라왔으니 그걸로 된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Y씨를 '지인'의 바운더리까지 포함시킬 수가 없었던, 당시 넋 나가 있던 상황과 전국을 떠돌던 생활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서 연락은 끊겼지만 정말이지 일도 잘 하셨더랬고, 그정도면 척박한 강원도에서의 Best 3에는 꼽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게지. 


Best 4 (J선배가 늘상 말하길) 반경 10Km 이내에서 최고 미인. 투다리 아주머니.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Best others. 


스페셜 땡쓰 투 같은 느낌이지만 - 당시 일이야 그렇다치고 생활은 꽤나 제멋대로였던 나와 J 선배를 포용해 주시면서 프로젝트를 잘 끌고 나가신 L부장님, 협력사였는데 죽이 맞아서 PL 급들 회식 가고 그러면 따로 같이 술마시러 가곤 했던 L대리님, 반폐인 생활에 거의 매일같이 술병이 굴러다니던 방을 별다른 얘기도 없이 잘도 치워주셨던 사북장 여관 아주머니. 실연당하고 강원도에 내려와서 몇일 내내 밥을 입에도 안대고 술만 퍼마시다 사지가 떨려 기어가다시피 들어갔는데 인생의 육개장 맛을 보여주신 김밥천국 아주머니 외 참 좋았던 분들이 많았더랬지. 근데 더이상 놀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라 급급하게 여기서 마무리. 문득 고민되네. Worst 는 다 지난 일인데 굳이 써야 되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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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패션 시대

어릴적부터 옷 입는 것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소시적엔 가정형편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고, 어린 자식 패션까지 신경쓰기에 부모님은 너무 바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일년에 십센치씩 미친듯이 자라던 중학교 이전, 그러니까 초등학교까지는 누나 옷을 물려받아 입거나 어머니가 간간히 사다주시던 옷들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었다. 어쩌면 터무니없이 철이 일찍 들었던게다. 멋진 운동화나 이쁜 옷같은 것을 사달라고 떼쓰는건 상상도 못했으니. 그저 그런걸로 밤낮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속 썩이면 안되지 - 라고 하고 덤덤하게 그 시절을 지나간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노릇. 


중고등학교때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단지 위에 썼듯 일년에 십센치씩 막 폭풍처럼 자라던 시기였기에 중2무렵부터 누나 옷보다는 아버지 옷을 입고 다녔다는 차이 정도다. 덕분에 친구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기도 했고 질풍 노도의 시기였으니 당시 유행하던 청바지니 농구화니 같은것에 은근 욕심도 났었더랬지만 여전히 집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더랬다(이렇게 쓰면 되게 착한 아들이었던것 같지만, 그런 투정 대신에 어디서 사고치고 다치고 똑딱똑딱 부러지고 하는 걸로 충분히 속을 썩였으니 그건 아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빨래만 되어 있고 몸에만 맞으면 아무거나 주워 입던 시절이다. 사실 미친 성장판 전격 개방 때문에 길어져버린 몸뚱이에 걸칠 만한 것들이 드물어서 몸에 맞는 것 찾기에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고등학교 후반쯤과 대학교땐 그나마 상황이 조금 개선되었는데, 몸에 맞는 옷 하나 건졌다 싶으면 아주 그냥 너덜너덜하게 될때까지 입고 다니던 동생을 어릴적부터 불쌍히 녀긴(-_-;;) 누님께서 본인 옷 사고 그러면서 하나씩 둘씩 옷을 사다주는 일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친구들과 부대끼다보니 같이 옷을 사러 가는 일이 일년에 한 두번 정도씩은 있었더랬고. 게다가 뭐 고3때부터 연애 전선에 뛰어들다보니... 아주 막 그지꼴로 살 수야 없는 노릇 아니냐.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패션에 대한 관심은 개미 눈물 정도였다. 십수년간 굳어진 습성이 쉽게 바뀔리 만무하고 빼빼로 체형의 몸뚱이는 패션을 추구하기엔 너무 제약이 많았다. 


이쁜 옷을 보면 뭐해. 다 짧은데. 게다가 사람 많은 백화점이며 뭣이며를 돌아다니는건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무려 찾기도 힘든 긴 옷을 찾기 위한 쇼핑이라니. 그 시절에 쇼핑을 다닐때의 나를 떠올리면, 뭐 이건 그냥 한마리 하이에나였다. 대충 훑다가 어 저거 좀 길어보인다 하면 입어보고 사고 바로 쇼핑타운 탈출(-_-;;) 그러니 뭐 자연스레 '의존적인 패션(걍 사다주면 입음)'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과거 사진 속의 나를 보면 그야말로... 갓뎀어메이징 너 연애는 어떻게 하고 살았던거냐. oTL 이 수준이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건, 우습게도 나이 서른을 먹고부터였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변할 일이 뭐가 있겠어. 사랑뿐이지. 나이 서른쯔음에 눈을 멀게 만든 열애는, 어처구니없이 빨리 끝나버렸지만 참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30년간 같은 머리스타일을 고집해온 나를 이끌고 찾아간 미용실에서 처음으로 짧은 머리에 왁스를 바른 스타일링을 하게 만들었고, 30년동안 물어뜯어서 멀쩡할 날 없던 손톱에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서 하루아침에 습관을 고쳐놨더랬다. 당시에도 정장 이외의 옷들은 꽤나 엉성 처참한 상태였을텐데 그것들을 '지적'하기보다는 '이 옷 좋아'라는 말들로 명확하게 본인의 취향을 말해줬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노릇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 그리고 가장 크게 받은것은 역시 스스로의 처참한 상태를 돌아보게 하고, 꾸미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것이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무슨 날이었는지 그날따라 '오늘은 멋있게 하고 나와야해'라는 말을 해서 정말이지 잔뜩 긴장을 하고 준비를 했더랬다. 근데 그게 참 그렇잖나. 차라리 그냥 보통 입던것처럼 정장이나 차려 입고 멀끔하게 나갔으면 마이너스라도 안되었던 것인데, 머리부터 시작해서 평소엔 5초 이상 들여다볼 일 없는 옷장을 다 헤집어가며 온갖 옷들을 꺼내 입다가... 결국 약속시간이 다 되어 뛰어나갔는데 그때 길가다 우연히 쇼윈도를 통해 본 내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 그 자체였다. 그걸 옷이라고 입고 나간건가 싶은 처참한, 난 멋부려본 적이 없는 남자 하지만 오늘은 애써 신경써봤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엉성한 언발란스에 그로테스크(-_-?;;) 한 패션의 완성. 물론 그 몰골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웃어주던 배려를 아낌없이 받았지만 적어도 그날 확실히 자각한 것이다. 야 너 상태가 좀 심각하다 라는 것을.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스스로 옷을 사는 시대가 열렸다.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에게 뭔가 쓰는데는 인색한데, 마치 지나왔던 시절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땐 가차없이 뭔가 질렀다. 하루는 정장, 셔츠, 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방에 지른 날도 있었더랬지. 물론 브랜드 같은 것은 여전히 관심이 없어서 한참 재미를 붙이게 된게 인터넷 쇼핑이었다. 이게 익숙해지니 편하더라고.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클릭질 하다 빡치는 경우는 많지만 어쨌든 길이에 맞는 옷들도 어딘가에는 널려 있고, 저렴하게 다양한 아이템을 구비할 수도 있는거였다. 이 패턴도 그때 굳어져서 지금도 내 옷의 8할은 인터넷 구매다. 


또 두드러졌던 변화는 무채색 30년 인생 탈피였지. 그게 되게 재미있는 노릇이다. 시작은 위에 얘기했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 뽑은 날이었는데 원래 정장만 사려고 갔던 거였다. 그러다 쇼윈도에 전시되어 있던 빨간 셔츠가 왠일인지 눈에 빡 꽂혀서 입어봤는데 왠걸. 점원이야 뭐 당연히 판매를 위해 겁나게 잘 어울린다고 막 호들갑을 떨어주시는데 그걸 배체하고 스스로 봐도 나쁘지 않은게다. 이전까지 나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색깔이라 고민고민 끝에 뭐에 씌인 듯 같이 들고 왔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엄청나게 좋아하게 되었더랬다. 사람들 반응도 폭발적이었지. 원색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평. 물론 지금도 난 기본적으로는 무채색이 좋다. 분명한 변화는 잘 맞고 괜찮은 것 같은데 원색이란 이유로 피하는 일은 없어진거지. 


아직도 그렇게 그날 뽑은 풀셋을 입고 머리까지 미용실 머리 해서 힘을 뽝 주고 사람 많은 강남대로에서 그 사람을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 사람은 보자마자 와 - 를 연발했고, 그게 그렇게 머쓱하면서도 기쁠 수가 없었다. 길을 가느 와중에도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시선이 막 엄청 쏟아지던 수준이었지. 과장 아니고 정말로. 근데 그게 싫지가 않았어. 그날은. 평소에도 키 크다고 흘끔흘끔을 많이 시전당하는 편이라 그 시선들이 싫어서 사람들 많은 데를 피하게 되기까지 한건데 그날을 기점으로 달라진거다. 시선들에 덤덤, 조금 보태면 당당해진 거다. 어쩌면 패션이야 어찌되었건 그만큼 놀라운 기적도 없는거지. 허허. 


결국 그 열애 이후로 인생에 새로운 재미가 생긴거다. 옷을 사려고 쇼핑하는 재미, 그리고 마음에 드는 녀석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 거기에 두근거리며 옷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즐거움, 도착한 옷이 기대 이상으로 꼭 맞고 마음에 쏙 들때의 빅 기쁨. 신경 좀 쓰고 나간 날에 사람들이 오오 - 하면 느끼는 으쓱함.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이것저것 챙겨입고 나왔는데 쇼윈도에 비춰진 모습이 생각보다 쓸만할때 느끼는 만족감. 하하.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서른 다섯까진 꾸미고 다녀야해' 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그 사람의 말처럼, 서른 다섯까지는 이것저것 사모으며 30년 넘게 이어진 의존 패션 성향에서 완벽하게 탈피했더랬다. 


그리고 또, 그렇게 예기치않게 변화의 날은 찾아왔지.


물론 언제부턴가 연애때나 결혼때나 별 차이 없이 너무 늘어지진 말아야 한다 - 라고 생각을 하긴 해도 이게 결혼을 하니 확실히 달라지는 건 있는거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막 불꽃 클릭질 해 가며 옷을 사고, 막 힘줘서 꾸미고 그런 것들은 슬슬 귀찮아지는거지. 게다가 아무리 뭐 사고 이러는 것에 대해 얘기만 하면 별 얘기 없이 오케이 하는 아내님이라 하더라도, 용돈 받아 쓰는 유부남으로써 막 그렇게 얘전처럼 속시원히 지르기도 애매하고. 그러다보니 서른 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슬슬 옷 쇼핑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그저 계절에 맞게 구비해야 할 옷들을 충실하게 구비해두는 시즌 준비 정도가 되는거지. 한때는 머리도 짤은 스타일을 유지하며 아침에 어떻게든 조물조물 만지고 나갔었는데 이젠 그도 귀찮아서 그냥 적당한 길이를 유지하는 스타일로 돌아가고.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연애 시절부터 내가 이것저것 알아서 챙겨입고 다니는 것을 봐왔던 아내님이었기에 연애할적엔, 그리고 결혼 후에도 1년 정도는 가끔 기념일 때 선물을 옷을 고르는 경우는 있어도 평소 입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여가 없었더랬다. 근데 해가 넘어가며 내가 직접 옷을 사는 경우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본인도 본인 취향에 따라 입혀보고 싶은 옷들이 있는거라. 어느 날 부터인가 아무 이벤트가 없는 날임에도 '이거 입어봐' 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또 그러다보니... 편해! 일단 사이즈를 완벽히 간파하고 계시어 사오는 녀석들이 몸에 잘 맞을 뿐더러 내 취향에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 거기에 더해 일단 길이만 잘 맞으면 정말 정말 내 취향이 극단적으로 아니고서야 어떻게든 잘 입고 다니는 스스로의 패턴에도 적합하고. 그렇게 입을 것들이 늘어나니 굳이 내가 분노의 클릭질을 하며 쇼핑을 하는 횟수는 더 줄어들고. 이제 지금은 5:5정도까지 다시 조정된 것 같다. 뭔가 생각해보면, 본격 유부남의 아내님 의존 패션시대가 열린 것 같기도 하고. 


망년회의 여파로 아침에 간신히 눈을 떠서,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왔는데 문득 보니 전신에 걸친 모든것들이 Gift by 아내님 인것을 느끼고 왠지 모를 감회에 써본 글이다. 그렇게 대 패션 시대는 저물었으되 예전처럼 그지꼴로 살지는 않습니다 - 라는 기묘한 결론으로 매듭지어본다. 그래, 뭐, 서른 다섯까진 열심히 꾸몄잖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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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이야기 (2)

어쩐지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돌아온 휴가였다. 덕분에 쌓인 일거리가 마음을 스물스물 짓눌러 오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어서 오랫만에 블로그를 열어보니 이어 써야지 하다가 그대로 남아있는 이야기만 떡 하니. 언제나 그랬듯이 무언가에 매듭을 짓지 않고서는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는 불편한 성격의 인간인지라 어쨌든 이어가보자 하고 자판을 두드려본다. 


앞의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유래없이 멘탈이 먼지가 되어 있던 시절의 강원도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건 첫번째가 풍경이요, 두번째가 사람이다. 사실은 둘 사이에 선후를 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단지 그것은 내 운이 좋았다는 것을, 적어도 그날들까지는 내 운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절묘하게 두가지가 마치 두 다리처럼 나를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 하나의 다리,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그 시기에 좋은 사람들만 만났던 것은 또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Worst 라고 꼽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 그 시기의 나에게는 어쩐지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 경험들이 이후의 내 일이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니, 어쩌면 그 또한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항상 얘기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는것만 인복이 아니다, 내게 어떤 경험들이 필요할때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것이 복이다. 


어쨌든 우선 Best에 들었던 사람들 얘기를 먼저 해보자. 그곳에서의 사람들 얘기를 하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역시, 강원도에서 나의 생활중 웃음의 8할을 담당했던 J 선배다. 지금은 소식도 끊겨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냥반이 아니었으면 어찌 그 시기를 보냈을까 싶은. 진심으로 아직까지 감사해하고 있는 은인과도 같은, 그리고 내 평생 만난 사람중에 단연 탑에 꼽히는 괴인. J 선배. 


*

강원도에 가기 전에도 J선배를 만나고, 술을 마셨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그는 재미있는, 유쾌한 선배중의 한명일 뿐이었다. 경력으로 이직해서 처음 대기업의 프로세스라는 것을 접하고, 뭔가 어리둥절 멍때릭 있던 내게 처음 술을 사준 선배이기도 하고 말이다. 생김새는 모 만화에 등장하는 무용해 대리(...자타 공인이다)와 흡사했으며 특별히 대단히 수다스럽지 않았음에도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에 위트가 듬뿍 담겨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이야기들이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올릴때면 자동 빵 터짐을 재생하는 것을 볼때 실로 무시무시하리만치 재미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찌 부정할 방법이 없다. 


이를테면 음담패설 같은 것을 놓고 얘기할때 말이다. 


그게 정말 뭐 알 수 없는 기준이긴 하지만 내겐 약간 그런 기준이 있다. 똑같은 욕을 하고 똑같이 음담패설을 해도 뭔가 어떤 사람이 하면 굉장히 눈쌀 찌푸러지고 적당히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싶은 기분이 드는데 어떤 사람이 하면 그게 굉장히 천박하게 흐르지는 않으면서 미묘하게 '찰지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딘가의 식당에서 갑자기 주인이 쌍욕을 하면 멱살잡이를 하겠지만 욕쟁이 할머니 맛집에서는 괜히 빵빵 터지며 욕을 반찬삼아 배부르게 배를 채우고 나오는 그런 감정인게다. 단언컨데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중에 가장 욕을 찰지게 하는 사람이었고, 엄청나게 씨니컬한 음담패설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건 그가 했던 말들을 내가 옮겨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세상에서 그 사람의 그 표정과 그 말투로 해야 제대로 찰진 맛이 나오는 그런 말들인 것. 


워낙 척박한 프로젝트이기도 했었고, 당연히 야근과 스트레스는 숙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술을 마셨다. 어림잡아 생각해보면, 4개월, 얼추 120일. 주말을 제외하고 100여일이라고 본다면 그중 90일 정도는 함께 술을 마셨다. 또 그중 80여일은 둘만 술을 마셨다. 도착한 첫날부터 시작해서 쭈욱 말이다. 패턴도 매번 같았다. 일과시간에 일좀 하다 저녁먹으러 나가서 밥대신 맥주와 술. 먹고 들어와서 야근. 야근 후 밤중에 다시 술. 워낙 뭐 대단한 술집도 없던 동네였던지라 마시던 집은 항상 투다리. J선배의 말을 빌면 '반경 10키로 이내의 최고 미인'인 아주머니께서 운영하던 투다리에서 그렇게나 술을 마셨다. 아직도 그 투다리에서 팽이버섯말이 안주 천개를 먹으면 용이 될 수 있을거라던 그냥반의 말이 선하다. 그렇게 무수한 술자리들 속에서 알게 된 그는 단순히 술 좋아하고 재미있기만 한 그런 선배는 아니었다. 그는 나름 놀라운 스펙과 뚜렷한 주관.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의 재능과 놀랍도록 회전이 빠른 머리, 거기에 부러우리만치 너무도 뚜렷한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막힌 구석이 없이 시원시원하고 분방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내가 그렇게나 그 사람을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존중'이었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던 내 습성을 처음에는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동참해서 둘이 함께 바다를 보러 가기도 하였더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별 것 없었던 사랑 얘기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프로젝트 오픈 시점과 거의 맞물려 실연당하는 통에 멘탈이 먼지가 되어버려서 사실은 일까지도 거의 손에서 놓는 지경이었는데 그 철딱서니 없는 후배의 만행을 군소리 하나 없이 대충 커버해 주었다. 멘탈 붕괴가 정점을 찍었던 시점, 술에 쩔어 거의 반폐인이 되어 있을 적에도 딱히 뭐 잔소리나 충고나 그런 것도 없었더랬다. 그저 옆에서 같이 술을 마셔주고, 씨니컬한 개그를 한마디씩 집어던져서 웃을 일 없었던 날들에 뜬금없이 빵빵 터지게 해줬더랬다. 프로젝트 철수하고 나서 장렬한 마지막 술자리 한번으로 정리할때까지 참 그렇게나 의지가 될 수 없었달까. 


그냥반이 회사 일을 정리하고 자기가 원했던 일을 하고자 떠날 적에도 나는 여전히 일련의 방황을 지속중이었고, 그 와중에 새로운 일들에 적응하고자 분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마지막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허나 그렇게, 회사 일을 정리하고 쿨하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던 것도 참으로 그 냥반답다 하는 생각에 정말로 마음속으로는 응원하였더랬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 형님,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언젠가 나중에 우연히라도 한번 만나게 되면 우리 강원도는 아니어도 어디 투다리나 한번 가요. 팽이버섯말이 천개까진 못먹겠지만, 그래도 또 그때 그 날들을 얘기하며 술잔을 기울이면 하룻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것 아니겠습니까. 


*


세상에, 워낙 지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냥반인지라 이만치를 이미 다 써버렸다. 이런게 분량 조절 실패라는 것이구나. 어쨌든 추억에 빠져들다 보니 또 시간이 후딱 지나서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밀린 일거리들이 더이상은 못 기다리겠다 아우성을 치고 있어서 오늘은 이쯤 마무리해본다. 

그래도 뭐랄까. 이렇게 하나 하나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보니, 기분이 묘하네. 하하. 뭔가 아련히 그립기도 하고. 그렇게 찐득했던 슬픔들까지도, 그렇게 격렬하고 뜨거웠던, 그 모든 감정들의 격랑 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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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이야기 (1)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프로젝트 출장 때문에 사북에서 4개월 동안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 말이다. 이후로 7년동안이나 그 4개월의 기억은, 술마시다 꿀적한 기억들을 떠올릴적에만 상징처럼 와락 일어나곤 했던, 우연찮은 회상씬까지도 그다지 달갑지는 않아 금새 머리를 휘휘 휘둘러 털어내 버리곤 했던 기억이었다. 처음의 2개월은 원치 않았던 롱디와 팡팡 터지는 일거리들 덕분에 힘들었더랬고, 나중의 2개월은 역시나 원치 않았던 실연으로 인해 멘탈이 먼지가 되어서 괴로워했던 때였으니 굳이 끄집어낼 이유가 없었던 기억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근데 작년 쯔음 부터였나, 한번은 그곳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서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더랬다. 어쩌면 그 괴로웠던 기억들조차 이젠 그저 지난 일이라 하며 옅은 미소로 마주대할 수 있을만치의 시간이 흘러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위에 썼던 이유로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기도 했었지만, 외려 그 괴롭고 힘들었던 와중에도 정말 깨알같이 즐겁기도, 신기하기도, 다시는 없겠다 싶은 경험들도 존재했던 기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왠지 모르게 자꾸만 글이 쓰고 싶어지고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이제 와서 한번 그 이야기들을 남겨볼까 한다. 뭐 별다른 이야기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저 왠 아저씨가 집 떠나 눈이 펑펑 쏟아지던 강원도에서 인생에 있어서의 희노애락의 정점을 찍던 시절에 대한 회고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자 그럼 뭣부터 얘기해볼까.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자. 때는 바야흐로 2006년 11월. 입사 후 정식으로 투입된 프로젝트로는 첫 프로젝트. 한참 열애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던지라 정말 마뜩치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고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는 강원도행 버스에 탑승. 자, 그리고 어땠더랬지? 뭐가 좋았더랬지? 회상의 흐름을 방해하는 꿀꿀한 기억들의 틈바구니에서 자 떠올려보자구. 뭐가 그렇게 좋았더랬지? 뭐가 신기했더랬지? 뭐가 그렇게, 아마도 살아가며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그런 유니크한 기억들이었지?


그래, 첫번째는 역시 '풍경' 이었다. 4개월동안 머물렀던 사북읍의. 단지 작은 산골 마을의 풍경 뭐 이런게 아니라 겨울. 눈. 밤. 고요.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풍경들.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끔씩 슬픔까지도 잊혀지게 만들던 풍경들 말이다. 


*


제일 좋아하는 계절을 누가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겨울을 꼽는 사람이고, 왜 겨울이 좋아? 라고 묻는다면 역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눈이 오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실 계절과 날씨는 무엇보다 너무도 좋았던거다. 왜, 사람마다 단어를 딱 말할때 연상되는 무언가들이 다 다르지 않은가. 내가 '눈'을 떠올릴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 시절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그 시절 이후로 눈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조건 반사적으로 그렇게나 눈이 많이 내리던 그 시절 그 어떤 날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다. 정말로 천지사방이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있던. 그렇게 세상을 하얗게 물들여놓고도 멈출 기색도 없이 쏟아져 내리더 눈송이들. 가만히 머리속에 띄워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 그 풍경들. 물론 매년 폭설로 인한 피해도 있고, 강원도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눈때문에 정말 이가 갈릴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만 어찌되었거나 서울 촌놈으로써는 그렇게나 쏟아지던 함박눈들에 똥강아지마냥 신나서 껑충껑충 뛰어다닐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려, 출장 첫날부터 그랬더랬다. 


새로 연애, 그것도 열애를 시작한지 100일도 안된 시점에서 뜬금없이 지방 출장을 가게 된 참이었으니 기분이 좋았을리가 없다. 꿀꿀한 기분으로 짐을 챙겨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는데, 마치 기분만치나 흐렸던 하늘에서 한두송이씩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많이 내리는 눈은 아니었던지라 잠깐 창밖을 바라보다 눈을 붙였고, 세시간 반정도 지났을까 이내 도착을 알리는 기사님의 목소리에 눈을 떠서 짐을 챙겨 내렸더랬다.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려 가면서 전화로 알려준대로 택시를 타고는 프로젝트 사무실에 도착. 그리고 D 선배를 만났다. 꿀꿀했던 강원도 생활 속에서 빅 재미의 8할 정도를 차지했던 D 선배를. 앞으로 4개월간 일어나게 될 버라이어티한 일들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채 D 선배의 환대를 받고, 프로젝트 PM 님께 인사를 드리고, 짐을 풀고, 이것저것 잡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환영을 겸한 첫날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더랬다. 뭐 워낙 술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D 선배와 함께였으니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이어진건 당연지사. 아마 3차까지 갔었더랬나. 시간은 얼추 새벽 두시쯤 된 것 같은데 기어코 한잔 더 하자는 말에 마지막 집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한시간인가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정말로 얼큰이 술이 올라 밖으로 나왔는데. 


정말로 딱 한시간만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눈이 쌓여 있었더랬지. 


진짜 그때의 기분은 무슨 마법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앞으로 벌어지게 될 꿀꿀한 일들에 대해서 아직 전혀 예측도 못하고 있었지, 첫 날이고 좋아하는 선배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기분도 업된데다 내가 또 사실 그렇게 새로운 환경같은걸 싫어하는 인간이 아니에요. 게다가 술까지 마실 만큼 마셨는데 한밤중의 시골 마을에 술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온통 어둠뿐이었는데 딱 한시간 마시다 나오니 온통 순백으로 물들어 있어. 캬 이거 뭐 신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거다. 야 이거 뭐여. 눈에 막 발이 퍽퍽 들어가네? 겅정겅정 어설프게 뛰어다니다가 몸개그도 저질렀다. 뒤로 벌렁 자빠져서 뒤통수를 제대로 박았는데... 안아프네? 이게 술의 탓이었는지 워낙 삽시간에 푹신하게 쌓였던 눈 덕분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러고도 좋다고 한참을 그 아무도 없는 거리를 쏘다니다 숙소로 들어갔더랬다. 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근사한 겨울밤이었는데. 


어쨌거나, 이후에도 그렇게나 쏟아졌던 많은 눈들, 그리고 근사했던 많은 겨울밤들은 그 괴로웠던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더랬다. 주말에 서울에 올라가서 장렬하게 채이고, 거의 이틀을 단 한숨도 자지 못한 채 기차를 타고 내려온 날도 마찬가지였다. 청량리 역에서 막차를 탔었더랬나, 새벽 두어시쯤에 도착한 사북역의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늘상 버스를 타서 몰랐었는데 기차를 타고 내리니 그 작은 마을을 주욱 가로질러 걸어가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더랬지. 정말로 끔찍하게도 비참한 기분이었음에도 무릎까지 푹푹 파묻히는 눈의 감촉들이, 그리고 그 새벽에도 온통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퍼붓고 있던 함박눈들이 굉장히 극적인 풍경을 그려냈고, 그게 그렇게나 끔찍한 기분 속에서도 절반쯤은 허탈하게 웃음이 배어나오게 만들던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한번 눈을 감고 그려보시라. 사랑을 잃고 비참하게 도망친 패잔병, 밤기차에 몸을 싣고 도착한 작은 시골역. 정말로 눈앞을 가릴만치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 잔뜩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불빛 하나 없이 고요한, 그런데 천지사방이 온통 하얗게 눈으로 물들어 있는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는 반쯤 넋이 나가 보이는 듯한 남자. 뭐라 해도 뭔가 짜한 그림 아닌가. 아닌...가?


*


앞서 말한 괴로웠던 기억들 덕분에, 이후로 그곳, 사북을 찾은 적이 없다. 아, 다른 일 때문에 여름에 한번 갔었던 적은 있었더랬는데 그건 패스하고. 아마 그곳도 많이 바뀌었겠지. 내가 갔던 그 해가 K랜드 스키장이 오픈하던 해였으니 아마 지금쯤은 그 영향으로라도 많이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사실 별로 더 가고 싶지 않은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묵었던 숙소의 위치나, 프로젝트를 했던 사무실의 위치도 절묘했더랬다. 읍내에서 살짝 떨어진, 터미널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사실 낮에도 오가는 차는 있어도 사람 구경은 좀처럼 할 일이 없었던(프로젝트 사람들 빼고). 돌이켜 보면 그 시절만큼 원하는 만치 얼마든지 절대고요, 절대고독을 접할 수 있었던 시절도 없었다. 


특히나 실연 후의 2개월은 더 그랬더랬지. 반 폐인 상태로 살면서 거의 매일 술독에 빠져 있었더랬는데, 거의 매일같이 함께 술을 마셔주던 D 선배가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사실 혼자서 많이도 헤매고 다녔었더랬다. 특히나 눈이 내리던 날은 어김없이. 어차피 술을 마셔도 잠도 잘 오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몇 시가 되었건 상관없이 숙소를 나와서, 입술을 꾹 다물고 내리는 눈을 그대로 맞아가며 천천히 걸었더랬다. 때로는 이리로, 때로는 저리로. 때로는 메마른 개울 위로 쌓이는 눈송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때로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정처없이 걷기도 했었다. 누가 봤으면 어떤 미친놈 취급을 받았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래도 그것들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정신줄 잡고 있기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얘기 운 띄우고 풍경 얘기 하나 했는데 이만치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만치 좋았던 것이리라 하면 될 것 같다. 만약 저런 비슷한 겨울밤의 풍경을 느껴 보지 못한 분이시라면 한번쯤은 꼭 권해주고 싶을 만치 말이다. 세상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너무나 하얗고 너무나 검고 너무나 고요한, 이빨이 딱딱 부딪쳐올 만치, 입김까지 하얗게 얼어서 눈발에 섞이는 착각마저 들 마치 춥고 외롭지만, 그 모든것들이 너무다 멋지게 어우러져서 극적으로 행복해지는 괴이한 경험들을 느껴 보시라고 말이다. 아 물론 굳이 실연까지 당해가며 겪을 필요는 없다. 굳이 그렇게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우울함과 슬픔들이 아니어도 충분히 누구나 사랑할 수 있을 법한 풍경이니 말이다. 일단 풍경 이야기는 이정도로 마무리. 근데 정말 그것도 웃기는 노릇이지 뭐야.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풍경들을 대하던 날들에, 그 흔한 사진 한장을 안찍어뒀어. 어쩌면 그래서 충분히 더 기억 속에서만 미화되고 미화되어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사람 기억이란게 그렇게 간사하잖나. 어쨌든 다음에 또 이어서 써야지. 다음번엔 뭘 쓴다. 아 사람. 당연히 사람 얘기를 해야지. 사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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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공로를 탐하지 말라

그러니까 스스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뭐 유난한 도덕심으로 무장된 인간은 아니다. 그냥 저냥 사회의 보편 타당한 도덕적 기준에 그럭 저럭 맞춰가며 살아가는 정도지. 조금 더 나가서는 대단한 도덕군자처럼 보이는 - 사람들을 조금 경계하는 편이기도 하다. 아마도 살아오며 그렇게 자신의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타인에게 강제하는 이들이 정작 스스로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견고했던 도덕적 잣대를 무슨 흐물흐물 물렁뼈같은 것으로 삽시간에 전환하여 적용하는 것을 제법 많이 봤던 탓일수도 있을 게다. 그리고 또 왜 그런 부분들도 있지. 어떤 부분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허무맹랑할 정도로 일반적인 도덕적 관념에서 이만광년쯤은 멀어져 있기도 하는. 어쩌면 어떤 사회의 보편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도덕적 기준이야말로 어떤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로 활용되기에는 가장 어려운 것이 아닌가 - 라는 생각도 가끔 하곤 한다. 뭐 도덕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은건 아니니까 이쯤 해 두고. 중요한건 내가 그렇게 성인군자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걸 잘 알고 있다는 것. 


근데 왜 사람이란게 참 재미있어서, 그런게 있지 않나. 예를 들어 굉장히 씻기 싫어하는 사람이 손씻는 일 만큼은 거의 결벽적으로 매달린거나 한다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지만 굉장히 기기괴괴한 어떤 강박에 가까운 결벽들. 외려 그런 부분 하나쯤 없는 사람을 찾는게 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엔 몇 안되는 그 결벽성을 띄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타인의 공로를, 공적을 내것으로 하는 것 만큼은 스스로 도저히 견디질 못한다는것. 남이 이루어놓은 어떤 일에 숟가락을 얻는 것도 무척이나 꺼려 하고, 어쩌다보니 숟가락을 얹게 되었으면 반드시 '전 숟가락만 얹은 사람입니다'라고 밝혀야만 직성이 풀린다는것. 이게 사실 사회생활 하면서는 가끔 스스로 '아 그냥 닥치고 있으면 편할텐데...' 란 생각이 시시때때로 일어남에도 도무지 어찌해서 구축된 성격인지는 몰라도 그런 상황이 오면 짐짓 모른척 하고 에헴 하고 뒷짐지고 있는 것조차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내가 한 일, 내가 이뤄낸 것'과 '남이 한 일, 남이 이룬 공적'에 대한 결벽적 구분, 그리고 '내가 잘하는 것과 남이 잘하는 것'에 대한 어마무지하게 냉정한 평가로 인해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좋았을 - 뻔 했던 상황에도 그러지 못하고 넘어갔던 기억들이 참 많이도 있다. 지금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연관 에피소드 중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스토리는 딱 두개정도다. 어차피 오랫만에 떠오른 기억이니 한번 끄집어내 볼까나. 첫번째로 가장 선명한 결벽적 성향을 드러낸 건 고1 때였다. 체육대회가 있었던걸로 기억하고, 종목 중 제일 핫했던 것이 당시의 농구 열풍과 더불어 반대항으로 진행되었던 농구 경기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농구공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않았던 시절이라 실력은 뭐 엉망진청이었으나 순전히 '길다'는 이유만으로 반 대표(후보선수)로 뽑혔더랬지. 당시에 우리반은 워낙 농구를 잘하는 녀석들이 많아서 굳이 후보까지 차례가 돌아갈까 싶을만치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근데 대회 첫경기에서 우리반 동시에 우승후보였던 다른 반과 붙게 되어 무지하게 고전을 하게 된거다. 종료 5분전 동점인 상황에서 선생님은 혈전에 지쳐 헥헥거리던 주전 한명을 빼고, 있는건 키밖에 없었던 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뭐 어떻게 한건지 기억도 안날만치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우연찮게 결정적인 공격 리바운드 3개를 연속으로 잡아냈고, 결국 결승골 어시스트를 하며 힘겹게 이겼더랬지. 후보였던 나는 급작스러운 경기 종료 후 급작스런 주가 상승. 역시 농구는 키가 있어야해 - 뭐 이런 말들로 떠들썩하게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 후 경기를 위해 다음날 반 자체적으로 가졌던 연습경기에선 대표팀 주전으로 뛰게 되었으나. 


여... 역시 히어로 타입은 아니었던 게지;


연습경기 중 리바운드를 잡고 내려오다가 다른 친구 발을 밟고 발목이 꽈직. 점심시간 지나니 발목이 통나무가 되어 있길래 병원에 갔더니 소견은 인대파열. 한달여간 반깁스를 하고 다니는 중 대회는 끝. 그리고 내 그 결벽적 성향은 첫판에서 어려운 상대를 이기고 이후 별다른 위기 없이 우승을 차지한 우리 반 농구 대표팀이 기념 촬영을 할때 드러났다. 반깁스를 하고 쩔룩거리며 가서 사진 촬영하는걸 보고 있는데, 애들이 막 와서 너도 뛰지 않았냐고, 같이 찍자고 그랬던 게다. 그리고 그야말로 개 단호박으로(...) 거절했지. 출전시간 5분에 공격 리바운드 3개 정도로 같은 팀에서 뛰고 우승에 기여했다고 티를 낸다는게 그렇게나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던거다. 아니 왜? 시상대에 같이 오른것도 아니고 그저 기념촬영일 뿐인데? ㅠㅠ 지금이라도 그랬을까? 라고 반문해보면 그래, 지금이라도 그랬을 것 같다(...) 어쨌든 이게 참 많이 아쉽기도 했었더랬는지, 꽤나 기억에 오래 남는 첫번째 사건이었고. 


두번째는 대학교 노래패 활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뭐 노래패였으니 해마다 한번 있는 발표회에서 부르게 되는 대부분의 곡들은 합창이었지만, 꼭 한두곡 정도는 솔로가 있었더랬다. 남자 여자 한명씩 정도, 혹은 선곡에 따라 남자/여자 중 한명 정도. 그리고 사실 또 그게 뽀대가 나잖아(...) 그래서 누구나 노리곤 했었더랬지. 근데 이게 역시 좀 돋보이는 자리다 보니 동일한 실력이면 윗학번 우선 - 이 암묵적 동의처럼 행해지고 있었고, 그래서 군대 가기 전 1,2학년때는 매번 후보-까진 올라갔는데 정작 하진 못했더랬지. 또 워낙 형들이 노래를 잘 하시기도 하셨고. 


그리고 첫번째 기회가 온건 제대하고 3학년때였다. 선배들은 다수가 졸업, 동기들은 대부분이 악단. 선곡은 당시 무지 좋아했던 천지인의 '청계천 8가' 여러모로 좋은 기회였지만, 경쟁이 한명 있었는데 별명은 버펄로 (-_-;)란 무식한 별명이지만 생긴것과 목소리는 소년 그대로인 후배 L모군이었다. 그리고 선배들 앞에서 오디션을 봤었더랬지. 선배들의 반응은 뭐 둘다 나쁘지 않네 알아서 결정해라 - 였는데... 크흨 ㅠㅠ 놈이 잘했다. 잘하기도 잘했고, 솔직히 들어 보니 청계천 8가는, 놈의 목소리로 부르는 편이 훨씬 좋았어. 깔끔하게 니가 가라 하와이... 하고 말았더랬지. 그리고 최종 결정타는 4학년때였다. 1학년때부터 어쨌든 3번이나 솔로 후보에서 떨어졌지, 졸업 학번이지, 여론은 하세요 하세요 안말릴테니 하세요 였고, 선곡도 내가 자신있었던 노래였더랬다. 거기다 졸업반 안배까지 받아서 악단과 맞춰보는 건 딱 4번 정도만 해보자고 했어. 하긴 워낙 많이 부른 노래라 눈감고도 부를 자신은 있었는데. 근데, 그게


집이 망했어?!?!?!?!?!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장난의 운명인지 급작스러운 사고로 가세가 확 기울었더랬다. 원래 2학기쯤 휴학하고 1년은 뭐 좀 다른걸 해볼까 하던 계획은 완전히 무산. 급작스러운 인턴 참여, 집안 사고 수습에 정신없음 + 멘붕에 술술술 콤보가 터진거다. 그것도 이제 한참 준비해야 하는 기간에 딱 터져서, 얼추 의식 되찾고 수습이 되어간다 싶었던 시점이 어느새 발표회 1주 앞이었지. 근데 후배들이 얘기하는 거다. '형 이거 그렇게 지겹게나 불렀었는데... 그냥 리허설 전에 한번 맞춰보고, 리허설때 한번만 더 맞춰보고 가요. 지금 다른 사람 하기도 그렇고...' 고마웠더랬지. 사실 정말 정말 하고 싶었더랬어. 그냥 거기서 야 미안하다, 내가 일주일동안 혼자서라도 죽도록 연습할께... 이러고 슬쩍 넘어갔으면, 아마도 내 대학생활의 1/3쯤은 차지했던 노래패 활동은 마지막 화룡점정과도 같은 추억의 정점을 남긴채 깔끔하게 마무리 되었던 거였는데...


차마 못하겠더라. 게다가 더 크게 나를 압박했던 건, 내가 회장을 할때도 그랬더랬어. 실수하고 못하고 그런건 넘어가도, 연습에 늦고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고 이런건 어마무지 혼냈더랬지. 근데 왕고랍시고, 졸업한답시고,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하고 양해를 구해서 다른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만 할 기회를 내가 가진다는게 도저히 용납이 안되었더랬어. 하 참, 지금 생각해보니 또 막 잘한 듯 바보같은 듯 만감이 교차하네. 대신에 연습도 못 도와주고 그래서 아무도 할 사람 없다던 사회는 봤었더랬지. 그리고 무대 뒤편에서 멋지게 노래를 부르던 후배녀석을 보고 씁쓸하게 웃고 있었더랬고 말이다. 근데 뭐 어째. 그게 안되는걸. 나이를 먹고서 아직도 이런데 그때는 아마 그 똥고집이 더 심했더랬지. 별 수 있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엔 미련 갖고 그러는게 아니지. 낄낄. 아무튼 이 두개의 이야기는, 사실 조금은 그냥 그냥 좋은게 좋은거지 - 하고 넘어가는게 더 좋았을 수도 있음직한, 뭐 금전적인 이득이 걸리고 내가 그걸 취하면 누군가가 대단한 손해를 보고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필요 이상으로 완고했던 것이라 생각이 들기도 하는 에피소드다. 


사실 이게, 지금도 별 변함이 없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이를 먹고서 좀 적당히 둥글둥글해진 면도 있어요. 과거 같았으면 펄쩍 뛰며 무슨 터무니없는! 을 외칠 것들도 에효 뭐 사람이 다 그런게지, 뭐 실수 한번 할 수도 있는게지 이렇게 넘어가는 것들도 제법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근데 이 부분만큼은 요지부동. 어디 프로젝트 하나 끝내고 나서 막 고생했다고 공치사 하고 그러는 자리에서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썩 기여도가 크지 않다 하면 딱 얘기해요. 누가 잘해서 묻어가서 편했다고. 이건 겸손과는 다른거다. 가끔 내가 판단하기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같은걸 혼자 해결하고 나면 그거 얼마나 막 자랑하며 신나하는데. 아 역시 천잰가봐 막 이러면서(...) 심지어 평가시즌에도 그런다. 작년에도 딱, 미안한데 A가 한장이고 나머진 B다, C랑 너랑 둘중에 한장인데 네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냐? 라고 물어보길래 딱 5초도 고민 안하고 바로 대답했다. '올해는 왔다갔다 헛힘만 많이 쓰고 별로 한게 없어요. B면 된거죠' 라고. 수차례 강조하지만 잘난척이 아니다. 그냥 스스로에겐 엄청나게 자연스러운 프로세스인거다. A와 B, C, 그리고 나 - 에 대해 객관화시켜 기여도를 판단하고 잘한건 잘했다, 못한건 못했다 깔끔히 인정. 그게 스스로 가장 속 편한 일이라는걸 안다. 가끔 내가 한게 아닌 일을 누가 내가 한거라 생각하고 있을때면 좌불안석. 다른 사람을 건너서라도 반드시 내가 한게 아니라고 정정해줘야 속이 편한. 


장황하게 뭔 자랑질인것 마냥 써놨지만, 사실은 이게 그래서 더 곤욕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그리고 그 햇수가 늘어나다보니 점점 더 못볼 꼴들이 자주 보이는게다. 후배의 아이디어를 자기 아이디어인냥 포장해서 팔아먹는, 드라마에서 시시때때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악당 상사들이 드라마에서만 나오는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지도 오래 되었지. 뭐 하나 하기로 했을 때 아무리 많이 쳐줘도 거기 기여한 포인트가 3%를 넘기 힘들어보이는 냥반이 막 말로는 자기가 한 120%는 다 한것처럼 떠벌이는걸 보는 것도 어디 한두번이랴. 내 공은 내 공이요 네 공도 내 공이다 이런 사람들이 참말 흔한거지. 이쯤되면 그냥 분위기에 편승해서 슬쩍 숟가락 하나 얹고 이러는건 애교에 가깝다. 숟가락 한개 더 놓고 라면 한 젓가락 덜어주는 건 뭐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이건 뭐 아이스크림 먹는데 한입만 해놓고는 막대기만 빼고 모조리 한입에 쳐넣는 얄미운 친구놈 보는 것 같은 경우가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 말이다. 내가 직접 겪는 것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보고 듣는 일들이 허구헌날 이렇고 저런 일들이니 참 이게 다 뭔 난리냐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아저씨에서 그런 대사가 나왔던가. '아이 씨 깜빡이좀 켜고 들어와' 라고. 


너도 나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고, 뭐 밥그릇도 제한적이니 숟가락 하나쯤 얹는거야 좋다 이거다. 근데 좀, 최소한의 염치를 가지고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오면 안될까. 거 미안한데 한숟갈만 먹자 - 이런거라도 어떻게 안되는 걸까. 비겁함 만큼 쉽게 습관화 되는 것도 없다. 남의 것을 멋대로 가져다 짜집기 한 후에 인용이라며 박박 우기는 꼴은 좀 안보고 살 수 없을까. 나이 지긋이 먹고 누군가의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만이라도 좀 그런것들을 부끄러워 할 수는 없을까. 정히 남의 밥그릇을 멋대로 빌어 무얼 하려거든, 내가 이 밥그릇 가지고 한상 다시 크게 차려 우리 나눠 먹자꾸나 하고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수는 없는걸까. 남의 공을 가지고 생색을 제가 내려거든 생색 내는 와중에 원래 공 있던 사람 한번 추어 올려 주는 추임새라도 한번 넣어주면 안될까 그말이다. 어쩌면 스스로 원인모를 강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해보는 그저 푸념일 지도 모르겠지만. 네 이웃의 공로를 탐하지 말라 - 라고 말하고 싶은 것. 어쩌면 페어 플레이를 바라는 누구나가 외치고 싶은, 그런게 아니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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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인생

살이 차오른다 - 가자... 가 아니고, 아마도 최근 하고 있는 고민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민이다. 사실 고민을 하면서도 허 참 내가 이런 걸로 고민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라는 어이없음이 먼저 떠오르는 거다. 살이 찌고 있다. 한참을 어어어? 하는 사이에 아주 그냥 뽀독뽀독 살이 붙어가다가 요즘은 조-금 소강상태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물론, 살찌는 중년 남성들의 고민이 그냥 살이 찌는게 아닌 것처럼, 어김없이 배둘레햄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더 심각한건 배둘레햄보다 얼굴일 수도 있지. 평소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하다가도, 요즘은 우연찮게 찍힌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아주 그냥 몽달귀신인지 달걀귀신인지 대보름 귀신인지 얼굴이 빵빵 - 하니 동동 떠다닌다. 아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지난달인가 처가에 가서는 처제에게 무려! 형부, 얼굴에 코만 삐쭉 나온것 같네예... 까지 들었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 이 아니고 이 일을 어쩐다. 


더 통탄할 노릇인 건 여전히, 나의 이 괴로움들을 어디 하소연해봐도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는 이들조차 없다는 거다. 다이어트 해야겠어.. 라는 말만 꺼내면 대번 정색하며 얼씨구? 란 말이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래 물론 아직 내 키의 평균체중에는 미달이지. 한 5키로 정도 남았나? 뭐 그리고 오랫만에 얼굴 보는 사람들은 죄다 얼굴 좋아졌네 이제 좀 사람같네 뭐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내기도 하지. 야 네놈도 장가가더니 살이 찌긴 찌는구나 뽀하하하 장가 잘갔네 뭐 이런 소리 듣는거는 아내님 면도 있고 그러니 나쁘지 않다 쳐. 그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전에 산 바지들도 모조리 폐품으로 만드는 이 썩을놈의 배둘레헴과 호빵맨같은 부한 얼굴은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다고! 사진속에서 웃고 있는 오방떡같은 이놈이 나일리가 없다고! 위기라고! 움직여! 폐타이어라도 주워서 허리에 매고 동네라도 뛰어다니란 말이다! 그 배에 잘도 밥이란게 넘어가나 네놈은? 산소라도 흡입을 줄여!!!


...라고 해봐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분명히, 이 굉장히 어색한, 어서와 다이어터는 처음이지? 뭐 이런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떠오르는 걸 몇가지 적어보자면... 그래 나이살. 우선은 나이살이지. 이게 분명히 다르다니까. 과거 무말랭이 체형으로 살던 시절 그렇게나 살찌려고 바득바득 애를 써봤지만 매번 실패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증량은 어떻게든 해볼 수가 있었는데 감량을 막을 수가 없었더랬지. 매일 저녁 운동하고 닭한마리를 쳐묵쳐묵해가면서 눈물겨운 3~4kg 를 찌워 놓으면 뭘해. 조-금 바쁜 프로젝트나 조-금 스트레스받는 일 같은거 하나 있으면 숨쉬기 운동만 해도 미칠듯한 폭풍감량이 자동으로 일어나는걸. 근데 이게 확.실.히 달라. 예전이었으면 아마 한 10kg 정도는 순식간에 빠져서 체중 하한 마지노선까지 위협했을 만큼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한해를 보내고 있는데 체중계 눈금은 요지부동. 마치 전진만 있고 후진은 없다는 남녀간의 스킨쉽 진도처럼 고스란히 멈춰서 답보상태가 될지언정 감량에 이르지 않는 건 역시 나이의 영향을 꼽을 수 밖에 없는거다. 장황하게 썼다마는 뭘, 늙은거지. 과거처럼 뭐 좀 한다고 칼로리가 내일의 죠처럼 활활 불타올라서 잿더미만 남고 그러지 않는게야. 아 갑자기 쓰다보니 왜 눈물이...


또 있지. 결혼빨. 야 나는 결혼 전에 주위 어르신들이 장가가야 살찐다 - 라는 말이 그냥 뭐 용기를 얻으라고 하시는 말인줄 알았지. 아니에요 여러분. 에지간 - 하면 장가가면 살찝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게 아냐. 혼자라는게 때론 지울수 없는 낙인같아 살아가는게 나를 죄인으로 만들던 뭐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서 가정을 꾸리고, 힘겨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때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 + 야식! 야식! 폭풍야식! 술! 닭! 소화가 잘되는 고기! (...) 게다가 매일같이 퇴근이 늦으니 아주 늦은 시간에 먹는 폭풍야식이라는 것도 가산점! 그래 맞다. 사실 이러고 살이 안찌길 바라면 그게 나쁜놈이지. 아니, 과거에도 야식을 안먹던건 아니었으니 그렇게 먹고도 살이 찌지 않던 이전이 비정상이었던 게지. 으찌되었건 확실한 결혼빨도 이 체중 증가의 원인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이것 말고도 사실 잡다구리하게는 몇가지 더 있지. 폭풍야근과 피로로 인한 운동부족, 면식수행 등 밀가루 즐겨찾기... 그러나, 사실 가장 핵심되는 이유는 이것들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곁가지에 불과해. 나를 찌운건 8할이 OO 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핵심적이고도 결정적인 이유란 것은. 


'맛'에 눈을 뜬거지. 맛. 


이걸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과거 그렇게나 살이 안찌던 시절 주변의 뽀독뽀독 살이 잘도 오르는 친구들을 모니터링하며 내렸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살이 잘 찌지 않는 사람의 경우(체질 때문이라거나 하는 뭐 이런걸 배제하고 그냥 일반적으로) 상대적으로 같은 걸 먹어도 '맛없게' 먹는다. 어른들이 말하는 소위 '깨작거린다'는 거지. 식탐도 없고, 뭘 먹어도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른 사람들이 보기엔 저거 왜 저렇게 깨작거려 하는 식으로 먹는 경우가 꽤나 많다는 거지. 단적인 예를 들면 같은 고기를 먹더라도 괜히 다 구워진 고기를 뒤척뒤척 하다가 고기만 쏠랑쏠랑 집어먹는 사람과 상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음식의 혼돈의 카오스, 먹을 수 없는 것만 빼고 다 올려서 쌈싸먹어주마! 이렇게 먹는 사람과의 차이라는 거다. {김치,계란후라이,간장,밥} 이라는 한정된 메뉴가 있다 해도 계란후라이를 반숙해서 밥위어 얹어 노른자를 탁 터뜨리고 간장을 넣고 비빈후에 매 숟가락에 김치를 척척 찢어 올려서 먹는 사람과 반찬도 없네... 하며 깨작거리는 사람과의 차이야 있을 수 밖에 없지 않겠나. 그리고 최근, 늘어나는 배둘레햄을 끌어안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가 아니고 생각하다보니 느낀건 바로, 나의 가장 큰 변화는 저것이라는 것. 딱히 없던 식탐이 생기거나 한건 아니지만 적어도 '맛'이 주는 즐거움을 알고 '맛'있게 먹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것. 그 차이랄까. 


무슨 산해진미를 먹겠다고 -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식당 앞에서 줄서는걸 치과 가는것과 동급으로 싫어하던 인간이 맛집이라고 하면 제법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뭘 먹든지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 라고 하며 무언가를 먹는 행위는 '허기를 채우는 목적'외에는 하는 일이 없던 인간이 이제는 오늘은 뭣이 땡기네 하며 땡기는 음식을 찾아 나서는 날들도 잦아졌다(많은 경우 술안주라는 것은 안자랑) 심지어 아주 가끔이지만 요리도 한다!(게다가 내가 지금껏 했던 요리들은... 나쁘지 않다!) 어머 저건 먹어봐야 해! 하는 것들도 종종 생긴다. 어쩐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즐거움을 도로 찾아가는 기분인거다. 어린 시절 내가 그토록이나 열광했던(그래서 그렇게 통통했었더랬지), 우리 OO이는 먹는게 복이 있어~ 라고 항상 흐뭇하게 웃어주시던 외할머니의 손맛이 가득 담겼던 음식들과 멀어진 이후로 잃어버렸던 '맛'을 말이다. 대략 15세 이후로 20여년동안을 맛없는 인간으로 살았더랬다. 재미있게도 연애로 인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의 종류는 하나 둘씩 늘어났으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던 '맛'의 즐거움을 이제야 다시 느끼게 된거다. 


어쩌면 눈물나게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 가며 사실 즐길 거리라는 것이 그렇게 늘어만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친구들과 뭔 별다른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꺄르륵 꺄르륵 넘어가던 어린 시절과는 다른게다. 이제사 식도락을 즐기는 이들의 마음을 안다. 맛있는 음식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재미를 안다. 정성들여 차린 음식들을 맛있게 먹어 주어 고맙다고, 먹는게 예쁘다고 해주는 이를 바라보며 나 또한 조금은 부끄럽지만 기쁘고 즐겁다. 맛있는 집에 친구들을 데려가서 오 - 하고 감탄사를 내뱉을때 으쓱해하는 즐거움을 안다. 여전히 썩 좋아할 수는 없는 식당 앞에서의 대기도, 맛의 즐거움을 알기에 어느 정도는 견딜 만 하다. 여전히 서툴지만 한참을 낑낑대며 무언가를 만들어놓고, 간을 맞추면서 맛을 볼때 제법 그럴싸한데? 라고 하며 자뻑하는 즐거움도 안다. 어쩌면 단순히 '맛'의 즐거움을 아는데만 그치는게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수한 음식들의 무수한 맛들처럼, 맛의 즐거움으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즐거움들이란 얼마나 현란한가. 내 이제사 그 즐거움들의 앞에 다시 발을 디딘거다. 

그래, 이것은 뱃살에 대한 푸념으로 시작해서 맛의 즐거움에 대한 현학적 고찰을 통해 비겁한 변명을 하려는 글...은 아니지만 뭐 그래, 일단 죽어가는 얼굴 라인과 볼링핀형(?) 체형에서는 좀 벗어나야 한다 쳐도, 인생이란게 뭐 그런게 아닌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마냥 좋기만 한것도 마냥 싫기만 한것도 좀처럼 있기 힘든 그런. 일단은 즐겨도 좋을 것들은 즐겨두자. 맛있는 인생이다. 당신의 인생도 충분히 맛있어지길. 어떤 면에서든 말이다. 

그나저나, 저녁엔 또 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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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일요일 저녁이었다. 우연찮게 오후 늦게 어딜 좀 나가야 했던지라, 아내와 함께 나간 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오기로 했다. 동네의 아끼는 식당중 세손가락 안에 드는 샤브샤브집에 앉아 주문을 했었더랬다. 아으, 역시 여름엔 시원한 집이 제일 좋은집이지 -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한접시 가득 야채며 고기들이 올라온다. 배도 고팠더랬지. 육수를 팔팔 끓여서 야채를 집어넣고, 고기를 담궈 휘휘 저어 꺼내어 먹고. 주말의 만찬인데 술 한잔이 빠질 수 있나. 신나게 먹고 마시던 참이었다. 워낙 먹는데 열중하느라 주위에 누가 앉아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었더랬는데 옆 테이블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대략 짜증이 가득한 - 목소리가 울리는걸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중년쯤 되어보이는 부부와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보이는 어린 소녀가 옆 자리에 앉아있었다. 약간 하이톤으로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엄마로 추측되는 여자분,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종업원 아주머니. 


뭐 남이 클레임 걸고 그러는걸 듣고 싶어 듣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워낙 조용한 식당에 목소리가 뾰족하게 울리기에 절로 귀로 날아들어오는 내용을 들어보니 그다지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샤브샤브 집이지만 삼겹살 등의 구운 고기 메뉴가 있었고, 구운 고기 메뉴를 시키면 후식 냉면을 주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샤브샤브를 먹고 나서 후식 냉면을 주문했더니 고기를 먹은 테이블에만 가능하다 - 해서 그런게 어딨냐 어쩌냐 하고 있었던것. 나중에 들어보니 요즘 하도 덥고 해서 고기 주문 손님도 없기에 일시적으로 냉면 메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식 냉면이건 그냥 냉면이건. 그렇다고 굉장히 진상 손님마냥 목청 높여가며 아줌마야 아줌마야 냉면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어 먹으리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니 그냥 냉면이라도 안돼요? 어떻게 안돼요? 이렇게 간헐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는데 그 텀이 좀 짧았더라는 것이다. 첨에야 뭐 상황을 잘 모르니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더랬지. 아니 여기 뭔 냉면 맛집인가 어째 그리 냉면에 매달릴꼬. 게다가 이미 남자분도 여자분도 먹을만치 먹은듯, 아우 배불러 하는 소리를 조금 전에도 들은 것 같았었는데 말이다. 허 뭐, 남이사 냉면을 먹건 말건 내것이나 마저 신나게 먹자 하고 건더기들이 슬슬 사라져가는 육수에 칼국수를 쓱삭 밀어넣는 순간 들린는, 조금 전보다 조금은 더 날카로워진 여자분의 목소리. 


"글쎄 안된다잖아! 오늘 냉면이 없대! 떼를 써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야! 그렇게 먹고 싶어? 그럼 이따가 나가서 가는 길에 냉면집에 들려서 사준다잖아!"


허허, 그제야 상황을 좀 짐작할 수 있었으니, 이미 그 즈음부터 눈시울이 벌개지기 시작한 어린 소녀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실망한 표정을 머금고는, 조금 아까처럼 다그치다가, 또 부드러운 말로 살살 어르며 달래다가, 이것저것 음식을 떠서 입가에 가져다주기도 하다가, 도로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는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고 달래기에도 지친 엄마가 맘대로 해, 먹지 마! 라고 하고는 등을 돌리자 인제는 아주 벽쪽으로 돌아앉아서 고개를 떨구고는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터무니없는 떼를 쓰는 딸네미를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빠는 그제서야 우물쭈물하며 울지 말라고 달래기에 거들고 나섰다. 인제는 많이 언성이 낮아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울지 마, 이따 가면서 냉면 먹자. 아니 이런걸로 울면 어떻게 하니, 울 일도 아닌데... 한참을 그렇게 달랬을까,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다시 상가로 앉은 소녀다. 또 잠시 지나자 좀 전까지 언제 그렇게 서럽게 울었냐는듯 방긋방긋 웃으며 아빠가 먹여주는 죽을 맛있게 삼키고 있다. 어쩐지 그제야 나도 좀 마음이 좋아져 다시 내 접시며 술잔에 집중한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쯔음으로 이제는 확연히 풀린 엄마의, 차분한 훈계가 들려온다. 


"아무리 그래도, 너 오늘처럼 떼쓰고 그러면 안돼. 식당 아주머니도 안된다는데 떼를 쓴다고 그게 되는게 아니잖아. 그리고 이런걸로 울고 그러는 것도 나빠. 다음부터 그러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고 있던 아이였다. 잠시 후 먼저 자리를 일어나는 가족들의 얼굴에는 그래도 웃음이 가득하다. 내 앉은키만은 할까 한 어린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식당 밖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남아있는 술잔에 동동 떠다닌다. 무엇하나 포기하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나 어린 날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포기가 어렵고 쉽고를 떠나서, 어째서 내가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가에 대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면 괜스레 심통이 먼저 치밀고, 그 때문에 한마디 혼이라도 나고 나면 삽시간에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어찌되었거나 누군가의 어르고 달램 - 을 받고, 그리고 마지못해 포기해야 함을 깨닫고 수용하게 되면 참으로 다행이다. 운 나쁘게도, 어떤 어린이들은 갖기도 전에 빼앗기고, 아예 가져본 경험조차 없이 자라나곤 한다. 포기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들은 많은 경우 고스란히 결핍으로 남고, 폭력 따위의 굉장히 불유쾌한 강압에 의한 강제된 포기는 가벼운 할큄이든 깊은 자상이든 상처로 남게 마련이다. 포기하는 방법을 잘 배워야 하는게 중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각박해지고, 사회는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떠나 아이들에게 '양질의 포기법'을 가르쳐주는데 나날이 인색해진다. 더러는 스스로도 그렇게 포기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 것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더러는 스스로의 서럽고 괴로웠던 포기의 경험들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에게 적절히 포기하는 법을 가르치는데 게을러지게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결정장애에 시달리게 되거나, 더러는 포기를 모르는 불꽃남자(혹은 여자)로 자라나서 내것이 되지 못할 바에야 모조리 불타버려라 하는 식의 극단적 행동을 보이는 괴물로 자라기도 한다. 반대로 포기하면 편해 하지마가 어린 시절부터 아주 깊숙히 배어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것들까지도 쉽사리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게다. 어떤 쪽이든 좋지 못하다는것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배움 중에서도 그런 것들이 있지 않은가. 인생의 어떤 순간에 배우지 못하면 평생을 걸쳐 그 배우지 못함이 두고 두고 삶을 괴롭히는. 포기하는 방법이란게 바로 그런 배움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잘 가르치려면? 뭔 매뉴얼이 있겠나, 교본이 있겠나. 포기의 영재로 키웁시다 따위의 자기개발서가 있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방법은 하나다. 아이들의 인생에 걸친 현명한 포기(?)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 어른들의 인내다. 무작정 다그치지도, 몽둥이를 휘두르지도 말고, 무조건 오냐오냐 우쭈쭈쭈 잘한다 잘한다 내새끼 하지도 말고. 때론 단호하되 냉정하지만은 않게. 끈덕지게 설득하고, 바른 선을 그어주는 인내. 아마도 그 어린 소녀는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샤브샤브 끝에 나오는 죽까지 남김없이 먹고 배부른 숨을 몰아쉬던 부모는 집에 가다가 들리는 냉면집이 내킬 리가 없었겠지만, 부모에게 떼를 써가며샤브샤브를 먹지 않고 버티면서까지 바라던 시원한 냉면 면빨을 호로록 호로록 빨아들이던 그 날에 자신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결국 떼를 써서 쟁취해낸 냉면이 아닌, 그렇게나 끈질긴 부모의 인내와 그에 못지 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설령 깨닫지 못하더라도, 귀여운 소녀가 어여쁜 아가씨가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가는 먼 훗날까지 무수히 부딪치게 될 무수한 버림과 취함의 순간에 따뜻한 등불이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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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잡담

치과가 싫다 -_-;

내가 아부지한테 쇠의자로 얻어맞고 귀 뒤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느끼며 병원 침대에 드러누워 12바늘을 꼬매는 동안에도 '아놔 이걸 또 사람들한테 뭐라고 얘기하냐' 따위의 한가한 고민이나 할만치 무딘 인간이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과는 싫다. 싫어! 그냥 싫어! 그 냄새, 그 지이이잉 하는 소리! 러ㅏ내ㅑ조래ㅑㅂㅈ륒두루ㅏㅣㅈ둘 싫다고! 싫어! 왜 신은 인간에게 강철 이빨을 허용하지 않았...

휴으 -_-;

얼마 전 뭔가 뜨거운 국물을 먹다가 갑자기 찌리 - 하는 통증이 오길래 부들부들 떨면서 치과 예약 잡아놓고 이핑계 저핑계로 미루기를 2주간이나. 잠깐 그랬던 거였는지는 몰라도 또 안아프길래 그냥 쨀까 하다가 치과 간지도 오래 되었고 해서 댕겨왔는데... 으앜 싫어! 기다리게 하지 마! 소리 들리게 하지 말라고! 차라리 수면마취를 시켜줘!!!!! 의술이 이렇게나 발전했는데 어째서 스켈링은 여전히 그 전기톱 소리나는 그 뭐시기를 입에 쑤셔넣어야 되는거냐! 레이쟈 이런거 없냐! 으엌ㅋ커커키ㅓ림아ㅓㄹ;ㅣㅇㄻㄴㅇ

하악 -_-;

다행히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해서 당분간 잇몸치료 받는걸로 그쳤지만... 어제 저녁부터! 내일은! 치과가야 한다는 생각에! 출근까지 하기 싫어서! 내가! 꿈도 뭔가 호러물이고! 앙! 그런 의미에서 남겨보는, 이래저래 잡담글. 

*

새 길 찾아 떠난다는 후배놈에게, 일주일 후 뵙겠습니다 -_- 하며 유예기간을 줬더니 정확히 일주일 후에 역시 가겠습니다 하기에 쿨하게 팀장님 접견시켜드렸다 - 는 개뿌리. 쿨하지 못해 미안하다 이놈아. 여러모로 아쉽기 짝이 없다. 나름 촉망받는 인재였던 것도 그렇고, 경기권 프로젝트로 출퇴근도 여의치 않은데 가게 되어서 좀 우려했던 부분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버린 것 같아서도 그렇고, 이제 좀 뭘 맡겨도 미덥구나 싶게 제구실 할때 되었는데 간다는 것도 그렇고, 본인의 입장을 생각해봐도 한 한해만 더 해보면 제법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어찌되었거나 선택이 그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도 그렇고. 팀장님은 같이 술한잔 하면서 한번 맘 돌려봐주길 바랬던 눈치셨는데 또 그, 선배 가오라는게 그런게 아니잖슴까. 맘 떠나는 놈 잡아보자고 이런 말 저런 말로 본인으로써도 어렵게 결정 내린것을 흔들고 뒤집고 하는것도 선배로써 할짓이 아니지예 - 라는 생각으로 그냥 사무실에 쳐박혀 있었더랬지. 

이게 하필이면 아버지한테 받았던 데미지가 좀 회복된다 싶은 시점에 크리티컬로 들어온거라 지난주쯤에는 정말 일이고 나부랭이고 의욕이 뚝 떨어져버렸더랬다. 마침 이번주에 올해 신입사원 입문교육 떠나는 아해들이 있어서 그간 짬짬이 교육도 해주고 그러고 있었는데 의욕이 뚝 떨어져버리고 나니까 그것도 버겁더라. 후배 잘 키워놓으면 뭐하겠노, 기분 좋-다고 꿈 찾아 떠나겠지. 꿈 찾아 떠나면 뭐하겠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묵겠지 -_- 뭐 이런 기분. 그와중에도 도리는 해야지 하면서 교육 가기 전 주의사항 일러 주고 살뜰히 밥 챙겨먹인 후에 보내긴 했다마는. 

뭐 근데, 막상 팀장님 면담에서도 맘을 돌리지 않고 한달 후 퇴사 확정! 이렇게 되고 나니까 또 뭐 그냥 좀 차분해 지더라. 갈 사람은 가는거고,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의 몫이 있는거고. 언제나 그렇게 받아들여 왔잖냐 -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떠나는 사람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남은 애들 잘 다독이고 그래야지. 회자정리 거자필반이요 인연이 닿으면 언제 어떤 모습으로건간에 다시 함께 일하게 되거나 만날 기회도 생기것지. 안그런가 자네. 다만 행운을 빌지. 굳이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장가는 좀 빨리 가라. 타이밍 놓치면 그냥 안녕인것이여. 특히나 남녀간의 타이밍이란것은, 한번 어긋나면 그 생에선 그것으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자네도 얼추, 머리로는 알고 있을텐데?

*

몇주 전 우연찮게 블로그 돌아다니다가 굉장히 역한 글을 보고 울컥해서 떠난지 오래된 그곳에 로그인해서 글까지 휘날릴뻔 했는데 그냥 아서라 - 라는 심정이 되어 그만뒀더랬다. 그 얘길 우연찮게 즐거운 술자리에서 하다가 글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글쓴이 닉넴이 뭐였는지조차 잊어버린(그땐 술취해서 그런게 아닌가 했긴 했는데;) 걸 알고 정말 싫었나보다 - 라고 하고 넘어가버렸더랬지. 근데 오늘! 치과 스트레스로 아침부터 일도 못하고 블로그나 둘러보고 있던 오늘! 찾았다. 그 글을 찾은게 아니라 뭔가 개인적으로 읽기엔 참 거시기한 문체의 글을 문득 보고 어? 하며 몇페이지 넘겨보다가 아 이거였구나 했더랬지. 새삼 다시 읽어봐도 오만과 허세와 오지랖과 느끼함이 비빔밥처럼 어우러져서 -_- 개짜증이 나는 글. 뭐 근데 그게 그냥, 이글 저글 몇개를 들여다보니 그냥 이 냥반도 별 생각 없이 감수성 발동하셔서 끄적인 것이겠구나. 뭐, 세상에 넘쳐나는게 뻘글들인데 일일이 스트레스받을 이유가 없지 하는 생각에 그냥 픽 웃고 덮고 말았다. 행여 죽자고 달려들었으면 꼴 우스울뻔 했다. 그저 개인의 감상글에 달겨들어봤자;그냥 뭐 그러고 다시는 갈 일 없는 그 블로그 창을 닫았는데 그러고 나니 좀 찝찌름 - 하여 여기에나 좀 깨작대고 말련다. 

난 어떤 사람의 외형(생김새나 차림새)으로 그 사람의 삶이나 사상, 환경들을 넘겨짚는건 그 사람이라는 하나의 인격체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예를 들면 이런거야. 내가 길을 가다가 엄청시리 야한 여자를 봤어. 짧은 미니스커트에, 현란한 무늬의 망사 스타킹에, 짙은 화장에... 그런 여자를 보고서 '와 섹시하다!' 혹은 '와 한번 자고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뭐 본능의 영역이고 그런것이니 패스. 만약 그 여자의 이미지가 네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어떤 경험들과 결합해서 '술집여잔가?' 뭐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 거기까지도 머리속에 조건반사적으로 생성되어버리는 어떤 생각을 스스로 모조리 통제할 순 없을테니 잘하는건 아니어도 그렇다 치자 이거야. 근데 그런걸 어디 가서 읊조리거나 이놈 저놈이랑 얘기하며 마치 그런 것이 그런 것인것마냥 - 얘기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얘기지. 존나게 고상한 말투로 '아, 저 여인은 얼마나 많은 남성을 가녀린 육신 위에 얹었더랬을꼬' 이따위 소릴 지껄여봐야 더 역겨울 따름이라고. 반대도 마찬가지인 거지.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를 보고 '저 사람은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을지언정 '아! 정말로 비탄에 가득한 얼굴이로구나. 분명 사업 실패 따위로 가족과 자식들에게까지 버림받았을테지' 이따위 얘기를 주절주절 하는건 잘못되었다는거다. 막말로 누가 자네를 보며 '아! 참으로 마주하기 어려운 얼굴이로구나. 저 사람은 태어나서 여자를 만나본 적이나 있는걸까?' 이따위 얘기를 어디 가서 누가 하고 있다고 하면 소름 끼치지 않겠냐고. 

스스로의 오만을 싸구려 동정 따위로 포장해서 스스로 뭐라도 되는냥 굴지 말란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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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는 할 말이 없다 -_- 노 코멘트. 아 생각만 해도 위염이 일어나는;;;;;

그나마 우리 애들 다친데 없이 돌아와서 다행이지. 하으, 시즌 개막까지 한달 남았구나. 하기사 뭐 WBC에서 연전연승 했다 해도 사무실에서밖에 못보는 신세였을테니 잘된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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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 재가 된 집중력을 어떻게 다시 끌어모은다 -_-;

뜬금없이 노래방 가고 싶은 날이로고(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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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만의 우울

정말로, 오랫만이지. 


무언가를 밀어내려고 블로그 창을 여는 것이 말이다. 마지막 글이 작년 3/31일 이었으니 거의 일년이 다 되었다. 트위터에 스쳐 지나가듯 한마디씩 남겨놓는 것을 제외하곤 어떠한 글도 쓰지 않았으니 새삼 생각하니 놀라울 뿐이다. 하루 일과를 시작할때 블로그에 올릴 컨텐츠를 고민하고, 삘 받으면 하루에도 장문의 글 몇개씩을 주룩주룩 토해내던 지난 날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똑 끊고 살았는지 신기한 마음이 앞선다. 


바빴다 - 는건 말이 안되지. 뭔가,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바쁜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뭣때문이라도 항상 바쁨이 따라다니는 인간이니 말이다. 그렇게나 폭풍 블로깅을 하고 있을때 바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역시나 바쁨의 이유보다는 어떤 내면적인 이유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뭐 그러하다. 좋게 생각하자면 꾸역꾸역 마이너스 에너지가 넘쳐흘러서 혼자 나불대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치 속에 쌓이는 일이 없었다는것이고, 살짝 부정적으로 보자면 유래가 없이 평온이 길었던 시간들 덕분에 잔뜩 나태해져서 생각을 글로 쓰고, 정리하고, 다짐하고, 되돌아보는 일들에 터무니없이 게을렀다는 것일게다. 그리고 살짝 부정적으로 - 라고 말한 만치 그간의 침묵들은 전자쪽으로 8할정도 기울여 볼 수 있는 게지. 


오랫만에 쓰는 글이라 길고도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요약하자면 이런것. 잘 삽니다, 바빴지만 마음은 정말로 이런 나날들도 있구나 - 싶게 평온함들을 유지하며. 소소한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가면서, 일은 위기에'만' 강해야 제맛이지 하던 날직딩에서 조금은 철이 든, 모범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는 인정받는 로동자로 클래스 체인지 하면서 보낸 1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사실은 작년 연말에 연말 정리글을 오랫만에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더랬는데, 그만치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한해였던 덕분이겠지. 더 짧게 요약하자면 만족스러운 1년을 보냈다. 충분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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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또, 결혼한다더니 이승을 등졌는지 블로그는 말도 없이 유령 블로그로 만들어놓고 잠잠하다가 갑자기 주절주절 잡담을 시작하는 이유라면? 뭐겠나. 위에 썼잖수. 뭔가 꼬여 마이너스에너지가 넘실거리는 통에 이걸 어디에라도 밀어내두지 않으면 뭐가 계속 숙변처럼 남을 것 같은 느낌에 어쩌면 그때보다 그 전에, 처음 블로그란 녀석을 알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도 못한 채 모 블로그에 정착했을 그맘때쯤에 블로그를 썼던 딴에 초심(?) 혹은 그때의 필요가 고스란히 살아나서 오랫만에 블로그를 연 것이지. 오히려 아주 오래 쉬어서 잊혀져버린 이제는 내가 여기서 굉장히 퓨어한 우울을 뿜어내건 중2병 놀이를 하건 신경쓰지 않고 주절주절 할 수 있지 않겠냐, 뭐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더랬고. 


그래서 사실은 지지난주부터 꾸역꾸역 일어나는 마이너스에너지에 으어어어 이건 어디서건간에 좀 밀어내지 않으면 사고치고야 말겠다 하여 몇번이나 글을 쓰려고 했는데 와, 이거 오랫만에 써보려니까 손가락이 다 오그라들었는지 좀체 뭔 얘기가 안되. 아니 또 그리고 하필 구정 지나서부터는 바빠지기 시작했으니. 근데 그게 우습게도 또 그러던 와중에 지난주쯤엔 결정적으로 스트레스를 안겨줬던 문제가 어설프게나마 봉합이 되기도 했고, 고마우신 지인느님 덕분에 격하게 술마시고 수다떨다가 뭔가 흐물흐물 스트레스가 녹아내리기도 하고. 허 이렇게 또 어울렁더울렁 넘어가는건가 하고 있었는데 그게 뭐랄까, 근 1년을 묵었다가 새삼 뭐라도 좀 주절거리고 싶다고 자극을 한번 받아서인지 이 똥을 누기전엔 변기를 떠날 수 없다는 심정(...무슨 심정이냐)이 되어 결국 왠죙일 주구장창 회의만 하다가 지나가버린 월요일 저녁에 이렇게 꾸역꾸역 밀어내본다 - 라는 얘기. 야 근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까


이제 겨우 오랫만에 블로그 쓰게 된 이유까지 나왔는데, 언제 다 쓰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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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순수하게 트라우마 때문인데, 정말로 낙엽만 떨어져도 눈물이 나왔던 꼬꼬마 시절과(그...그정도까진 아니었나) 비교하자면 뭐 거의 멘탈이 휴지쪼가리에서 초합금Z 정도로의 강화는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여전히 약점이라는 부분이다. 난 아버지로부터의 스트레스에 무척이나 취약하다. 그부분만큼은 어째 과거에도 지금에도 전혀 변함이 없는, 초합금Z 로 커버되지 않는 파일더의 유리창같은 기분이 드는 부분이란 말이다. 한방만 제대로 맞으면 바로 멘탈이 빈사상태가 되는, 아킬레스건 중에서도 아킬레스건. 


평화로운 구정을 효도하며 잘 보내고 연휴 마지막날에 정말 무방비상태로 아버지한테 얼마만에 당해보는지 모를 멘탈 브레이크 어택을 받고 나니 이건 뭐 오랫만에 당해서 그런지 순식간에 멘탈이 먼지가 되어 대략 2주를 멘붕 상태로 보냈더랬다. 이게 에지간한 일이면야 마음이 대해급으로 넓으신 아내님이랑 술이나 한잔 하고 그랬쪄용 속상했쪄용 토닥토닥좀 받고 잠들면 눈을 뜨고는 새로운 세상 눈누난나 이랬을 터인데 이게 무려 시댁으로써의 - 어쩌구인지라 아내님도 나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덩달아 멘탈에 스크래치가 나시는 통에 아주 부부동반 멘탈유실(;) 상태가 되어 고생을 두배로. 


게다가 어쩌면 그렇게 화를 내시는 방법까지 예전에 그렇게나 치를 떨었던 딱 그,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내주셔서 이건 멘탈 붕괴가 점점 분노로까지 변해가더라. 그대로 불타올랐으면 아마 더 큰 평지풍파가 일어났지 싶은데 그래도 극적으로 어찌저찌 봉합 후 해소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찌뿌드한 앙금이 남은게 느껴지니 정말 오랫만에 겪은 일이라 새삼 과거에 내가 얼마나 저런것들을 싫어했었나까지 떠올라서 씁쓰레한 뒷맛이 가시지가 않는다. 이해를 굳이 하자면야 못할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이해하고 수용하려 하는 것 자체에 아직 스스로 거부반응이 남아있는것. 


나이를 먹고,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무형의 유산들이 생각보다 많고, 아버지 자체도 인간적으로 이런저런 충분한 장점들과 매력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삶 그대로 인정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주저 없이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어떤 부분들만큼은 여전히, 앞으로도, 죽을때까지도 절대 닮고 싶지 않다. 이를테면, 인간관계에 대한 방식같은 것. 


*


부모의 흉허물을 제아무리 뭐 누가 읽어보랴 싶은 공간이지만 굳이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생략하고. 게다가 뭐 하루 이틀 겪는것도 아니고 이미 충분히 당신의 사고방식과 고집대로 지금껏 살아오신 아버지가 내가 아무리 뭐라 해본들 변하실 리가 없지 않은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잘 포기하자 - 가 나름의 모토인데 그런것만으로 이렇게나 뭔가 찝찌름한 앙금들이 남았을리는 없다. 나란 인간은 결국, 주위에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건 외부, 타자, 환경 등 그게 아무튼 나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나름 굉장히 대응이 빠른 편인데 그게 '나'의 문제를 들춰낼 때에야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깊은 수렁에 빠지곤 하는 인간이어서 말이다. 어쩌겠나, 뭐 빈틈이 많은 인간인지라. 므헣허헣. 


분을 가라앉히고 머리에서 열기가 좀 빠지고 돌아보니 여전히 풀리지 않는 찝찝함이란 어쩌면 아버지와 부딪친 그런 부분들이,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는 어떤 부분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나역시 그런것들을 어느정도 닮아버리고 있지는 않나 하는 굉장히 오래전부터 가져온 근원적 공포심이 자극받은 덕분인거다. 물론 아버지와 나와는 사람을 대하는 기본 성향도, 인간관계의 방식도 다르다. 그건 내 성격의 메인 스트림을 차지하는 것들은 대부분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에서. 나는 사람을 좁게 만나고, 오지랍 떠는 일을 무척이나 경계하고, 오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관계에 있어서의 중요 목표중 하나이며 에지간하면 분쟁을 피하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데 별로 주저하는 법이 없다(물론 아버지가 이와 완전히 반대이기만 하거나 그래서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관계라함은 어떠했었나. 


그저그저 소소히 스쳐갔던 이들, 그리고 만난지 스무해가 되었거나 스무해가 머지 않은 친구들은 그렇다 치고, 이제는 내 삶과 어떤 식으로든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사람을 제외하고, 삶의 어떤 순간에는 나에게 그렇게나 중요했던, 그렇게나 친해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친했고, 이 사람과는 정말로 오래오래 - 를 바랬거나 반대로 나에게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다가왔었던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바빠서, 삶의 영역이 어긋나서 멀어진 이들까지도 그렇다 치자. 나머지 사람들은, 한때는 나와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주고 받았던 이들은, 어떻게 지금 이렇게 멀어져 있게 되었더랬나. 


그 부분에서 단 한마디 변명같은 것조차 할 수 없는, 온전히 내 부족함과 어리석음과 불안정함으로 인해 멀어지게 되었던 이들. 더러는 이기심으로 등을 돌리고 더러는 나를 견디지 못하여 등을 돌렸던 이들. 내 마음속 한 구석에 깊게 죄책감과 더불어 남아 있는 이들 말이다. 한순간에 실수라고 하기엔 제법 수가 되는. 그래서 떠올릴 적마다 더 스스로 내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고대로 배워 고대로 행한 덕에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잃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잃게 만든 내 어떤 인격의 단면을 내가 항상 주의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또 누군가들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살아가며 얻는 사람은 나날이 귀해지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만치 귀한 이들일진데 그런 이들을 행여 어느날의 과오로 인해 잃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어느날 눈을 뜨고 나면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통에 뭐라 사과할 말도 찾지 못하고 미처 사과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런 굉장히 오래된, 이제는 조금은 잠들법한 그런 두려움을 자극받은 덕분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쿨하지 못한 인간이어서. 


가끔은 그렇게, 이제는, 조금쯤은 덜어내도 좋을 기억들을 꾸역꾸역 부여잡고 있는 덕분에 앞을 향해야하는 발길이 질질 땅에 끌리는게 느껴질때. 그런 날이면 좀 한숨이 나는거지. 그래서 이렇게 오랫만의 끙끙 밀어내는 글도 깨작이고 있는거고. 


*


역시 좀 밀어내고 나니 시원하구만, 낄낄낄. 


어느새 사무실에 홀로 남겨진 처지라, 행여라도, 아직도 그냥 생각이 날 때면 일년에 한번쯤 슬쩍 여기 들려봐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 이라는 가정하에 안부성 이야기를 조금만 더 남기고 마무리해야겠다. 에에 - 그러니까, 잘 지냅니다. 오랫만에 우울 돋는 이야길 하긴 했지만 이건 그냥 뭐랄까, 음... 주기적인 발작(?;;)이 굉장히 오랫만에 도진거라 보시면 되고, 오늘쯤은 툭툭 털었어요. 음낄낄. 뭐 당장 내일부터 한달은 한치의 예측 오차도 없이 헬이 되어버린 프로젝트덕분에(왜! 도대체! 왜 난 꼭!) 또 뭐 미칠듯이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 해서 그냥 찝찌르름한거 털고 가려던게지요. 잘살구요, 잘먹구요, 잘쌉... 아 신혼은... 좋아요! 좋지요! 결혼 꼭 하세요 두번 하세요(야!) 흠낄낄낄. 


어쨌든 오랫만의 멘붕과 신경쇠약 덕분에 블로그도 다시 찾았으니 이제 일주일에 한번씩은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자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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